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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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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핵은 하얗고 미국 핵은 검다?

‘나쁜 핵’과 ‘좋은 핵’이 있다는 이중잣대가 일본 반핵운동을 혼란과 분열로 내몰아,
1961년 소련의 핵실험이 직접적 분열의 계기가 돼
등록 2014-09-27 11:44 수정 2020-05-03 04:27

“미국의 ‘죽음의 재’는 거무칙칙하게 더럽지만 소련의 그것은 하얗고 아름답다.” 1962년 당시 일본 공산당 부위원장인 우에다 고이치로(上田耕一郞·1927~2008)가 당내 비밀회의에서 내뱉었던 발언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공산당 의장을 지낸 후와 데쓰조(不和哲三)의 친형이면서 훗날 4선 국회의원을 지낸 공산당의 중요 이론가의 발언이니 일본 공산당의 핵정책을 생각할 때, 결코 지나칠 수 없을 만큼의 무게감이 실려 있다고 해도 좋다. 문헌상으로 확인 불가능한 이 발언의 진위를 둘러싸고 지금까지도 공방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당시 일본 공산당이 소련의 핵무기는 미제국주의 핵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적 핵’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노사카 산조(野坂參三·1892~1993) 당시 공산당 의장이 1963년 9월9일 기관지 (적기)에서 “가령 ‘죽음의 재’의 위험성이 있다 해도, (소련이) 핵실험 재개라는 비상수단에 의지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소련의 핵무장을 옹호하는 발언이 이후에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핵에 반대한다’는 명분과 상관없이

여기서 말하는 ‘죽음의 재’란 핵무기나 원전 사고 등으로 공기 중에 방출되는 방사성물질이 포함된 ‘방사성 낙하물’(nuclear fallout)을 뜻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공기 중에 비산되는 방사성물질은 냄새도 색깔도 없다. 그만큼 고약하다. 하지만 핵폭발 뒤 방사성물질을 다량으로 포함한 ‘죽음의 재’가 비가 되어 하늘에서 내리는 경우에는 색깔을 지니기도 한다.

실제로 히로시마에서는 원자폭탄 폭발 직후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렸다. 피폭 직후에 내린 ‘검은 비’를 맞아 ‘죽음의 재’를 뒤집어쓴 여성의 결혼 차별 이야기를 다룬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1898~1993)의 (1966)라는 작품을 들춰내지 않더라도, 여러 피폭자들의 증언을 보면 히로시마에 내렸던 ‘죽음의 재’는 실제로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1954년 비키니 핵실험으로 피폭당한 제5후쿠류마루 생존자들의 증언을 보면, 이들이 피폭 직후에 목격한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마치 눈꽃 같은 ‘하얀 비’였다. 바다 속의 산호초가 핵폭발로 하늘로 올라갔다가 비가 되어 바다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소련제 핵물질이 하얀색이고 미국제 핵물질이 검은색이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색깔로 선악을 나누고 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오래된 비유법의 하나이겠지만, 역시 검은색을 ‘더러움’으로, 하얀색을 ‘아름다움’으로 형용하는 이 좌파 이론가의 발언에서 인종적 편견의 단서를 찾아낸다면 혹시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다. 어찌됐든 우에다나 노사카로 대표되는 일본 공산당은 미국과 소련의 핵을 각각 ‘검은색’과 ‘하얀색’으로 비유함으로써 핵에는 ‘나쁜 핵’과 ‘좋은 핵’이 있다는 이중 잣대를 숨기지 않았다. 이같은 관점이 일본의 반핵운동을 혼란과 분열로 내몰았다. 그렇다면 확실한 것은 일본 공산당은 모든 핵에 반대하고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른바 ‘절대적 평화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이다.

히로시마·나가사키·비키니에서 비롯된 일본의 반핵운동이 ‘모든 핵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음에도 실제로는 ‘좋은 핵’과 ‘나쁜 핵’ 문제는 항상 논쟁의 중심이었다. 미국만이 핵무장을 했을 때는 그저 미국 핵에 반대하면 그 실현 가능성 여부는 차치하고 세상의 모든 핵에 반대하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소련(1949), 영국(1952), 프랑스(1960)에 이어 중국(1964)까지 핵무장 국가의 대열에 뛰어들자, 핵에 반대한다는 것은 핵 자체뿐만 아니라 핵을 가진 국가나 그 국가가 지향하는 이념과 정책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들 5개국의 핵독점 체제를 제도화한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등장 이후에도 인도(1974), 이스라엘(1979), 파키스탄(1998), 북한(2006) 같은 나라들의 ‘신규 진입’이 이어졌고 이때마다 이들 ‘신규 진입’에 대한 입장 표명이 반핵운동 진영에 크든 작든 일정한 혼선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역시 1960년대에 일어났던 사회주의권의 핵무장 문제만큼 혼란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결의 채택하고 불과 보름 뒤

‘반핵’이라는 공통의 목표하에 좌우가 결집했던 일본의 반핵운동에 본격적인 분열의 조짐이 감지된 것은 1961년이다. 그해 8월에 열린 제7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에서는 미국의 핵실험 재개 조짐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핵실험 정지) 후에 처음으로 핵실험을 개시하는 정부는 평화의 적이며 인도의 적”이라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공산당계도 사회당계도 모두 이 결의에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의 채택에서 불과 보름이 지난 8월30일, 소련 정부는 ‘갑자기’ 핵실험 재개를 선언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고 10월30일에는 사상 최대의 수폭 실험을 북극 부근에서 진행한다. 여기서 ‘갑자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일본의 반핵운동 진영의 누구도 소련의 핵실험 가능성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반핵운동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았다”고 말한다.

미국도 소련에 질세라 9월5일 지하 핵실험 재개 성명을 발표하고 9월15일 지하 핵실험을 재개했고, 1962년 3월에는 대기권 내 핵실험 재개를 발표하는 등 핵실험을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갈수록 심각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1961년부터 대기권 핵실험이 금지되는 1963년까지 미국은 모두 124회의 핵실험을 실행에 옮긴다.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개발 전쟁, 즉 ‘치킨게임’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소련이 채택한 ‘평화 공존’ 노선은 전면전쟁을 피하고 체제 간의 경제 경쟁에 전념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핵무장 국가인 미소의 핵 억지력하에 당시 프랑스, 서독, 그리고 중국의 핵무장을 막으려 했다. 이에 따라 1958년 3월, 소련은 핵실험 중지를 결의하고 핵실험 중지 협정을 체결하자는 뜻을 미국과 영국에 전한다. 물론 협정 체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소련의 일방적 핵실험 중지 선언은 일본의 반핵운동 진영에 소련에 대한 기대를 높였을 것이다. 그런데 소련이 핵실험 중지 선언을 깨뜨리고 ‘갑자기’ 핵실험을 재개한 것이다.

‘평화의 적은 누구인가’ 논쟁

핵실험 재개 직전에 발표된 결의대로라면, 소련의 핵실험 재개를 “평화의 적, 인도의 적”이라고 규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사회당·피폭자 등은 결의대로 실험 재개에 반대하면서 항의의 뜻을 천명했지만, 일본 공산당은 오히려 소련의 실험 재개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일종의 ‘전향 아닌 전향’이었다. 이후 일본 반핵운동은 극심한 내홍에 휩싸이게 된다.

일본 공산당이 소련의 핵실험 재개를 지지한 것은 물론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절대적 지도력을 행사하던 소련 공산당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논리도 없이 무턱대고 소련의 뜻을 따른 것은 아니다.

이른바 ‘평화의 적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 공산당의 논리가 담겨 있다. 1961년 사회당의 에다 사부로(江田三郞·1907~77) 서기장은 “평화운동의 적은 전쟁이고 핵무기”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평화운동의 기본 이념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원칙이다. 인류의 생존을 전쟁·핵무기에 대치시키고 전자를 위해 후자를 없애자는 취지에 반대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한발 더 들어가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서 이를 다시 생각해보면, 이 원칙은 누가 전쟁을 준비하고 누가 핵무기를 개발·사용하려 하는가, 즉 ‘평화의 적’이 누구인가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고 전쟁이나 핵무기에 반대하자는 뜻이 되기도 한다. 즉, ‘주체’를 특정하지 말자는 뜻이다. 이는 물론 반핵 평화운동의 ‘폭’을 넓히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전쟁이나 핵무기의 주체, 즉 ‘평화의 적’을 미국만으로 특정하면 보수파가 떨어져나갈 것이고 소련만으로 특정하면 소련을 지지하는 좌파가 떨어져나갈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전자의 문제로 보수파가 떨어져나간 것이 일본 반핵운동의 제1차 분열이었다면, 후자의 문제로 공산당계가 떨어져나간 것이 제2차 분열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공산당의 생각은 달랐다. 소련의 핵무장은 방어 목적의 최소한의 억지력이지만, 미국의 핵은 제국주의적인 공격적·선제적 핵무장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미-일 안보조약을 통해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해 핵전쟁의 거점이 되고 있는 일본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라고 생각하던 일본 공산당에 사회당 등의 노선은 현실성 없는 양비론으로 비쳤다.

끌려가는 사람들, 박수치는 사람들

결국 1962년 8월에 열린 제8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에서 소련의 핵실험 재개를 둘러싸고 분규를 거듭하게 되었고, 소련의 핵실험 재개에 대한 항의의 뜻을 담으려는 사회당 등의 움직임과 이를 저지하려는 일본 공산당과 소련·중국 대표단 사이의 대립이 대회 내내 이어졌다. 이 대립의 여파로 1963년 3월1일 비키니 대회는 각각 두 개의 대회로 나뉘어 열렸다. 결국 1963년 8월5일에 개최된 제9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에서는 동원력에서 앞서는 공산당계의 주도적인 운영에 항의해 대회 도중에 사회당계가 철수하면서 반핵 평화운동의 분열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1965)에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는 공산당계 주도의 대회 운영과 소련 핵실험 재개에 항의하기 위해 대회장을 점거한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 학생 60명이 일본 공산당의 요청으로 투입된 경찰기동대에 끌려가자 일본 공산당에 의해 동원된 지역대표들이 박수로 화답하는 장면을 착잡한 심정으로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분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63년 또 하나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사회주의권 내부의 분열이다. 미-영-소 간에 맺어진 대기권 핵실험을 금지하는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PTBT)을 둘러싼 입장 차이가 잠복해 있던 중-소 대립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 공산당은 소련을 비판하고 중국을 옹호한다. 중-소 대립과 중국의 핵무장을 배경으로 벌어진 일본 반핵운동의 혼란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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