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9일 일본 도쿄의 번화가인 신주쿠에서 분신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7월9일치 보도에 따르면, 분신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63살의 남성이다. 그는 그날 오후 1시께 육교에 올라가 확성기를 들고 “70년 동안 평화로웠던 일본을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집단적 자위권으로 일본이 망가지고 있다”고 말한 뒤 러일전쟁기의 반전시인 요사노 아키코(謝野晶子)가 전쟁터로 떠난 동생을 기리는 시 ‘당신이여! 죽지 말라’를 낭독한 다음, 페트병에 담겨 있던 가솔린을 뒤집어쓰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는 화염에 휩싸여 쓰러졌고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중태다.
“지지도 공감도 할 수 없다”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다. 그런데 특징적인 것은 미디어의 보도가 매우 소극적이었다는 점이다. 주요 신문들은 대부분 단신으로 다루었고 공영방송 <nhk>는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거의 묵살에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전염 효과’를 우려했을 것이다. 분신자살이 사회적으로 퍼져나가 이른바 ‘모방자살’로 이어지는, 즉 ‘베르테르 효과’에 대한 우려가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역시 아베 신조 정부의 해석개헌에 대한 반대 여론이 퍼져나갈 것에 대한 우려가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그런데도 이 소식이 급속하게 퍼져나간 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덕분이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동영상과 목격담 등이 뒤덮었다.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자살 방법이 준 충격 때문이었다. 21세기 일본에서 정치적 항의의 뜻을 지닌 분신자살 사건이 일어나다니! 옴 진리교 분석으로 유명한 평론가 에가와 쇼코(江川紹子)는 “일본에서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일본은 티베트가 아니다”라며 “지지도 공감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집단적 자위권의 용인을 포함한 아베 정부의 폭주에 비판적 견해를 줄곧 밝혀온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분신자살 같은 극단적인 방법은 티베트처럼 언로가 막혀 있는 사회에서는 용인될 수 있지만, 일본처럼 의견 개진이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2009년 이후, 티베트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80명 이상의 승려가 중국 공산당에 항의하는 수단으로 분신자살을 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르탱 모네스티에는 저서 에서 ‘희생적 자살’을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 행위라며 이에 분신자살을 포함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희생적 자살이라는 행위는 권력의 부당함을 사회에 알려 권력의 의지를 꺾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살자는 무고하고 순결한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희생적 자살이 사회적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는 자살자가 죽음을 통해 알리려는 사실이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새로운 사실이거나,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만큼 소중한 가치를 지녔다는 깨달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전자가 언론 자유의 문제라면, 후자는 가치의 문제다. 해석개헌을 감행하려는 아베 정부의 행보는 이미 언론을 통해 전해진 사실이니 해석개헌에 반대한다는 이 남성의 폭로는 폭로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가치판단의 문제만 남는다.
집단 내부의 특징과 밀접한 자살
하지만 결과는 ‘희생적 자살’이 가치판단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기보다는 기왕에 존재하는 가치판단의 틀이 ‘희생적 자살’에 대한 시각을 결정해버리는 쪽으로 이어졌다. 즉 해석개헌에 찬성하던 사람은 해석개헌 찬성이라는 입장을 지키기 위해 방법의 극단성·과격함을 근거로 가치까지 깎아내리거나 부정하려 했고, 해석개헌에 반대하던 사람은 민주적 절차에 대한 믿음을 방패로 ‘주장에는 찬성하나 방법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양자 사이에는 분신자살이라는 방법의 극단성에 대한 거부감이 공통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거부감이 ‘생명 경시’나 ‘생명 불감증’, 혹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증폭된 것이다. 하지만 나를 당황시킨 것은 분신이라는 사회적 항의 수단이 일본에서 일반적이지 않다는 주변 반응이었다. 그래서 분신자살이 한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이라는 비아냥도 SNS에 등장했다. 자살 방법에 대한 문화적 기제다.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행위, 즉 자살은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의 한 형식이다. 특정 집단의 자살률이 다른 집단에 비해 높게 혹은 낮게 나타나는 것은 그 집단 내부의 사회 구성의 특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살률은 빈곤·차별·경쟁이 심해 유동성이 높은 사회에서는 높게 나타나고 사회의 안정성이 높을수록 낮게 나타나는 법이다. 하지만 사회적 유동성이 높은 사회에서도 자살을 죄악시하는 종교문화적 기반이 강고하게 실생활에서 작동한다면, 자살률 상승이 상대적으로 억제될 수도 있다. 일본은 자살을 죄악시하는 종교문화적 기반이 강한 사회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책임을 지는 방식의 하나로 자살을 용인하는 문화적 풍토가 어느 사회보다 강하고, 사적 형벌의 하나로 죽음을 강요하는 ‘강제적 자살’ 풍토도 있다. 가미카제나 자살공격 같은 ‘광기’는 적을 죽이려는 의지를 동반하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는 자살이라고 할 수 없지만, 전쟁 말기에 나타났던 집단자살은 이를 강제하는 문화적 풍토에서 이뤄진 것이다. 또 ‘셋푸쿠’나 ‘하라키리’라 불리는 할복자살의 형식도 있다. 할복이 일본만의 전통은 아니다. 중국과 한국에도 있고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할복이라는 자살 형식이 일본의 문화적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때로는 사회적 항의의 수단으로, 때로는 궁극적 책임짓기의 한 형식으로 자리잡은 것은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가 (1900)에서 “영혼이나 사랑이 깃들어 있”는 복부를 칼로 찌르는 행위가 “예로부터 해부학적 전통”이라 말한 데서 비롯됐다. 과거를 특정 시공간으로 호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전통’인 것이다. 이 때문인지 국가주의자나 천황주의자 같은 극우파는 항의·충성·책임·매듭 등의 표시로 할복을 택했다. 1945년 8월15일 패전 직후에 많은 우파들이 할복자살을 택했지만, 역시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1970년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뒤에도 심심치 않게 극우파들의 할복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이렇게 보면 할복은 일본 극우파의 고유한 자살 방식이다. 좌파나 자유주의자 중에 자살한 사람이 적지 않지만 할복이라는 방식을 택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분신자살은 어떠할까?
우파의 할복, 좌파의 분신
1967년 11월11일 오후 6시께, 다음날로 예정된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미국 방문을 저지하기 위해 데모대가 속속 모여들고 있었던 도쿄 도심 나카타초. 총리 관저 앞 사거리에서 한 노인이 가슴에 가솔린을 뿌리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화염이 살을 파고들었고 노인은 바닥에 쓰러졌다. 노인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노인의 이름은 유이 주노신(由比忠之進). 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에 태어났으니 사건 당시의 나이는 73살이다. 유이는 유서 등을 통해 분신자살의 이유를 밝혔다. 두 가지였다. 베트남 인민을 학살하는 미국에 반대하고 미국에 협력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항의하기 위해서가 첫 번째 이유였고, 미군의 베트남 폭격 기지였던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를 실현시키기 위해서가 두 번째 이유였다.
그는 1920년대부터 에스페란토의 열렬한 신봉자이면서 활동가였다. 그는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열린 정치 공간’의 틈새가 만들어낸 국제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였다. 전시에 만주의 일본 기업에서 이른바 ‘식민자’로 일했던 부끄러운 경험에 대한 성찰이 평화주의·민주주의·국제주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고 이런 믿음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알베르 카뮈가 에서 “오늘날 모든 행동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모두 살인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듯이,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일본이 베트남 인민 학살에 가담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고, 그 현실에서 제국주의 시대 일본과 그 일본에 가담했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린 듯하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는 관방장관이 담화를 발표해 유이의 행동에 안타까움을 표하면서도 “민주주의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논의를 다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선거를 통해 비판하는 것에 있다. 어떤 형태이든 직접행동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분신이었을까? 유이 이전에 일본에서 분신자살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연이나 불륜, 개인적 원한이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치적 분신자살로는 유이가 일본에서 첫 번째다. 역시 1963년 베트남에서 일어난 승려들의 연이은 분신자살, 즉 소신공양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이때부터 분신은 숭고한 사회적 항의 수단으로 세계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1965년 앨리스 허즈라는 퀘이커 평화주의자 여성이 베트남전 반대를 내걸고 분신자살을 감행했고 이후 미국에서 8명이 허즈의 뒤를 이어 분신자살을 시도한다. 196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얀 팔라흐라는 청년이 소련의 군사개입에 항의하기 위해 가솔린을 몸에 끼얹고 불을 붙였다.
일본에서도 정치적 분신자살 사건이 뒤를 잇는다. 1970년 10월6일 신주쿠 부근에 자리한 신사에서 한 청년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1945년에 태어나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일본 국적을 취득한 재일조선인 2세였다. 1975년에는 빈민활동가 후나모토 슈지(船本洲治)가 오키나와의 가데나 미군기지 앞에서 분신자살을 감행했다. 적군파 활동가인 에모리 다카오(檜森孝雄)는 2002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분신자살을 했다. 정치적 우파로 분류되는 자위대 출신인 에토 고사부로(江藤小三郞)가 1969년에 분신자살한 사례는 매우 예외적이다. 이처럼 사회적 항의 수단으로서의 자살에도 우파와 좌파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통에서 차용한 할복자살이 우파라면,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서 비롯된 분신자살은 인터내셔널리즘을 드러내는 자살 방법이다.
죽음의 평균화, 수많은 자발적 죽음
죽음 중에서도 자살은, 자살 중에서도 분신은 총칼과 제도로 무장한 권력에 대해 맨몸뿐인 사회적 약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 수단이기는 하다. 언로가 막혀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희생적 자살’이 논리적·이성적 행위라는 전제 아래 그 자살을 통한 저항이 효과를 거두려면 자살이, 혹은 분신이 사회적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의 숭고한 희생으로 다가서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일본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작가 다카하시 가즈미(高橋和己)가 “죽음의 일상화”는 “죽음의 평균화를 낳아” 결국은 “그 압도적인 양에 의해 반응마비를 결과한다”고 말한 바 있듯이, 분신자살의 문제는 그 방식의 극단성이나 과격함에 있다기보다는, 많은 ‘자발적인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현대사회에서 그 ‘희소성’을 잃으면서 당사자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저항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잃었다는 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권혁태 교수의 ‘또 하나의 일본’ 연재를 다시 시작합니다. 극우화되어가는 한편에서 꿈틀대는 일본의 사회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펼칩니다.</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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