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순위 매기기는 아무 의미가 없는 ‘민간 권력’의 세계 EU
▣ 브뤼셀=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미국에서 출간되는 국제정치 서적은 대부분 ‘현실주의’ 시각을 보인다. 단골로 등장하는 용어도 체제·행위자·국력·국익 등이 많다. ‘국가’라는 행위자가 국력을 키워 이익을 선점하는 것을 국제정치의 본질로 파악한다. 따라서 국가 간에는 국력에 따른 서열이 정해지고 각 행위자는 자신의 서열을 높이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본다.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인 야구의 메이저리그(체제)에서는 구단(행위자)이 선수를 사고팔아(국력을 키워) 리그에서 우승(국익)하는 것(서열을 높이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대학 순위, 기업 순위, 연봉 순위 등 즐겨 서열을 매기는 곳에서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도구로 분석해서 들어맞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미국은 현실주의 정치학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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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자부심과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라는 국가 비전이 그것을 증명한다. 대학, 기업, 심지어 포털 사이트 검색어에도 순위를 매기는 구조에서는 당연히 현실주의가 사회를 지배한다. 올림픽을 스포츠를 통한 인류의 놀이의 장으로 보지 않고 국가 간 순위 경쟁의 장으로 파악하는 경향은 우리 사회가 서열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는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도 행위자(한국·일본·중국)들이 서열 경쟁을 하는 국익 선점의 정치(동북공정·독도·동해 표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럼 세상을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는가? 있다. 그 시험대가 바로 유럽연합(EU)이다. 유럽연합이 국제관계,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시각은 ‘민간 권력’(civilian power)이라고 불리는 개념에 있다. 원래 ‘민간 권력’은 ‘군사 권력’(military power)에 반대되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폭넓은 의미로 쓰인다. 브뤼셀 자유대학의 마리오 텔로 교수는 “유럽연합의 정책은 거대 인원이 모여 다자적 수준의 토론과 결정을 통해 긴 기간에 걸쳐 탄생된다”며 “이런 과정에는 시민사회의 힘이 여러 경로로 투입되기 때문에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우선시되며, 군사력은 배제되는 경향이 많다”고 말한다. 즉, 시민의 힘이 외교정책 결정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시민의 힘이 군사력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유럽이, 이란을 제압할 대상이 아닌 대화의 대상으로, 북한 핵 문제를 안보의 문제가 아닌 빈곤의 문제로 보는 것도 이같은 시각에서다.
유럽연합은 행위자인 동시에 정책결정 과정의 장이고 민간 권력 그 자체이다. 민간 권력은 시민 간 관계에 기반한다. 또 이런 관계는 시민사회의 공동의 관심과 이익이 바탕이 된다. 그래서 민간 권력은 국가 권력과는 다르다. 관심과 이익을 함께 나누며 다른 나라의 시민사회와도 연대하며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일지라도 관심과 이익이 다르면 정치의 대상이 된다. 국가의 이익보다 사회의 이익, 공동의 이익이 앞선다. 유럽의회와 세계적 환경단체 그린피스가 이런 방식의 대표적인 예다. 세계 정치에서 유럽연합이 빈곤과 환경 문제를 선도하는 것은 인류 공동의 이익이 국익에 앞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국가의 순위 매기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
어느 한국 신문의 칼럼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소식을 전하며 그를 ‘세계 정상’으로 빗대어 표현했다. 거칠게 딴죽을 걸자면 미국식 현실주의 서열의식의 발로가 아닌가 한다. 유럽연합은 순회 의장국, 집행위원장은 있어도 ‘유럽 정상’은 없다. 유럽 기자라면 무의식에서도 그를 ‘세계 정상’이라 표현하진 않았을 것이다. 서열의식과 연대의식의 차이, 그것이 바로 미국과 유럽이 가진 근본적인 시각차다. 유럽 시각에서 보자면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라는 관계에 윤활유를 뿌려주는 일꾼이자, 평화라는 인류 공동 이익의 기획자다. 반기문 총장의 역할은 이런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세상에는 체제, 행위자, 국익, 국력이란 단어를 대신하는 아름다운 말들이 있다. 시민, 관계, 연대의식, 공동의 관심과 이익 등이 그것이다. 민간 권력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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