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11일,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지 벌써 4년 가까이 지났다. 수습은커녕 여전히 사태는 유동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할 가능성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4년 동안 많이 변하기는 했다. 후쿠시마 부근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고 후쿠시마에서 멀수록 인구가 늘어나는 경향은 계속되고 있다. 재난이 정치적 파시즘의 자양이 되는 사례가 역사적으로 많이 확인되듯이 일본의 길도 현재로서는 이 교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변함없는 것은 원전에 대한 일본 정부의 확고한 의지뿐이다.
시민 생활에서 확인되는 가장 큰 변화는 일본에서 ‘가이거’라 불리는 방사선량 측정기로 자신들이 먹고 있는 식품 등을 측정하는 모습들이다. 계속되는 정부와 전문가들의 거짓말을 통해 “국가가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오래된 진실을 ‘뒤늦게’ 확인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구입한 것이다. 3·11 이전에 고가였던 측정기는 수요가 공급을 낳으면서 이제는 쉽게 적당한 가격으로 누구나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정부의 발표와는 다른 측정 결과를 인터넷 등에 공개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원자력에 대한 시민강좌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시민들의 감시활동도 늘어났다. 정부와 전문가에게 맡겨두었던 ‘안전’을 스스로 확인하고 결단하는 일에 나선 것이다.
일본의 어느 활동가는 이 현상을 “과학을 민중의 손으로!”, 혹은 “시민의 품으로!”라고 표현했다. 물론 이같은 흐름을 과대평가할 수는 없다. 여전히 이와는 반대되는 흐름이 강고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같은 새로운 움직임에서 일본의 원전반대운동의 효시라 불렸던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郞·1938~2000)가 연구실과 대학을 내던지고 거리로 나서면서 스스로를 ‘시민의 과학’을 위한 ‘시민과학자’라 표현한 것을 떠올린다(, 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2000).
시사잡지에 버젓이, 공포를 희망으로다카기가 전문가의 성에서 벗어나는 데 중요한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작가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1896~1933)다. 한국에도 (너머 펴냄, 2014) 등이 번역 소개돼 있다. 미야자와가 쓴 (1926)라는 짧은 안내문에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을 우리의 과학으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다카기는 이 구절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전문적인 과학자의 길을 걷던 다카기는 “상아탑 안의 실험실”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 자체를 실험실로 삼아 방사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 대학에 사표를 던진다. 다카기의 결단은 사실 전문적인 과학자 일반의 모습은 분명히 아니다. 다카기와 같은 선택을 한 사람은 일본에 거의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걷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과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패전 직후에 발표됐던 은 미야자와의 식견과 다카기의 선택과는 정반대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의 유령이”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돼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로 맺는 이 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48년이다. 공포가 희망의 다른 이름인 것처럼, 문학성 넘치는 문장으로 이어지는 이 선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때로는 공포를, 또 때로는 희망을 주었을까? 그런데 그로부터 꼭 100년이 지난 1948년 일본에서 을 패러디한 이른바 이 발표되었다. “하나의 괴물이 세계를 떠돌고 있다. 원자폭탄이라는 괴물이”라는 구절로 시작돼 “만국의 창조적 지성이여! 단결하라!”로 맺는 을 발표한 사람은 와타나베 사토시(渡邊慧·1910~93)라는 유명 물리학자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겨우 2년6개월. 약 30만 명이 사망하고 엄청난 수의 피폭자들이 그 후유증으로 고통받던 시점이다.
이 일본에서 번역 소개된 1904년 직후, 당시 마르크스 관련 서적 중에선 드물게 곧바로 판매 금지되었지만, 미군정의 강력한 검열체제하에 놓여 있던 1948년 일본에서 은 판매 금지 처분을 받기는커녕 일본을 대표하는 시사 종합잡지에 실려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을 통해 원자폭탄이라는 새로운 과학문명에 대한 공포감이 세상을 뒤덮고 있을 때, 이 엘리트 과학자는 원자폭탄을 새로운 과학문명의 징표로 받아들이고 근대와는 또 다른 시대가 도래했음을 읽어내 공포를 희망으로 바꿔치기하려 했다.
와타나베 사토시가 에서 말하는 논지는 이렇다. 원자폭탄을 만든 것은 자본도 공업력도 노동도 아니고 오직 인간의 창조적 지성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지난 100년간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고 믿어왔지만, 원자력의 개발과 산업 이용으로 이제는 노동(자) 없는 공업이 실현돼 이른바 무노동 시대에 돌입하며 프롤레타리아는 사회의 기생동물로 변할 시점에 놓여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기계로 대체되지만 창조적 지성은 기계로 대체 불가능하다. 창조적 지성은 과학자를 필두로 예술가, 철학자, 종교인으로 구성되는 제5계급이다. 인류 역사는 줄곧 제5계급을 착취해왔다. 역사는 물질의 힘과 또 다른 물질의 힘이 충돌하는 역사다. 그러나 물질 간 경쟁의 시대는 끝났다. 원자력이 개발되었기 때문인데 이 원자력을 만든 것은 제5계급의 지성이다. 원자력으로 물질을 무한정 낳을 수 있게 되었지만 이 물질을 만든 것은 물질이 아닌 힘, 즉 지성이다. 따라서 이는 물질에 대한 정신의 투쟁이다.
이 투쟁에는 물질이 필요하지만 이미 우리는 원자력이라는 물질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제5계급은 낙관해서는 안 된다. 아직 자본이나 노동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는 범죄의 역사이기도 하다. 제5계급이 건설하려는 사회는 범죄 없는 세계다. 범죄는 결핍에서 온다. 풍족함은 범죄를 없애준다. 물질 가치를 없애려면 물질을 풍족하게 해야 한다. 이는 원자력에 의해 가능하다. 그래야만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남의 것을 훔치는 것에 흥미를 잃게 만들 수 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도덕을 프롤레타리아의 도덕으로 대체하려 했고 프롤레타리아의 딸을 부르주아가 훔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낡은 석탄의 시대는 끝났고 원자력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의 목표는 원자력에 입각한 세계정부의 수립이다. 공상이 아니다. 원자력은 미국의 독점물이 아니다. 이를 관리할 수 있는 것은 세계적 관리이고 이는 세계정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국제연합은 세계정부의 과도기다.
원자력과 과학자의 지성에 대한 맹신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혐오와 같은 와타나베의 감수성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엘리트 과학자였다는 점과 무관하지는 않을 듯하다. 저자 와타나베 사토시는 도쿄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33년에 프랑스 정부 유학생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열역학을 공부했고 독일 라이프치히로 자리를 옮겨 원자핵 이론을 공부한 뒤 1939년에 귀국해 이화학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도쿄대 교수와 릿쿄대 교수를 지냈다. 195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IBM와트슨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예일대학과 하와이대학 교수를 지낸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과학자다. 그의 부친은 장관을 지냈고 형은 고위 관료를 거쳐 아시아개발은행 총재를, 아들은 캘리포니아대학 철학과 교수를 지냈으니 말 그대로 대표적인 엘리트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성장 배경에 과학자로서의 전문적 식견이 결합되면서 그의 이른바 ‘유(唯)원자력주의’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프랑스가 3천 명의 과학자, 예술가, 노동자를 잃는다면 국가는 영혼을 잃은 빈껍데기가 될 것”이지만, “봉건귀족 같은 사람들 3만 명을 잃는다면 슬프기는 하겠지만 국가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단언한 생시몽의 (L’Organisateur·1819~20)를 인용하면서도 와타나베는 생시몽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과학자였다고 강변하면서 엘리트 과학지상주의를 굽히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건, 반원자당 선언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본의 물리학자 중에 종교와도 같은 엘리트 과학주의에 대한 신앙을 가진 과학자는 와타나베 이외에도 많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많은 과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물리학자들도 원전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고 여론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예를 들면 미국의 전략폭격단이 실시한 면접조사(1945년 12월5일)에서 구마모토대학 출신의 의사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선진적 과학”으로 생각한다고 답한다. 또 1945년 8월20일치 은 “우리들은 적(미국)의 과학에 패했다”며 ‘과학입국’을 표제로 달고 있다. 즉,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졌던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패전 직후의 일본 사회엔 선진적 과학문명에 대한 강한 동경심이 자리를 잡았다. 공포가 동경으로, 그리고 다시 희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사회에 원자력발전에 대한 믿음이 범사회적으로 별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 데는 이같은 사정이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후쿠시마에서 벗어나는 길은 원전에 반대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원자력 시대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총괄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낳은 것이 이라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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