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11일 이후 일본 곳곳에서 원전 반대 데모가 벌어진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많을 때는 10만 명 이상이 모이기도 했고, ‘데모에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44%가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고 하니(, 2011년 12월30일치), 가라타니 고진이 기대한 만큼 일본 사회가 “데모하는 사회”로 바뀌었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데모라는 사회적 항의 수단이 일상의 풍경이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물론 여전히 데모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높기는 하다. 그래도 매주 금요일 도쿄 도심의 총리 관저 근처에 가면 원전 반대를 외치는 일군의 무리를 쉽게 볼 수 있다. 도쿄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일본판 88만원 세대인 ‘잃어버린 세대’가 모여드는 고엔지 부근에 가도 이런 데모 분위기를 다소 맛볼 수 있다. 이런 새로운 풍경만을 가지고 정당민주주의가 종을 치고 직접민주주의(거리의 정치)의 가능성이 열렸다고는 할 수 없다. 사회학자 모리 요시타카가 말한 것처럼 원전 반대 데모가 ‘축제’가 되고 ‘일상화’되면서 그 힘이 분산되고 있다며 ‘걱정 아닌 걱정’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직전에 일본 각지에서 “하늘에서 부적이 내려오니 이는 좋은 징조”라는 소문을 들은 농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던 소동이 당시 막부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던 사례도 있으니 데모의 축제화가 ‘악’이고 엄숙함이 ‘선’일 까닭도 없다.
안보투쟁, 전후의 분기점
데모가 일상의 풍경이 돼가는 지금의 모습은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가 말한 대로 약 100만 명의 군중이 결집했던 1960년 안보투쟁 이래 “50년 만의 사태”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1986년)로 원전 공포가 확산되던 1988년에 약 2만 명 규모의 원전 반대 데모가 있었고, 2003년에도 약 5만 명이 참가한 이라크 반전 데모가 있었지만, 3·11 이후에 등장한 데모의 일상화라는 사태에서 사람들이 떠올린 것은 1960년 안보투쟁이었다. 데모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은 위기감을 느꼈고 데모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은 기대감을 높였다. 어느 쪽이나 안보투쟁이 준거틀이 되어 있는 것이다. 1959년에 시작해 1960년에 일단 종언을 고한 안보투쟁은, 한 번도 데모 행진에 가본 적 없다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가 청중을 앞에 두고 “권력이 만능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처럼 안보조약 반대를 내건 민주화운동이자 ‘전후’의 분기점이었다. 특히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보면, 이때를 기점으로 노동운동의 체제내화가 진행되었고 안보투쟁에서 화려하게 등장한 신좌익 운동은 이후 성장과 분열을 거듭했으며, ‘전위당’ 공산당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안보투쟁의 데모대 속에서 탄생한 ‘소리 없는 소리의 모임’은 이후 베트남전 반전운동의 모태가 되면서 저항적 시민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그런데 당연히 안보투쟁에는 여러 후일담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안보투쟁 과정에서 죽은 동료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려 운동을 떠나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더욱 극렬하게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전향’하기도 했다. 당시 도쿄대 교양학부 학생회 위원장으로 안보투쟁에 뛰어들었던 니시베 스스무는 이후 전향에 전향을 거듭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에 참여하기도 했다. 니시베는 전향한 사람답게 안보투쟁을 ‘공허한 제전’이라는 말로 회상하기도 했다.
전향 문제는 안보투쟁 과정과도 밀접히 관련이 있다. 1963년 2월26일 <tbs>는 ‘비틀어진 청춘’(전학련 투사의 그 후)이라는 제목의 특집 프로그램을 통해 우파 국가주의자가 안보투쟁을 이끈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 지도부에 투쟁 자금 500만엔을 건넸다는 충격적인 보도를 했다. 당시 대졸 초임이 1만6천엔 정도였으니 엄청난 거금이다. 돈을 받은 쪽은 당시 전학련 위원장 가로지 겐타로(1937~84)였고 돈을 건넨 쪽은 다나카 기요하루(1903~96)였다. 사회적 충격은 작지 않았다. 전학련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 공산당은 기관지 (적기)를 통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학련 지도부의 엉망진창의 사생활’이라는 제목하에 돈을 건넨 다나카 기요하루를 일본 정보기관이나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끄나풀’이라고 보도했다. 전학련에 우호적이던 지식인들의 실망과 비난도 줄을 이었다. 돈을 건넨 다나카는 공산주의자에서 전향했고, 돈을 받은 가로지는 안보투쟁 뒤 운동 현장을 떠났으니, 마치 전향자와 청산분자의 ‘은밀한 거래’처럼 보이기도 했다.
전향자와 청산분자의 ‘은밀한 거래’
전학련이 돈을 건네받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전학련은 안보투쟁을 이끌면서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그래서 안보투쟁에 우호적이던 이런저런 지식인들에게 모금하러 돌아다녔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안보투쟁 과정에서 ‘국회 돌입’을 외쳤던 유명 지식인 시미즈 이쿠타로는 땡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투쟁 자금은커녕, 홋카이도에서 홀어머니 품에서 가난하게 성장하다가 홋카이도대학을 그만두고 상경해 전학련 위원장 자리에 오른 가로지는 자기 한 몸 꾸려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특히 당시 도쿄의 유명 대학 출신이 아닌 그는 도쿄에서 기댈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런 참에 동향의 다나카 기요하루가 손을 뻗친 것이다. ‘행동하는 허무주의자’로 불렸던 가로지는 이후 방랑 생활에 들어간다. 선술집 주인, 어부, 막노동 등을 전전하다가 1984년 47살의 때 이른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사람들은 ‘안보투쟁의 죽음’이라고도, ‘전후 좌익의 죽음’이라고도, ‘전학련의 죽음’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우익 다나카 기요하루는 왜 좌익 전학련에 돈을 건넸을까?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던 다나카는 1927년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당시 지하활동 중에 있던 일본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리고 1930년 겨우 27살의 나이로 일본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올랐으니, 거의 궤멸 상태에 빠져 인재 부족에 시달리던 당시 공산당의 사정을 감안해도 ‘빠른 출세’다. 서기장 자격으로 무장공산당을 지도했지만 자리에 오른 지 겨우 여섯 달 만에 체포돼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그의 공산당 활동은 6년에서 멈추었다. 체포 직전에는 아들의 공산주의 활동을 그만두게 하기 위해 어머니가 할복자살하는 비극적인 일도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 탓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다나카는 다른 옥중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옥중에 있던 1933년에 전향 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공산주의를 버리고 천황주의자로 살 것을 다짐했고 이 덕분에 1941년 11년 만에 감옥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는 패전 직후인 1945년 당시 천황 히로히토를 만났을 때의 발언을 후일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저는 천황 폐하에게 활을 쏘려 했던 공산당의 서기장을 지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를 반성하고 절에서 수행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 천황이 없는, 사회적 융합이나 정치적 결합체로서의 오늘날의 일본은 있을 수 없습니다. (…) 폐하에게 마음에서 경의를 표합니다.”
“두 동강 내려 했던 거지요” ‘모략’대로…
이후 그는 사업가로서 수완을 발휘해 적지 않은 돈을 벌기도 하고, 1960년에는 일본 공산당에서 전향한 옛 동료들을 모으고 700명의 청년행동대를 위장 취업시켜 일본전기사업노동조합을 내부에서 와해시키는 공작을 꾸미기도 한다. 또 우익단체를 통합시키기 위해 분주히 활동하다가 1963년에는 주도권 다툼 때문에 우익단체로부터 총격을 당하기도 한다. 때로는 미국의 정보기관에 협력하기도 하고, 인도네시아 등을 방문해 ‘아시아연맹’의 창설을 역설하기도 했다. 사실 전향은 일본에서 무수히 벌어졌지만 다나카처럼 전향 뒤 적극적으로 우익 활동을 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전향 연구에 따르면 전향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겁박과 고문을 견뎌낸 불굴의 비전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겉으로만 전향하는 ‘위장 전향’도 있고, 내면의 세계에 몰입하는 ‘회심 전향’도 있다. 혹은 폭력이나 겁박에 관계없이 자신의 주체적 판단에 따른 ‘자발적 전향’도 있다. 자기 신념의 부족함을 탓하면서 평생을 이념 단련에 바친 사람도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다나카의 전향과 그 뒤의 활동은 일종의 ‘확신 전향’이다.
후일 다나카는 에서 전학련에 돈을 건넨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학생들의 에너지가 공산당 쪽으로 모이면 큰일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좌익 세력을 두 동강 내려 했던 거지요. 가장 좋고 빠른 방법은 내부 대립이지요.” 즉, 공산당에 적대하는 전학련에 돈을 대 세력을 키움으로써 좌익 세력 내부에 대립과 혼란을 불러일으키려 했다는 것이다. 결과는 다나카의 ‘모략’대로 흘러갔다. 일본의 사회운동은 안보투쟁 이후 분열을 거듭했고 급기야 좌파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처참한 일까지 일으켰다. 물론 다나카의 돈으로 전학련이 세력을 키운 것도 아니고, 다나카의 책략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분열이 생긴 것은 더욱 아니다. 또 100만 명의 군중이 안보투쟁을 위해 구름처럼 모여든 것도 다나카나 전학련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다. 사실 전학련 지도부 몇 명이 돈을 받았다고 해서 100만 명이 모인 자발적 시민들의 뜻이 폄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보투쟁을 이끈 학생운동가의 도덕성에 흠집이 나면서 안보투쟁의 정당성이 훼손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 다른 다나카는 없을까
당시 일본의 극우파가 혹은 미국과 일본 정부가 무엇을 무서워하고 무엇을 바랐는지를 다나카와 가로지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알 수 있다면, 원전 반대 데모가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잡은 2014년의 일본에서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다나카는 죽었지만 또 다른 다나카가 없으란 법은 없지 않은가?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t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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