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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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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26일 감옥에서 죽은 정치범

인권 탄압의 역사는 감추고 관광상품화된 아바시리감옥박물관…
8·15 항복 뒤에도 정치범들은 계속 감옥에 갇혀 죽음에 노출돼
등록 2014-08-08 17:30 수정 2020-05-03 04:27
아바시리감옥박물관 천장에는 ‘탈옥왕’ 시라토리 요시에의 탈옥 장면을 재현한 인형이 설치돼 있다.

아바시리감옥박물관 천장에는 ‘탈옥왕’ 시라토리 요시에의 탈옥 장면을 재현한 인형이 설치돼 있다.

일본 홋카이도 북동의 끝. 오호츠크해에 면한 곳에 유빙의 마을로 유명한 아바시리(網走)가 있다. ‘우리가 발견한 바위’라는 뜻의 아이누말 ‘치파시리’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이 조그마한 소도시는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꽤 유명하다. 인구 4만 명을 밑도는 이 도시를 찾는 연간 관광객이 가장 많았을 때가 인구의 10배 이상인 50만 명이었다. 관광객을 이 작은 마을로 이끄는 것은 공교롭게 감옥이다. 옛 감옥 자리에 1983년부터 자리잡고 있는 아바시리감옥박물관을 찾은 관광객이 2008년 5월에 1천만 명을 돌파했다고 하니 그 유명세를 짐작할 만하다. 아바시리감옥이 유명세를 탄 것은 한국에도 잘 알려진 배우 다카쿠라 겐이 주연한 라는 야쿠자 영화 때문이다. 감옥박물관에는 이 영화를 기념해 석비가 한쪽에 세워져 있을 정도다. 아바시리감옥 때문에 마을의 이미지가 나빠졌다며 감옥 이름을 바꾸자는 마을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 정작 이 한적한 마을을 먹여살리고 있는 것은 감옥이다.

‘호화로운’ 감옥 식사 720엔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다양한 죄수 체험 프로그램을 맛볼 수 있다. 잠깐이나마 감옥에 갇혀보는 색다른 체험을 할 수도 있고 죄수들이 과거에 먹었다는 ‘호화로운’ 감옥 식사를 720엔만 내면 먹어볼 수도 있다. ‘감옥에 숨겨져 있는 비밀의 레시피’라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선전 문구를 참을 수 있다면 말이다. 또 이 감옥박물관의 천장에는 탈옥 장면을 재현한 사람 모양의 인형이 실제 크기로 걸려 있다. ‘탈옥왕’이라 불렸던 죄수의 탈옥 이야기에서 따온 설치물이다.

과거의 ‘슬픈’ 흔적이 인기 많은 관광 상품이 되는 경우가 그리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박물관에는 가벼운 패러디가 항상 따라다니는 법이다. 하물며 아우슈비츠도 서대문형무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러하다. 또 전시 방식이나 내용이 무겁다고 해서 이를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역사와 진지하게 대면하는 것만도 아니니 아바시리의 이 가벼운 패러디에 하나하나 눈꼬리를 치켜세우고 목소리를 높일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박물관을 일종의 기억의 역사 공간이라 한다면, 과거를 특정한 장소로 호출해 되살리는 행위는 무겁든 가볍든 일정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정치적이다. 그래서 기억을 관광화하고 역사를 상품화할 때, 그것이 아무리 탈정치적·탈역사적이라 강변해도 그 ‘탈’ 자체가 일정한 지향점, 정치성, 역사관을 가지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 ‘탈옥왕’ 인형은 시라토리 요시에(白鳥由榮)라는 실제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는 26년의 복역 기간 중, 1944년 아바시리에서 탈옥한 것을 포함해 모두 4번이나 탈옥에 성공한 신화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초인적인 탈옥 능력에 대한 호기심 어린 설명은 있어도 그가 감옥 내에서 얼마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는지, 그리고 이같은 부당한 대우가 어떻게 탈옥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요시무라 아키라(吉村昭)가 ‘탈옥왕’을 소재로 쓴 소설 (1983)을 읽어보면, 시라토리의 탈옥 동기가 간수들의 비인간적인 대우에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실제 그는 전후의 민주화로 간수들의 태도가 변하자 탈옥을 멈추고 모범수로 복역하다가 출옥해 평화로운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조르게(Sorge) 스파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크로아티아 출신 국제공산주의자 블랑코 부켈리치(Blanko de Voukelitch)가 영양실조로 옥사한 곳도 바로 이 아바시리감옥이다. 1945년 2월의 일이다. 미군정기 참모부 책임자를 지낸 찰스 윌러비(C. A. Willoughby)는 부켈리치가 고문으로 죽었을 것이라 1952년에 증언하고 있다. 반년만 버텼다면 다른 사람이 그러했듯이 감옥문을 나서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바시리에서 패전을 맞이한 일본공산당 미야모토 겐지(宮本顯治)는 출옥 직후인 1945년에 쓴 ‘아바시리의 각서’에서 구타 같은 인권 탄압이 다른 형무소보다 훨씬 더 야만적이었으며 또 열악한 식사가 부켈리치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이라 쓰고 있다.

추위에 시달리고, 홋카이도 개척에 내몰리고

공산당원 이치카와 쇼이치(市川正一)와 공산당원 고쿠료 고이치로(國領五一郞)도 취조 중에 받았던 고문에 더해 아바시리에서의 혹독한 복역 생활로 건강을 해쳐 결국 각각 이감 형무소인 미야기형무소와 사카이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34~40년 아바시리에서 복역한 일본공산당 도쿠다 규이치(德田球一)가 1947년에 출간된 에서 영하 30℃ 아래로 내려가는 아바시리의 혹독한 추위 때문에 감옥의 벽과 눈썹, 입가에 생기는 수많은 얼음 알갱이를 ‘얼음과자’라 비유하고 있을 정도이니 아바시리의 추위가 얼마나 유별났는지를 추측해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영하 30℃ 아래로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에 비인간적인 대우와 열악한 식사 등이 옥사의 원인이겠지만, 아바시리감옥박물관의 전시물이나 박물관에서 펴낸 안내책자 어디에도 이같은 사실을 적시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홋카이도 ‘개척’이라는 이름하에 죽음으로 내몰린 아이누 사람이나 산악도로 건설에 동원됐다가 죽어간 죄수들의 역사를 덧붙이면, 아바시리감옥은 인권 탄압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아바시리만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최근 한국에도 으로 알려진 프롤레타리아 작가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 역시 1933년 2월20일에 고문으로 죽었다. 경찰은 사인을 ‘심장마비’로 발표했지만,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주검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목 졸린 흔적이 있고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다고 한다. 1934년 2월에는 라는 책으로 유명한 노로 에이타로(野呂榮太郞)가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1940년 7월29일에는 기자 영국인 콕스(M. J. Cox)가 도쿄에 있는 헌병대 본부 건물에서 취조 중에 뛰어내려 자살했다. 1945년 8월9일에는 유물론 철학자인 도사카 준(戶坂順)이 나가노형무소에서 영양실조로 인한 급성신장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불과 패전 6일 전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끌려가서 고문당하며 죽어갔다.

항복 선언 뒤에도 “비밀경찰은 활동 중”

일본의 유명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1945년 8월15일을 ‘무혈혁명’이라 했다. 유혈이든 무혈이든 만일 8·15가 혁명이라면, 혁명 이전의 피해 사실을 조사해 피해자와 가해자를 특정하고 피해자에게는 배상·보상을 하고 가해자에게는 처벌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에게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를 해야 한다.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냉전 해체 이후 새롭게 등장한 ‘이행기의 정의’라는 개념을 들이대도 마찬가지다. 8·15 이후의 일본에서 8·15 이전의 인권 탄압 사례를 공식적으로 조사하거나 조사하려 했다는 사실은 들은 바 없다. 도쿄재판 등을 통해 처벌이 이루어졌지만, 이 처벌은 연합국에 적대했다는 의미에서 이루어졌을 뿐이다. 식민지 피해자나 일본 내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배상·보상은커녕 사죄도 조사도 없었다. 왜일까?

레닌은 1920년에 발표한 ‘공산주의 내의 좌익소아병’이라는 글에서 혁명은 피지배자가 더 이상 낡은 것을 바라지 않고 지배자가 기존 방식을 고수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 했다.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포함한 전 인민적인 위기 없이는 혁명이란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확실히 일본의 8·15는 혁명이 아니었다. 철학자 미키 기요시(三木淸)가 도쿄의 도요타마형무소에서 영양실조로 죽음을 거둔 것은 1945년 9월26일이다. 히로히토가 항복 선언을 하고 나서도 한 달 이상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미키 기요시의 옥사 이후 외신기자의 질문에 당시 내무상은 “비밀경찰은 여전히 활동 중”이며 “또한 공산주의자는 용서 없이 체포하겠다”는 대답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정치범이 감옥 문을 나선 것은 맥아더의 미군정이 석방 지시를 내린 1945년 10월4일부터다. 즉 미군정의 의지가 없었다면, 정치범들은 패전과 항복에도 불구하고 계속 감옥에 갇혀 옥사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을 것이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약 60명이 체포되고 4명이 옥사한 이른바 ‘요코하마 사건’ 관계자 중 약 30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진 것도 패전 직후인 1945년 8~9월의 일이다. 더구나 이 기간에 일본 정부는 미군정의 추궁을 피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완전히 소각했다. 일본 정부는 항복과 패전에도 일본 전역의 감옥에 갇혀 있는 약 2천 명의 사상범을 석방하기는커녕, 기존 인권 탄압의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패전부터 정치범 석방까지 ‘공백의 50일’ 동안 일본 인민들이 정치범을 석방하기 위해 움직였을까?

1945년 8월15일 시점에 유치장에 갇혀 있던 역사학자 하니 고로(羽仁五郞)는 “하루빨리 유치장을 나가고 싶었다. 또 나와 같이 공부했던 젊은 친구들이 당연히 나를 맞이하러 올 것이라 생각했다. 즉 (우리의) 석방을 요구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무참하게도 누구도 정치범을 석방하려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정치범 석방을 위해 먼저 움직인 것은 조선인이었고, 이들 정치범을 최종적으로 석방시킨 것은 ‘혁명적 독재’라 불리는 미군정 당국이었다. 게다가 10월4일 이후 형무소 앞으로 정치범을 맞이하러 온 사람도 대개가 조선인이었다.

히타카 로쿠로(日高六郞)는 (1980)에서 미키 기요시의 죽음에는 의도적인 살인의 가능성이 있다면서 “일본 정부는 패전 후에도 미키 기요시를 석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 인민은 미키 기요시를 구할 수 없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일본 인민은 미키 기요시를 구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예 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만일 무혈혁명이든 유혈혁명이든 항복 선언 이후 일본 내에서 정치범 석방을 위한 움직임이 신속하게 나타났다면 미키는 죽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마루야마가 말하는 ‘무혈혁명’은 결과적으로 틀렸다. 오히려 일본 인민의 주체적인 힘으로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는 회한을 담아 ‘민족의 굴욕’이라 표현한, 중국 연구자이면서 사상가였던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의 지적이 한층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체포 수십만 명, 송검 7만 명, 사망 1682명…

대표적 악법이던 치안유지법 희생자에 대한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치안유지법 희생자 국가배상요구동맹’이라는 단체가 결성된 것은 패전에서 무려 20년 이상이 지난 1968년의 일이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고 있지는 못하다. 앞서 말한 ‘요코하마 사건’의 유족들이 일으킨 재심 청구는 2005년에 면소 판결이 내려졌다. 치안유지법 등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감옥에 끌려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는지를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사한 적은 없다. 다만 1976년 1월 일본공산당 의원이 중의원에서 질의를 통해 밝힌 숫자로 그 윤곽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체포자 수십만 명, 검사국으로 송검(送檢)된 자 7만5681명, 송검 뒤 사망한 자 1682명, 체포 뒤 고문으로 사망한 자 65명, 체포가 원인이 되어 옥사한 자 114명, 체포 뒤 병사한 자 1503명. 아바시리감옥박물관에 희생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전시될 날이 올까?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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