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먹고 마시거나 떠나거나, 브뤼셀의 새해 풍경</font>
▣ 브뤼셀=글·사진 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벨기에에도 어김없이 새해는 밝았다. 브뤼셀의 그랑플라스에서는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1월1일 0시를 기해 새해맞이 행사를 열었다. 수백 발의 폭죽이 터지는 가운데 연인들은 축하의 키스를 나눴다. 짝도 없으면서 분위기에 휩쓸려 나온 외톨이들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외톨이들과 서로 포옹하며 “본 아네”(프랑스어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외쳤다. 반면 새해 아침은 고요했다(우리나라처럼 해돋이 행사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고 친구 집에 모여 새벽까지 술을 마셨던 젊은이들은 오후 늦게서야 일어나 슬슬 집에 돌아갈 궁리를 했다.
가정이 있는 경우는 조금 다르다. 벨기에는 대부분 12월 마지막 주부터 1월 첫 주까지가 휴가 기간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구질구질한 유럽의 겨울 날씨를 피해 여유 있는 가정들은 따뜻한 곳으로 휴가를 떠난다. 내가 살고 있는 건물(총 9가구가 사는 다세대 건물이다) 맨 위층에 사는 바키리시오글루 가족은 벌써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나고 없다. 곱슬머리 자녀 둘을 둔 이 그리스인 가정은 지금쯤, 따뜻하고 물 맑은 에게해의 고향에서 자연과 인정을 만끽하고 있을 게다. 맞벌이를 하는 아래층 카이저 가족도 마찬가지다. 이 집은 아침마다 아기를 늦지 않게 탁아소에 맡기느라 늘 허둥대는데, 지금은 부인의 고향인 남프랑스에서 아기는 외가에 맡기고 느긋한 한때를 보내고 있을 게다.
부모의 슬하를 떠난 대학생들은 지난 연말의 흥분은 잊고 긴장된 새해를 맞아야 한다. 대학생 알비가 사는 옆집에서는 뭔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학 2학년인 그는 개학 뒤 바로 있을 1학기 말 시험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벨기에 대학은 진급 낙제율이 최대 50%나 되기 때문에 까딱 잘못했다가는 1년을 허송세월하기 십상이다. 시험도 대부분 필기와 구두가 함께 치러지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크다. 평소에는 술 마시고 놀기 좋아하는 이 벨기에 청년, 오늘만큼은 답안 외우는 소리가 하루 종일 빈 건물에 메아리친다. 알비의 아래층에 사는 유학생 슐코우스카와 샤오메이는 지금 집에 없다. 각자의 고향인 폴란드와 중국에 다니러 갔기 때문이다. 아직 1학년이라 실감은 덜하겠지만, 그들도 시험 걱정 때문에 새해맞이가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공휴일 다음날인 1월2일에는 환경미화원들이 각 가정을 방문했다. 대부분 휴가를 떠나 빈집이지만, 미화원들은 집집마다 새해맞이 봉사료(떡값)를 걷으러 다니느라 바쁘다. 쓰레기 수거비는 쓰레기 봉투를 살 때 봉투값에 포함되기 마련이지만, 벨기에 미화원들도 떡을 먹는지 떡값을 걷으러 다닌다. 아내는 그들에게 ‘겨우’ 2유로(약 2450원)짜리 동전을 주면서 한 해 잘 부탁한다고 이래저래 아부했지만, 같은 동네의 샤커테리(소시지 가게) 주인은 떡값 대신 그들에게 봉지 한가득 소시지를 안겨주면서 미소 한 번 짓는 것으로 끝냈다.
TV 뉴스에서는 올 새해 아침에도 어김없이 노숙자들을 위한 파티가 열렸다고 전한다. 그들을 위해 브뤼셀 중앙역 지하도에서 베풀어진 만찬은 뜨거운 굴라시(헝가리식 매운 스프)였다. 화면에 비친 70대 노파는 어느새 굴라시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봉사요원들이 나눠주는 선물 꾸러미를 받으러 다음 줄에 가서 서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춥고 배고픈 겨울인 반면, 다소 여유 있는 이들에게는 ‘솔드’(바겐세일)를 기대하는 기쁨이 크다. 1월3일부터 전국적으로 시작된 이번 솔드는 춥지 않은 날씨 탓에 겨울 상품 매출이 다소 줄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2007년이 시작됐다. 지금은 그리스에 가 있는 바키리시오글루 가족도, 옆집에 사는 알비도, 아랫집에 사는 카이저 가족도, 그 옆집의 폴란드·중국 유학생도, 떡값을 받아간 청소부도, 중앙역의 이름 모를 노파도 조만간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 모두 건강하고 기쁜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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