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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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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반핵

비정치적 ‘시민’들에 의해 시작된 일본의 반핵통일전선,
‘순수성’으로 인해 운동 폭을 넓혔지만 운동 분열도 가져와
등록 2014-08-27 13:36 수정 2020-05-03 04:27

매년 8월이 되면 일본에선 전쟁의 기억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등장한다. 특히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다. 여러 행사가 열리는데 그중에서 일본의 피폭 경험을 ‘반핵평화’라는 이른바 보편적 의지로 의제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행사가 바로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다. 이름 그대로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지구상에서 없애기 위해 일본은 물론 세계 각 지역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반핵평화에 대한 의지를 담아내는 집회다.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으로부터 69년째인 올해에도 8월4일부터 6일까지 히로시마에서 세계대회가 열렸다. 제1회 세계대회가 1955년에 열렸으니 59년째다.

승무원 23명이 뒤집어쓴 ‘죽음의 재’

그런데 기묘한 것은 이 세계대회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서로 다른 기관에 의해 주최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원수폭금지 일본협의회(겐스이쿄, 원수협), 또 하나는 원수폭금지 일본국민회의(겐스이킨, 원수금)이다. 원수협은 공산당계고 원수금은 옛 사회당계다. 원수협이 결성돼 제1회 세계대회를 개최한 것이 1955년. 사회주의 핵무장을 둘러싼 입장 차이로 분열된 것은 1963년이다. 그리고 1965년 사회당계가 떨어져나와 원수금이 결성됐다. 두 기관이 공동으로 세계대회를 개최한 1977~85년을 제외하면, 이때부터 항상 두 개의 세계대회가 열렸다. 여기에 보수계 평화단체인 KAKIN(옛 핵금회의)을 더하면 일본에는 반핵단체가 세 개나 존재하는 셈이다. 반핵에도 여러 길이 있다는 뜻일까?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에서 비롯된 일본의 반핵 세계대회는 물론 세계를 대표하는 반핵집회로 알려졌지만, 동시에 반핵운동의 분열을 체현하는 대회이기도 하다. 어떤 배경에서 반핵운동 단체가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일본에서 반핵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은 어디일까? 1945년 8월6일 우라늄형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은 히로시마? 아니면 그로부터 사흘 뒤인 9일에 플루토늄형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은 나가사키? 틀린 답은 아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1946년부터 매년 8월이면 희생자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고 평화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하지만 피폭 이야기가 퍼져나가 반핵·반미 여론이 형성될 것을 우려해 그물망 같은 검열 정책을 펼친 미군 점령기(1945~52)에는 ‘자유롭게’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 거주자들이 원자폭탄의 위력을 구체적으로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음에 따라 공개적인 반핵운동을 펼치기란 쉽지 않았다. 히로시마·나가사키는 피폭 경험에서 보면 ‘고립된 섬’으로 남아 있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의 비극을 끄집어내 이를 ‘현재’의 문제로 삼아 운동으로 연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바로 도쿄 스기나미(杉)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스기나미를 원수폭 금지 운동의 ‘발상지’라고까지 부른다. 때는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4년 3월1일, 비키니섬 동북부 부근에서 조업 중이던 참치잡이 배 제5후쿠류마루가 미국이 인근에서 실험 중이던 수소폭탄에 의해 다량의 ‘죽음의 재’를 뒤집어쓰는 사건이 발생했다. 흔히 ‘비키니 사건’ ‘제5후쿠류마루 사건’으로 불린다. 승무원 23명이 피폭당했고 이 중 1명은 반년 뒤 숨을 거두었다. 이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혼란은 극에 달했다. 어패류를 사러 시장을 찾던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고, 특히 참치는 ‘방사능 참치’라 불리면서 전량 폐기됐다. 어민, 상인 그리고 주부들의 충격이 컸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은 세 번째 피폭이라는 여론이 들끓었고 공산당 지도자인 미야모토 겐지는 이를 ‘원폭희생민족’이라 형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4년 5월 스기나미 공민관에 주민 38명이 모여 ‘수폭금지 서명운동 스기나미협의회’를 결성한다. 이 모임은 8월에 ‘원수폭금지 서명운동 전국협의회’라는 전국조직으로 발전했고, 이 협의회를 주축으로 대대적인 서명운동이 펼쳐져 연말까지 무려 2천만 명이 넘는 서명을 모은다. 이 대대적인 서명운동의 경험을 기반으로 1955년 8월에 개최된 것이 바로 ‘제1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다. 이 대회에 참가한 인원은 5천 명.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다양한 정파와 단체들이 참여했다. 좌파는 물론 자민당이나 신토 연합 같은 우파도 이름을 올렸다. 굳이 말하자면, 반핵 통일전선체와 같은 대회였다.

차이를 뛰어넘기 위해, 불가사의한 선언문

스기나미에서 시작된 서명운동이 1955년 제1회 세계대회로 이어져 히로시마·나가사키가 반핵평화운동의 ‘성지’로 자리잡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일본 사회의 반핵 여론이었다. 반핵 여론의 확산은 일본을 세 번의 피폭을 당한 비극의 ‘순교자’로 구체적으로 자리매김하면서도 동시에 반핵이라는 고도의 정치적 의제를 탈정치화·추상화함으로써, 즉 운동의 ‘순수성’을 강조해 운동의 폭을 넓히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50년대 말 내부적으로는 민주주의 위기가 외부적으로 미국과의 안보조약 개정 문제가 걸린 중차대한 시기에 추상적인 반핵운동은 존립하기 어려웠다. 1955년 스나가와의 미군기지 반대운동. 위키피디아 사진

1950년대 말 내부적으로는 민주주의 위기가 외부적으로 미국과의 안보조약 개정 문제가 걸린 중차대한 시기에 추상적인 반핵운동은 존립하기 어려웠다. 1955년 스나가와의 미군기지 반대운동. 위키피디아 사진

한마디로 “정당, 정파, 종파의 차이를 뛰어넘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핵철폐 운동을 펼친다는 대회의 기본 원칙이 큰 힘을 발휘했다. 이 기본 원칙은 앞서 결성된 ‘스기나미 협의회’의 선언문에 나와 있는 “서명운동은 특정 당파의 운동이 아니고, 모든 입장의 사람들을 잇는 전 국민 운동”이라는 기본 원칙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반핵운동을 대표하는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는 특정 정파나 정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활인의 관점에서 비정치적 ‘시민’들에 의해 시작된 반핵통일전선 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세계대회의 모태가 된 스기나미 협의회의 결성선언문을 읽어보면 몇 가지 불가사의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평화’라는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미-일 안보조약도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사회의 큰 쟁점이던 미군기지 문제에 대한 언급도 없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같은 원전 관련 단어도 없다. 어떻게 보면 무색무취한 추상적인 반핵 의지를 일반론으로 담아냈을 뿐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왜일까? 물론 우연은 아니다.

서명운동을 이끌고 선언문 작성에 관여했던 야스이 가오루(安井郁) 도쿄대 교수는 선언문 원안의 취지를 설명하는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핵서명운동은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원자력과 인류”의 대립이라는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져야 한다. 선언문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원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원전이 “원수폭 (무기의) 제조에 이용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며, 또 “평화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서명운동의 순수함을 혼동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당시 핵무기를 가진 미국이나 소련을 비난하지 말자, 쟁점이 되고 있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말자, 미국의 핵우산 속에 들어 있는 일본의 현실에 대해서도 말하지 말자, 일본은 세 번의 피폭을 당했다, 이대로 가면 인류의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다, 그러니 한 사람 한 사람의 뜻을 모아 전세계에 호소하자, 핵무기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일본 반핵운동의 1차 분열

주최 쪽이 반핵운동의 폭을 넓히고 분열을 막기 위해 얼마나 부심했는지는 이후에도 곳곳에서 흔적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1956년 제2회 세계대회(8월)를 앞둔 3월에 도쿄에서 ‘원수폭 금지 일본협의회 전국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배포된 ‘다른 평화운동과의 관련’이라는 토론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이 기록돼 있다. “원수협은 어디까지나 운동을 넓혀나간다는 관점에 서서”, 원수폭 금지라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서로 힘을 합쳐야 하지만, “이 방침을 구체화할 때, 운동의 폭을 좁히거나 분열로 이어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이런 조심스러운 태도가 오래갈 수는 없었다. 다른 사회운동과의 관련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1957년부터 공선제에서 임명제로 바뀐 교육위원 제도하에서 일본 정부는 교원에 대한 근무평가 제도를 도입하려 했고, 이에 대해 일본 교직원 조합을 중심으로 맹렬한 반대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다. 1958년부터는 경찰직무집행법을 개정해 경찰의 수사재량권을 대폭 넓히려는 일본 정부의 시도에 대해 대규모 반대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또 우치나다 투쟁(1949~57)이나 스나가와 투쟁(1955~68)과 같이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1960년 미국과의 안보조약 개정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외부적으로는 미-일 군사동맹 강화가 점쳐지던 시기였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다른 운동과의 관련을 ‘부정’하고 추상적인 반핵 구호로 일관하는 비정치적 반핵운동이 존립하기는 어려웠다. 좌파 쪽에선 근무평가 도입 반대운동, 반기지 운동, 안보조약 개정 반대운동에 원수폭 금지운동도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파 쪽에선 원수폭 금지운동의 ‘순수성’을 들어 이에 반대하는 구도가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1958년부터 본격화한 대립 구도 속에서 결국 자민당 등의 보수파가 이탈했고 이들 중 일부가 1961년 ‘핵병기금지 평화건설 국민회의’라는 반공주의적 반핵단체를 결성한다. 일본 반핵운동의 1차 분열이다.

좋은 핵과 나쁜 핵

이렇게 보면 일본 반핵운동의 고양을 이끈 것도 반핵운동의 분열을 가져다준 것도 반핵운동의 ‘비정치성’, 즉 ‘순수성’이었다. 하지만 히로시마·나가사키·비키니에 핵무기를 사용해 일본에 구체적인 핵 피해를 가져다준 것은 미국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속에 들어가 있었다. 또한 미-일 군사합작의 구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안보조약을 개정하려 하고 있었다. 주일미군기지도 안보조약도 모두 미국의 핵전략과 분리할 수 없는 문제였다. 따라서 통일전선적 반핵운동의 고양을 이끈 ‘순수성’ 혹은 ‘비정치성’이란 이런 현실에 눈감겠다는 의지 표명과 다름없었다. 아니면 핵에도 ‘좋은 핵’과 ‘나쁜 핵’이 있어, 히로시마·나가사키·비키니에 투하한 핵은 ‘나쁜 핵’이고 일본을 지켜주는 미국 핵은 ‘좋은 핵’이라는 뜻일까? 하지만 보수파가 이탈한 제1차 분열은 ‘거대한 분열’의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 1963년 사회주의 핵무장을 둘러싼 입장 차이가 평화운동 진영을 엄청난 혼란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좋은 핵, 나쁜 핵’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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