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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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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지운 ‘자본론’ 번역자, 그는 지금 어디에

일본에서 유통되는 가장 유력한 두 종류 <자본론>의 번역자 오카자키 지로,
말년에 부인과 ‘자살여행’… 법률적으로 죽었지만, 사상적으로는 아직도 ‘여행’ 중
등록 2014-11-08 17:11 수정 2020-05-03 04:27

한국에서 (전 3권)이 처음 완역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이다(이론과실천사 발행·강신준 옮김). 이 해에 제1권이 번역돼 나왔고, 몇 해 뒤 완간됐다. 제1권이 처음 출판된 것이 1867년이니 지구 반대편을 돌아 ‘반공’의 땅 한국에서 출판되기까지 무려 120년이 걸린 셈이다. 물론 전석담·최영철 옮김으로 1947년 서울출판사에서 나온 적이 있으나, 이는 제1권을 4권으로 분할 번역한 책이다. 120년이 단순히 시간의 경과만을 의미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전’ 하나 때문에 신체구속을 당하기도 쫓기기도 피를 흘리기도 했다. 실제로 1987년에 을 간행한 출판사 대표는 구속까지 당했다.

‘캐피털’을 ‘수도론’이라고 옮기니

1970년대에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사람이 ‘캐피털’을 ‘수도론’이라는 제목으로 옮긴 반입서적 목록을 제출해 반입에 성공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유학 간 학생들이 가장 먼저 구입한 책이 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사회주의를 반공서적의 행간에서 찾아내 이해했듯이, 도 다른 서적의 구석에서 찾아낸 인용문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으니, 이런 지식들이 에 대한 ‘대체재’이기는커녕 ‘보완재’도 될 수 없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을 처음 언제 접했는지 기억에 없으나 영어판 아니면 일본어판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읽었다 해도 이해했을 리 만무하니 아마 ‘구경’했다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한국에서 나온 완역된 〈자본론〉의 일부(왼쪽). 맨 오른쪽이 강신준 교수가 1987년에 처음 번역 출간한 〈자본〉이다. 일본 오카자키 지로가 번역한 〈자본론〉(오른쪽). 이 번역본과 함께 일본에서 많이 읽히는 또 다른 번역본인 사키사카 이쓰로의 이와나미판에 대해 오카자키 지로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실질적으로 번역했다고 말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인터넷서점 화면 갈무리

한국에서 나온 완역된 〈자본론〉의 일부(왼쪽). 맨 오른쪽이 강신준 교수가 1987년에 처음 번역 출간한 〈자본〉이다. 일본 오카자키 지로가 번역한 〈자본론〉(오른쪽). 이 번역본과 함께 일본에서 많이 읽히는 또 다른 번역본인 사키사카 이쓰로의 이와나미판에 대해 오카자키 지로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실질적으로 번역했다고 말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인터넷서점 화면 갈무리

손에 넣을 수 없고 손에 넣어도 이해하기 어려우면 ‘환상’은 커지는 법이니, 은 그 내용과 관계없이 당시에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1988년 대학원 2학년생으로 또 다른 번역 교정 작업에 참여했던 류동민이 간행한 (한겨레출판·2013)에 발문을 기고한 김인환이 “비루하고 누추한 이 현실의 누더기 속에서 한 세대의 젊은 사람들이 을 금기로부터 해방시켰고 을 읽을 수 있게 함으로써 그것을 비신화화”했다고 쓰고 있는 것처럼, 의 한국어판 출간으로 한국 사회는 의 ‘물신화’ 경향에서 비로소 ‘해방’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런데 류동민은 교정 작업을 하면서 “전자오락 갤러그에서 전진하고 회전하고 후진하며 공격해오는 파리 모양의 외계인마냥 오역들이 꾸역꾸역 나타났”고, “오역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마치 무기를 바꾸듯 번역 원고와 대조할 원서를 독일어판 에서 일어판 으로 바꿔갔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류동민이 교정에 참고한 일어판 은 아마 이와나미(岩波)판이거나 아니면 오쓰기(大月)판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은 1928년부터 간행을 시작해 1935년 총 32권으로 개조사에서 완간되었지만, 번역은 이보다 다소 빨라 1924년에 완역 출판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번역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초역 단계에서 끝나거나 1권만 번역되는 데 머물렀다. 아마 러시아혁명, 정치적으로 다소 ‘열린 공간’을 만들어주었던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 그리고 시대를 휩쓸었던 교양주의의 덕을 톡톡히 본 듯하다. 번역자는 다카바타케 모토유키(高畠素之·1886~1928)라는 사람으로 이 책 출간 이후에는 점차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국가사회주의자에 가까워진다. 1927년 10월25일치 에는 다카바타케 번역판의 일본어 광고가, 1930년 10월11일에는 한글 광고가 각각 실린 것으로 보아 우편으로 일본에 책을 주문하는 독자가 한반도에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제자의 업적을 가로챈 이와나미판 번역자

경제부장을 지냈고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을 역임한 이봉수(李鳳洙·1892~?)의 ‘옥중수기’(, 1930년 10월14일)를 보니, 을 감옥으로 차입하는 것도 가능했다고 쓰고 있다. 또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가 쓴 을 보면, 자신이 일부를 번역해 출판한 을 수감 중인 일본 공산당 고위 간부에게 발송했다는 기술이 등장한다. 이렇게 보면 적어도 당시 일본에선 의 시중 판매는 물론, 옥중 차입도 가능했던 듯하다. 1904년에 번역 소개되었다가 직후에 금서가 된 을 제외하면 마르크스 관련 책이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출판 금지된 적은 없었다.

다카바타케 번역본 이후 일본에선 다양한 번역본이 등장했다. 지금 일본 서점에서 구입 가능한 은 신일본출판사(일본 공산당 계열)판, 아오키서점판, 일본경제신문사판 등이 있지만, 역시 사회적 영향력과 역사적 무게감에서 보면 이와나미판과 오쓰키판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와나미판의 번역자는 사키사카 이쓰로(向坂逸郞·1896~1985)이고, 오쓰키판의 번역자는 오카자키 지로(岡崎次郞·1904~84?)로 되어 있다. 사키사카는 도쿄대학 경제학부 출신으로 독일 유학 뒤 규슈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지냈다. 인민전선 사건(1937)으로 투옥되기도 한, 이른바 ‘노농파’의 유명 논객으로 알려져 있다. 전후에는 사회당 좌파, 특히 ‘사회주의협회파’를 이끌었고 소련의 체코 침공(1968)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1980)에도 일관되게 소련 입장을 지지한 대표적인 ‘친소’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후일 오카자키가 쓴 자서전 (1983)에 따르면, 사키사카 번역으로 나와 있는 이와나미판 도 실질적으로는 오카자키가 번역한 것이다. 사키사카가 오카자키의 스승에 가까운 인물이었으니 제자의 업적을 스승이 가로챈 셈이다. 이렇게 보면, 일본에서 유통되는 가장 유력한 두 종류의 은 모두 오카자키 지로가 번역한 것이다. 이 밖에도 을 비롯해 마르크스 저작의 대부분을 번역했으니, 그는 마르크스 이론의 일본 번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오카자키는 1902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도쿄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인민전선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강건한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던 듯하다. 친구인 니시다 노부하루(西田信春·1902~33)가 그를 가리켜 “무사태평한 허무주의자”라 평하고, 또한 오카자키 스스로도 ‘공부하다가 가끔 논 것’이 아니라 ‘놀다가 가끔 독서하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 것처럼, 항상 “죽음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있던 허무주의자였다. 하지만 시대의 격랑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특히 친구 니시다가 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된 뒤, 지독한 고문 끝에 1933년에 사망한 사건은 그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특이 체질로 인한 병사”로 발표된 니시다의 죽음이 사실은 고문 때문이었다는 점이 밝혀진 것은 1957년 무렵이었다.

“서쪽으로 간다”는 말을 남기고

오카자키는 이른바 ‘노농파’ 지식인 탄압으로 알려진 인민전선 사건으로 1937년에 체포돼 약 1년 동안 감옥 생활을 경험하지만, 인민전선 사건에 대한 세간의 높은 평가와 달리, 그는 후일 “살롱 마르크시스트가 군관의 먹잇감에 된 것에 불과하다”며 냉담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뒤 그는 만주의 동아경제조사국에서 일하다가 베이징에서 패전을 맞이한다. 그리고 1950년부터 1968년까지 규슈대학과 호세이대학 교수를 지내다가 1968년에 퇴직하고 전업적 저술가의 길을 걷는다. 대학 퇴직은 당시 대학을 휩쓸고 있던 학생운동의 폭력성에 혐오감과 자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명사전이나 위키피디아에서 오카자키 지로를 찾아보면, 생년은 정확히 나와 있는데 몰년은 ‘?’로 되어 있거나 ‘1984년?’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왜일까?

1984년 6월6일, 79살의 노인 오카자키 지로는 7살 연상인 부인을 대동하고 도쿄의 자택을 나섰다. 직전에 지인들에게는 “서쪽으로 간다”는 말을 남긴 대로, 그는 서쪽 지방을 전전하다가 같은 해 9월30일 오사카 호텔을 마지막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1994년 6월17일치 가 “늙은 마르크시스트 오카자키 부처의 죽음 여행의 끝”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한 것처럼, 그의 자발적인 ‘실종’은 ‘자살여행’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평소 지인들에게 줄곧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끝내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실종’ 1년 전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그는 “마르크스와 이별한 나는 이제 할 일이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아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게 정확할지 모르겠다. 지금 나에게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잘 죽을까”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의 ‘실종’은 오랫동안 계획된 것이었다.

다만 남아 있는 문제는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그리고 자신도 고통을 받지 않고 죽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을 대표하는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쓰시마 다다유키(對馬忠行·1901~79)가 1979년에 머무르고 있던 도쿄의 양로원을 몰래 빠져나와 행방불명됐다가 넉 달 뒤 고베항에서 백골 사체로 발견돼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카자키는 스스로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죽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실종’ 전에 지인들에게 흘려 말했었다.

오카자키의 자발적인 ‘실종’을 그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유물론자로서의 삶과 관련시켜 철학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일본 사회의 ‘죽음의 미학’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혹은 생활고를 원인으로 드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그는 70살을 맞이한 1974년에 “벌어놓은 돈은 없고 신용카드 사용액을 생각하면 살림은 적자다. 유일의 수입원인 이나 인세는 급하게 하강선을 긋고 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상태”였다고 쓰고 있다.

1972년에 발생한 연합적군 사건으로 학생운동이 퇴조하고, 일본 사회는 급격하게 소비사회로 빠져들고 있었다. 또 마르크스주의가 퇴조하고 이를 대신해 포스트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던 이론이 대학가를 뒤덮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 관련 서적 판매량은 급감했고 이 때문에 인세 수입에 의존하던 오카자키의 살림은 날로 궁핍해졌다. “채권도 채무도 없는 채로 생애를 마치고 싶다”는 그의 작은 희망은 실현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당연하게도 노화가 그를 괴롭혔다.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라던 트로츠키

레닌은 “55살 이상 사는 것은 큰 죄”라고 했던 투르게네프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샤를 보들레르는 말년에 “삶은 유쾌하지 않다. 나는 음울한 노년기에 들어섰다”고 하면서 “빨리 죽기를 바란다”고 했고, 그는 실제로 50살이 되기도 전에 삶을 마감했다. 예이츠도 “내가 늙었다는 사실 때문에 피곤하고 미칠 듯 화가 난다”고 쓰고 있다. 일중독자였던 트로츠키도 항상 노화를 두려워했고 그 때문인지 “혁명가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암살자의 손에 비참하게 살해되었지만, 오카자키는 트로츠키의 말대로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여정에 나섰다.

그는 법률적으로 죽었지만, 사상적으로는 아직도 ‘여행’ 중이다. 그의 자발적인 ‘실종’에 딴죽을 걸 이유는 없지만, 그와 ‘동행’한, 혹은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부인 ‘구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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