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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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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거나 아주 세거나

등록 2006-05-19 00:00 수정 2020-05-03 04:24

잠자리 훔쳐보기나 쇼킹한 장면들 여과 없이 방송하는 벨기에TV

▣ 브뤼셀=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벨기에 텔레비전은 한국보다 재미가 없다. 쇼든 뉴스든 드라마든 다양하게 활성화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쇼라고 해봐야 어린이 상대이거나 가끔 라이브 방송을 해주는 정도다. 뉴스도 사회 고발 위주인 한국의 9시 뉴스와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 소식 전달 위주다. 심지어 ‘어느 동네의 길 이름이 터키식으로 바뀌었으니 혼동하지 말라’는 내용을 전해주기도 한다.

드라마도 별로 없다. 한국이라면 연속극을 해야 할 시간에 벨기에에서는 한물간 할리우드 영화를 해준다. 그나마 언어만 바꿔서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방송을 번갈아가며 해준다. 007시리즈와 존 웨인 주연의 서부영화는 가장 흔한 단골 메뉴다. 이런 경향은 유럽 대부분의 방송이 비슷하다. 그러나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하품 나는 방송들이 ‘진하고 센 것’을 내보내는 데에는 전혀 인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일반인들의 성과 폭력에 관해서 그렇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방송 중에 <sexy or not>이라는 것이 있다. 프랑스, 벨기에 등 각지에서 자신이 섹시하다고 자부하는 일반 남녀가 네 명의 심사위원 앞에서 갖은 교태를 부리는 프로다. 시청자도 텔레비전을 보며 평가자가 된다. 속옷을 훌렁 벗어던지는 것은 예사고 온갖 자극적인 자세가 동원된다. 여름철만 되면 방영되는 <템프테이션>이라는 프로도 비슷하다. 먼저 경치 좋은 어느 섬에 남녀 여럿이 등장한다. 매력적인 싱글 신청자들은 남녀별로 나뉘어 각각의 섬으로 들어간다. 이어서 커플 신청자들이 남녀별로 각각의 섬으로 들어가 싱글들과 함께 생활한다. 결국 그들이 그곳에서 얼마나 새로운 이성에 유혹되지 않고 버티느냐가 관건이다. 그런데 유혹의 방법이 매우 자극적이다. 심지어 유혹하는 쪽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도 그대로 전파를 탄다. 필경 깨지는 커플이 있기 마련인데 유혹하는 일상을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깨진 커플이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며 싸움을 벌이는 것이 더욱 볼 만(?)하다.
폭력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는 <익스플러시프>(Explosif)라는 프로그램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을 가정용 카메라로 제보받아 전해준다. 이를테면 스케이드 보드를 타다가 팔이 부러지는 장면을 보여준다든지, 전기에 감전된 사람이 전봇대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 등이다. 가끔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도 등장한다. 미국에서 만들어졌지만 벨기에에서도 방영되는 <자카스>도 그렇다. 일반 젊은이들이 등장해 온갖 어리석은 육체적 고통을 경험해본다. 정화조에 빠졌다가 나온다든지, 무모하다 싶을 만큼 먼 공간을 자전거를 타고 점프하다 고꾸라진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의 진가는 폭력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카메라의 객체(주인공)를 보여주는 데 있지 않나 싶다.
잡지도 다르지 않다. 슈퍼마켓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쇼크>라는 잡지는 말 그대로 쇼킹한 장면만 잔뜩 실어놓았다. 중동 어디에서 소요사태로 불타 죽은 이의 처참한 주검을 보여준다든가, 테러 직후 죽은 테러리스트의 훼손된 육체를 보여준다. 파파라치들이 찍은 할리우드 배우들의 지저분한 자세나 일상 장면도 빠지지 않는다. 물론 이런 영상물에는 연령 제한 표시가 있다. 그러나 ‘금지’가 아닌 ‘권고하지 않는다’고 표기될 뿐이다. 금지한다고 해서 금지될 일은 아니니 차라리 타이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감히 내보이기 어려운 것들이 유럽의 방송이나 잡지에는 버젓이 나온다. 그렇다고 시비를 걸거나 화제를 삼는 이는 없다. 볼 사람은 보고 아니면 그만이다. 소득 수준이 높아질수록 자극적인 장면을 보려는 욕구가 점점 더 커진다는 의심스런 주장도 있다. 나른한 유럽인들에게 이제 할리우드식의 가짜 폭력과 성은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겪는 성과 폭력을 즐기는 추세다. 하지만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재미있어할 일이 아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당신의 죽음이 제보자의 손을 거쳐 유럽의 어느 잡지나 방송에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se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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