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말 안 통하는 유럽연합?

등록 2006-09-20 00:00 수정 2020-05-02 04:24

공식언어만 20개, 집행위원회 통역비는 연간 1억유로

▣ 브뤼셀=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지난 2004년 유럽연합이 15개국에서 25개국으로 크게 늘어나면서 생긴 고민 가운데 하나가 언어소통에 관한 문제다. 특히 집행위원회를 비롯해 관료들 사이에서 의사소통 때문에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한두 가지 외국어는 유럽연합 관료들의 필수 능력이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은 외국어를 구사하는 게 아니어서 의사소통이 항상 자유롭지는 않다. 그래서 통역사나 번역가를 많이 쓰게 되지만 이 또한 비용 문제 때문에 고민이 적지 않다.

유럽연합 각 기관에선 현재 20개 언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된다. 이에 따른 통·번역 비용만도 전체 회원국 예산의 1%에 이른다고 한다. 유엔 공식언어가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중국어·러시아어·아랍어 등 6개인 것에 비춰보면 얼마나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요되는 지 짐작할 수 있다.

유럽연합의 통·번역은 기관별로 따로 운영하는데, 집행위원회는 교육·문화·언어 담당 집행위원회에 딸린 번역총국과 통역총국을 따로 두고 있다. 현재 번역총국에는 1650명의 상근 번역사와 550명의 행정인력을, 통역총국에는 상근 통역사 500명에 프리랜서 2700명을 두고 있다. 조만간 불가리아와 루마니아가 가입하면 인력은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지난 8월28일 유럽연합 순번의장을 맡고 있는 핀란드의 알렉산더 스터브 부총리는 유럽연합, 특히 유럽의회에서 언어 개혁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의원들에게 획일적으로 영어로 연설해달라고 주문하는 게 무리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통역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알면 그들도 내 심정을 이해할 것”이라고 푸념했다. 실제로 유럽의회에선 통역자 1인당 일당으로 평균 1500유로(약 200만원), 집행위원회는 1천유로(약 120만원)를 지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행위원회에선 통역 비용으로만 연간 1억유로(약 1200억원)를 쏟아붓고 있다고 한다.

한 유럽연합 관료는 “유럽의회에서 소요되는 통역비가 비싼 것은 통역자가 의회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많은데다, 의회가 스트라스부르와 브뤼셀 양쪽으로 나뉘어 있어 오가며 업무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유럽의회의 상임위원회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전체회의는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다. 또 사무국은 룩셈부르크에 두는 등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의회 일정을 좀더 효율적으로 짜면 의원들의 여행 경비나 업무 비용도 줄고 통역 비용도 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스터브 부총리는 “의회 사무처에서 의원들의 사용 언어를 프로필로 모아 회의를 주선할 때마다 이를 고려해 조를 짜도록 하자”는 의견을 내놨다. 즉 유럽의회 의원들을 언어권별로 모아 모임을 할 때마다 세 가지 정도의 언어로 통합해 통역 비용을 지불하면 모임 한 차례당 평균 8900유로(약 1100만원)의 예산만 있으면 되지만, 모든 언어를 지원할 경우에는 그 10배가 넘는 11만8천유로(약 1억4천만원)가 소요된다는 게다.

이에 대해 유럽의회의 한 의원은 “그러면 언어에 순위가 매겨지게 되고, 영어가 제1언어가 돼 영어를 못하는 의원들은 소외될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밝혔다. 또 다른 의원은 “의원들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은 언어가 아닌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라고 덧붙였다. 정견이 같은 의원들끼리 모여야 할 위원회 모임이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끼리의 모임으로 바뀌는 불합리함도 문제다.

그러자 스터브 부총리는 “기관별로 산만하게 분리된 통·번역 업무를 하나의 서비스 기관으로 통합이라도 하자”는 의견을 다시 내놓았다. 하지만 이 역시 의회의 반대로 무산됐다. 자세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터브 부총리는 “통합된 기관이 생기면 의회에서 일하는 통역 인력들이 집행위원회에 일자리를 빼앗기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유럽연합에서 통·번역은 이제 의사소통의 문제를 넘어 조직의 이해가 걸린 문제가 돼버렸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