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화한 정통 유목민과 이슬람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떠도는 아랍의 집시들
▣ 암만=김동문 전문위원 yahiya@hanmail.net
아랍의 유목민 하면 양과 염소를 돌보며 광야를 돌아다니는 이들인 ‘바두’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한 ‘유목민’들이 있다. 들판 대신 도시 한복판에서 철거민이나 난민처럼 천막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 양과 염소 떼를 몰고 도시 속으로 들어선 이들, 쓰레기통을 뒤지고 고물과 넝마를 찾아다니는 말투와 옷차림새도 이상한 이들까지….
번잡한 오후 시간 갑자기 도로가 막힌다. 한 무리의 양과 염소 떼가 길을 건너고 있다. 도시 속의 유목민들인 이들은 토박이 정통 유목민의 후손이다. 문명에 동화돼 도시로 왔지만 여전히 전통 생활방식을 고집한다. 이런 부류를 ‘문명화한 유목민’이란 뜻의 ‘하다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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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나 염소는 한 마리도 키우지 않으면서 떠돌아다니는 유랑민들도 있다. 생활공간도 조잡한 단칸 천막이고, 살림살이며 옷차림은 허름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아랍어를 말하고 아랍 문화와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전통 유목민 ‘바두’라고 말한다. 몰락한 유목민의 후손인 이들은 조상처럼 양떼를 몰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임시 일자리를 찾아 농촌과 도시 주변을 맴돈다. 이런 부류는 떠돌이란 뜻의 ‘나와리’로 불린다.
이들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이방인도 있다. 바로 집시들이다. 유럽에서나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요르단이나 이라크·시리아 등 중동 일부 나라에도 집시는 살고 있다. 집시의 기원에 대해서는 ‘인도 기원설’이 일반적이지만 확실한 정설은 없다. 집시를 일컫는 말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표준어로는 ‘가자르’로 부르지만 시리아에서는 ‘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어로 ‘집시’라는 말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이들을 이집트인으로 생각하고 ‘이집트인’(Egyptian)이라고 했던 것이 변형돼 ‘집시’가 됐다는 말도 있다.
문화와 풍습, 전통도 다른 ‘가자르’가 요르단에 들어와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살게 된 지도 200년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정확한 기록은 없다. 요르단에 살고 있는 가자르는 30개 부족 2만5천여 명으로 추정되는데,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이 터키나 쿠르디스탄에서 왔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헐렁하면서도 색상이 화려한 옷을 입고 긴 머리를 한 집시 여성과 허름한 옷차림새의 아이들은 시내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 피부색은 황갈색으로 백인에 가까워 보이는 현지 아랍인들과 구별된다. 눈동자는 까맣다. 염색을 하고 다니는 유행이 있는지, 다양한 머리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은 검은 머리카락이다. 키는 현지인들보다 작은 편이다.
옷차림새와 말투, 생활하는 모습과 사는 집(천막) 모양까지 다른 집시들은 대개 어느 날 갑자기 도시 한 귀퉁이 빈터에 여러 가족이 한꺼번에 몰려와 천막을 치고 자리를 잡는다. 날이 밝으면 자신들만의 음식을 먹고는 저마다 일을 맡아 흩어지거나 천막집에 머물러 제 몫을 한다. 여성들은 동네를 누비며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넝마나 고물 등 돈 될 만한 것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올리브가 익어가는 가을이면 올리브를 따 자루에 담아 가기도 한다.
집시들의 종교는 이슬람도, 기독교도 아니다. 대부분의 집시 아이들은 학교에도 가지 않는다. 수도도 전기도 없고, 식수를 저장할 만한 물탱크도 없다. 그래도 이들에겐 문제될 것이 없다. 달과 별보다 더 밝은 도시 문명의 화려한 불빛이 있고, 물은 인근 주택에서 얻으면 될 일이다. 한동안 정착해 사는가 싶던 집시 일가족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 날 문득 천막을 접고 짐을 꾸린다. 그리고 그들이 머물렀던 터전은 다시 공터가 된다.
오늘의 집시는 도시인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문명의 쓰레기’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문명 속에 사는 도시인을 부러워하지 않지만, 이른바 ‘집시 룩’이 유행하는 걸 보니 도시인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오라는 데 없어도 갈 곳은 많은 도시 속의 유목민, 집시는 자유인일까 경계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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