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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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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이남희

등록 2003-10-10 00:00 수정 2020-05-03 04:23

선물 중에서 책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숙제처럼 받게 되는 책이 많아선지, 책 선물을 받으면 일단은 읽어야 한다는 부담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읽고 싶던 바로 그 책을 선물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이상하게 다른 물건은 그럭저럭 남과 코드가 맞는데 책은 늘 아니다.

인생의 세차례 변화기

몇년 전, 중년 문제를 의논하는 내 강좌에 온 사람이 ‘참 감명 깊게 읽은 책’이라며 이 책을 선물했다. 으레 그렇듯 일단 받아 한바탕 읽은 뒤 서가에 꽂아놓았다. 저자인 니어링 부부가 흥미로운 삶을 살았군, 정도의 감상이 있었다. 언니가 와서 그 책을 보더니 읽고 싶다며 가져갔고 그리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이번 추석은 집에 내려가 병간호를 하며 지내야 했는데, 읽을거리를 찾다가 그 책을 발견하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나는 일종의 문자 중독증이어서 뭐든 읽을 게 있어야 편안해진다). 그런데 그 책은 구구절절 파고들어와 깊은 반성에 사로잡히게 하더니, 그 뒤 3주 이상을 같은 저자의 책들에 빠져 있게 만들었다.

지나간 뒤에 가슴 치며 아쉬워하는 게 종종 있다. 이 책도 ‘선물받았을 때 정독을 했더라면…’하는 뒤늦은 후회가 있었다. 하긴 모든 일에는 나름의 때가 있는 것이다.

중년의 문제를 의논하는 강좌를 열고 있다고 했는데, 사실 중년이란 문제는 내겐 참 심각했고 지금도 조금은 문젯거리가 아닌가 싶다. 중년의 우울증을 앓거나,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여러 원인도 있겠지만 아마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왜 나만 이럴까 하는 자괴감일 것이다.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중년이라면 이유 없이, 괜히(!) 그러는 것 같아서 더 힘들기도 할 것이다.

예전, 중년의 초입에 들어섰을 때 내가 그랬는데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인생에는 변화의 시기가 세번 있다. 첫째는 20대 초이다. 책임 있는 어른의 삶을 시작하기 전, 고민과 방황 끝에 세상은 이렇다, 인생은 저렇다고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 판단을 바탕으로 직업을 선택하고 친구를 사귀고 결혼을 한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그러다 중년을 맞이한다. 두 번째 변화기이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갑자기 달라 보인다. 소중한 것이 무의미해지거나, 미심쩍어진다. 삶을 재조정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세 번째는 죽을 무렵이다. 그러나 곧 죽으니까 그때의 고민이 이 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기 어렵다.

첫 번째 사춘기의 고민과 방황은 남들로부터 당연하다고 인정받는다. 심지어 장려되기도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중년의 변화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중년에 흔들리기 시작하면 주변에선 배부른 고민, 한가해서 하는 방황이라고 질타하며, 스스로도 내가 모자라서 생긴 문제라고 자책한다. 그 때문에 중년의 변화기에 제대로 고민해, 조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도록 인생관을 재조정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렵다. 요즘처럼 중년과 노년의 시기가 길어진 시대엔 중년의 변화기를 어떻게 대응해내는지가 중요하다.

거칠긴 하지만 아무튼 이런 말을 듣고 상당한 위안을 받았고, 나도 이제는 중년이니까 삶을 재조정해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20대와는 다른, 나름의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인간 이해 등등을 얻으려고 노력도 했다. 정신분석을 받기도 하고, 심리학도 배웠는데, 그럭저럭 이해가 깊어지는 것 같아 흐뭇한 적도 꽤 있었다. 나중엔 그런 공부를 정리해 중년의 고민을 나누는 강좌를 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는 아직도 막연하다는, 그래선지 보람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어떤 결락감 같은 것이 늘 있었다. 중년의 초입에서 나를 힘들게 했던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삶이 충만하지 못하고 보람은 느껴지지 않아 우울한 적이 많았다는 고백을 해야만 하겠다.

나는 무엇을 빠뜨렸는가

그러다 스콧 니어링 부부가 쓴 책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내가 중년의 변화기를 맞아 삶을 재조정하려고 애쓰면서 무엇을 빠뜨리고 고민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트렌드를 좇아 자신의 바람은 눈감고 방법만 모색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무릎을 치기도 했다….

정말 오랜만이다. 무작정 읽기 시작한 책에서 감동받고, 그 감동으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점검해볼 의욕을 갖게 되고, 실제로 그렇게 해볼 수 있다는 것. 마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듯하여 기쁘다. 그러고 보면 죽을 정도로 고민하고 방황하는 구비에서 나를 일으켜준 것은 언제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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