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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월드] 벨기에, 인종차별주의와의 밀어

등록 2006-06-09 00:00 수정 2020-05-02 04:24

브뤼셀 중앙역 살인사건과 안트베르펜 총기 사건에서 드러난 이민자 문제

▣ 브뤼셀=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최근 벨기에에서 두 가지 강력사건이 잇따라 벌어져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첫 번째 사건은 4월12일 오후 4시30분께 브뤼셀 중앙역에서 벌어졌다. 조 반 홀스비크라는 17살의 백인 소년이 아랍계 이민자로 보이는 두 소년의 칼에 찔려 숨졌다. 당시 조는 MP3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노린 범인들과 다툼이 벌어져 결국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범인은 현장에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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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뒤 청소년 단체와 브뤼셀 시민들은 거리에서 조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 행진을 벌였고, 이민자(특히 아랍계) 문제를 지적하는 토론이 여러 매체에서 이뤄졌다. 벨기에 무슬림 연합은 조의 죽음을 추모하는 특별 성명을 발표하고, 아랍계의 자숙을 당부했다. 다행히 범인들은 사건 발생 12일 만에 체포됐다. 그런데 범인 체포 뒤 벨기에 사회는 다시 한 번 크게 당황하게 됐는데, 범인이 아랍계가 아닌 폴란드계 불법 체류자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사건은 5월11일 오후 1시께 벨기에 제1의 항구도시 안트베르펜에서 벌어졌다. 한스 반 테무쉬라는 18살의 백인 소년이 시내에서 외국인들을 향해 총을 난사한 것이다. 이로 인해 아프리카 말리 출신의 여성(보모)과 이 여성이 돌보던 두 살배기 백인 소녀가 숨졌고, 주변에 있던 터키계 여성이 중상을 입었다. 범인은 벨기에 북부의 플라망계 소년으로 극우정당 ‘블람스 블랑’을 추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 발생 뒤 벨기에 국민들은 희생된 이들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안트베르펜 시내에서 침묵 시위를 벌였고,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사건의 발단이 된 극우정당의 인종차별주의 정책을 강력히 비난했다.

이 사건들은 벨기에는 물론 유럽에서 이민자 문제가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지금 유럽에선 이민자들이나 본토박이 백인들 모두 서로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다. 백인들은 유럽 문화에 잘 동화되지 않고 집단 행동을 일삼는 아랍계에 대해 특히 부정적이다. 반면 이민자들은 “노동력 수급을 위해 수입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딴소리냐”고 반발한다. 분명한 것은 60~70년대 건너온 이민자들은 점차 퇴조한 반면 그들이 낳은 자녀가 아랍계의 핵심이 됐다는 데 백인들이 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랍계 가정은 백인 가정보다 훨씬 많은 자녀를 두는데다 고향에 있는 친척들까지 불러들여 인구 증가 속도가 본토박이를 앞지른다. 이들에게 소요되는 사회보장 비용이 대부분 백인들의 세금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도 불만을 사는 또 다른 이유다.

이런 불만은 극우주의의 발호를 충동질한다. 외국인 노동자 추방, 유럽연합(EU) 탈퇴, 플라망 지역 분리독립 등의 구호를 내건 극우정당 ‘블람스 블록’은 지난 2004년 선거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플라망 지역에서 제1당으로 우뚝 솟았다. 비록 연방최고법원에서 인종차별주의 정당으로 지목해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극우정당의 인기는 시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정치력은 ‘블람스 블랑’이라고 이름만 바꾼 새로운 정당을 재탄생시키기까지 했다.

브뤼셀 중앙역 사건에서 보듯 아랍계에 대한 반발은 폭력 사건의 가해자는 일단 아랍계로 간주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었다. 안트베르펜 사건에서 보듯 극우주의의 발호는 청소년조차 무차별 살인극의 주범이 되도록 했다. 백인 지식층들은 이민자들을 싫어하면서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이 두려워 감히 앞에 나서지 않는다. ‘블람스 블랑’이 인기를 얻는 것은 이에 대한 대리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가난한 불법 이민자들은 번화한 도심의 한켠에서 슬럼가를 형성한 반면 부유한 백인들은 점차 도심을 탈출한다. 이민자에 대한 차별과 이민자에 대한 사회적 평등 요구가 충돌하는 가운데 벨기에의 고민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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