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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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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섭할까요, 서운할까요?

등록 2005-07-13 00:00 수정 2020-05-02 04:24

‘한국어 제자’인 <아카하타> 나카무라 기자와 함께 이시하라의 연설을 듣다

▣ 도쿄=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

“선생님, ‘섭섭하다’와 ‘서운하다’의 차이가 뭡니까?” 한국어의 걸음마를 갓 뗀 이의 질문치고는 가르치는 사람의 본능을 자극하는 질문이라니, 아무튼 그때부터 알아봤다.

꼭 4년 전이다. 부서 상사의 강제적 권유와 사내에서 신세대라는 이유로 ‘한국어 강좌’에 등떠밀려 왔다던 사람, 여름이면 눈치코치 봐가며 1년치 휴가를 몰아서 내어 한국의 어학당 단기코스를 2번이나 밟고 일취월장해 돌아와 사람 놀라게 하는, 그 이름 나카무라 게이고. 올해로 만 서른이 되는 그는,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 도쿄총국 담당. 도쿄 도의회와 이시하라 지사를 취재해온 신문기자다.

지난달 23일 도쿄 도의회선거가 고시된 뒤 본격적인 선거운동으로 접어든 때. 그는 일본 우익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시하라 지사의 지지연설 일정표를 들고 나타났다. 현장에서 뛰는 우수한 제자의 모습을 확인도 할 겸, 나는 아예 그의 취재 길에 따라나섰다.

가두연설장. 거대한 선거운동 차량의 단상에서 후보는 열심히 떠드는데, 사람들은 다른 뭔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바로 그때 갈채 속에 등장한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 마이크 잡고 왈. “제일 문제는 치안이요, 여러분. 알다시피 그건 외국인이 골치야. 그 중에서도 문제는 중국인이라고. 아주 괘씸해.” “옳소!”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한국과 일본에서 정반대의 의미로 유명한 이시하라 도지사의 10분 지지연설 끝에, 후보야 뭐라 하든 사람들은 또 우루루 흩어진다. 운동원은 남아주시고….

“사람들은 유명인사 감각으로 환호하며, 리더십을 발휘할 것 같은 정치가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도무지 논리가 없어요. 냉정하게 그의 말을 들으면, 이성의 파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요.”

정치적으로 압도적 유명세를 지닌 이시하라의 연설을 직접 들으면서 건져올린 느낌이란 것도 그의 몰이성의 파편과 강함의 뒷면에 서려 있는 약자에 대한 배려 없음, 타국에 대한 모멸 감정이었다. 이에 대해서 신문이나 다른 어떤 언론도 메스를 들이대지 않는다.

도쿄 도의회도 마찬가지다. 정권당 자민당, 공명당은 물론 민주당까지 이시하라를 지지하는 ‘올 여당’이다. 도지사를 비판하는 의원은 수명의 무소속 의원을 빼면, 공산당의 15명만 반대하는 셈이다. 기자회견에서도 지사가 싫어할 만한 질문을 하는 기자도 적고, 간혹 있다 해도 바로 다른 기자가 아부성 질문을 한다.

“다른 신문들은 이시하라의 폭언들을 별로 보도하지 않아요. 보도해도 비판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요. 그래서 <아카하타>만이 보도하고, <아카하타>라서 보도할 수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게 재미도 있고, 사명감도 느끼죠.”

또 다른 가두연설장으로 이동하면서 그가 전해준 건 이시하라의 망언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국에 알려진 망언들, 이를테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는 인도적이었으며 무력으로 침입하지 않았다느니, 될 수만 있다면 히틀러가 되고 싶다는 것 말고도, 이시하라는 망언록을 만들어도 될 정도예요. 목숨 걸고 (전쟁을 반대하는) 일본국헌법(특히 헌법 9조)을 깨부수겠다느니, 여성들은 생식 능력을 잃으면 살아 있다는 게 쓸데없다느니, 중증장애 아동을 보고 이런 아이들에게도 과연 인격이 있을까, 했다는 사람입니다. 참 말도 안 되는 망언들, 아예 시리즈로 내야 할까 봐요.”

<투쟁하는 신문 한겨레>(이토 치히로, 이와나미 서점)를 보면서, 자신도 독립적이면서도 영향력 있는 신문을 만드는 데 한몫을 하고 싶어졌단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한겨레>에 대한 관심이 깊다면서 “조·중·동에 맞서 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요미우리> <산케이>에 맞서는 자신들과 같아 친밀감이 느껴진다”고 한다.

이번 도의회 선거를 뒤로 하고 이제 외신부의 한반도 담당이 된 나카무라 기자. “한-일 관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사과가 전제돼야 한다”는 그의 건투와 건필을 빈다. 참, 나카무라 기자님, 컴퓨터에 산더미같이 저장된 이시하라 망언 시리즈를 안 보여주면 ‘섭섭하게요’ ‘서운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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