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21년 만에 ‘춘식이’로 돌아온 낭만의 레트로, 교외선 열차

모꼬지 청춘 실어나르다 2004년 추억 속으로… ‘BTS 성지’ 일영역 품고 새해 운행 재개
등록 2025-02-07 19:38 수정 2025-02-09 12:54
노란색 디젤기관차가 끄는 교외선 열차가 2025년 2월2일 경기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아파트 단지 사이를 달리고 있다.

노란색 디젤기관차가 끄는 교외선 열차가 2025년 2월2일 경기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아파트 단지 사이를 달리고 있다.


청춘의 설렘을 품고 서울 외곽을 달리던 교외선 열차가 아파트촌 사이로 다시 달린다. 2004년 운행을 중단한 지 21년 만이다. 전기 배선이 없는 옛 선로 위로 노란색 디젤기관차가 앞뒤에 붙어 객차를 끈다. 노란색과 갈색의 위아래 배색이 카카오 캐릭터 ‘춘식이’를 연상하게 해 ‘춘식이 열차’라 불리기도 한다.

1959년 미국 국제협력처(ICA) 원조를 받아 착공한 교외선은 1963년 능곡~의정부 구간이 개통됐다. 그 뒤 점차 정차역을 늘려간 교외선은 서울역을 출발해 대학이 밀집한 신촌역을 거쳐 능곡~대곡~원릉~벽제~일영~장흥~송추~가릉~의정부~청량리~용산~서울역 순으로 순환 운행했다.

교외선 운행 재개 이튿날인 1월12일 열차에 오른 승객들이 창밖 풍경을 스마트폰에 담고 있다.

교외선 운행 재개 이튿날인 1월12일 열차에 오른 승객들이 창밖 풍경을 스마트폰에 담고 있다.

광고


청바지와 통기타가 대학가를 점령했던 1970~1980년대 봄, 학년 초 단합을 핑계로 모꼬지(MT)를 떠나는 학생들로 신촌역이 북적였다. 벽돌로 지은 단층의 신촌역사 안팎이 일행을 찾느라 소란스럽다. 성마른 장발의 남학생이 기타를 꺼내 들고 ‘비바람이 치던 바다’로 시작하는 ‘연가’를 튕겨댄다.

방탄소년단(BTS)의 뷔가 일영역에서 교외선 열차를 기다리는 모습. 유튜브 ‘봄날’ 뮤비 갈무리

방탄소년단(BTS)의 뷔가 일영역에서 교외선 열차를 기다리는 모습. 유튜브 ‘봄날’ 뮤비 갈무리


어릴 적 마포에 살았던 필자는 해마다 한식 무렵 신촌역에서 교외선을 타고 장흥 공원묘지에 잠든 할머니를 찾아뵙곤 했다. 우리 집 5남매와 작은집 4남매에 어른들까지 13명 대가족은 모꼬지 나선 여느 학과에 비길 만한 수였다. 어머니 아버지 틈새에 끼어 앉은 초등생 막내의 눈에 무릎장단을 치며 “딸기 셋, 사과 넷”을 외치는 대학생 형·누나들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벌칙에 걸려 좌석 가운데 엎드린 벗의 등짝을 “인디언밥” 구령과 함께 후려치는 모습을 보고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실실거린다. 그러다 하얀 낯빛의 여학생과 눈이 마주치곤 황급히 벌어진 입을 다문다.

동트기 전 일영역에서 승객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동트기 전 일영역에서 승객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광고


요즘처럼 잘 조성된 놀이시설이나 휴양시설이 없던 그때 일영·송추계곡과 장흥유원지는 꽤 인기 있는 관광지였다. 특히 서울 강남이 본격 개발되기 전에는 북한산에서 뻗어나간 경기 북부의 산과 계곡이 근거리 여행지 구실을 톡톡히 했다.

1986년 성북~의정부 구간이 복선으로 전철화하면서 교외선은 의정부역까지만 운행하게 됐다. 전철이 거미줄처럼 세를 넓혀가면서 통일호 열차로 운행하던 교외선 승객은 차츰 줄어들었고 2004년 4월1일 운행을 멈췄다.

장영호(오른쪽)씨와 부인 김길순씨가 일영역에서 열차시간표를 확인하고 있다. 천장이 뚫려 옛 역사 골조가 보인다.

장영호(오른쪽)씨와 부인 김길순씨가 일영역에서 열차시간표를 확인하고 있다. 천장이 뚫려 옛 역사 골조가 보인다.


교외선이 하루 왕복 8회로 대곡역에서 의정부역까지 운행을 재개한 이튿날인 2025년 1월12일, 경기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사는 장영호(63)·김길순 부부는 일영역을 찾았다. 천장이 뚫려 옛 골조가 드러난 역사며 승차권을 발급하는 키오스크가 못내 신기한 아내 김씨는 교외선 운행 재개가 무척 반갑다. 김씨는 “교외선이 2024년 말 개통한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에이(A)노선 등 다른 교통편을 갈아타기 편리해 앞으로 운행 편수가 늘어나면 교통 시간이 크게 단축될 것 같다”며 웃었다.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1번 플랫폼에 들어선 부부는 대곡행 열차에 올랐다.

광고

한데 김씨의 바람과 달리 교외선은 당분간 운행 편수를 크게 늘리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선로가 일영역만 복선으로 돼 있어 상·하행 열차 교행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출근시간대에 두 편, 퇴근시간대에 두 편인 현재의 편성을 확대하려면 복선화 작업이 더 이뤄져야 한다.

일영역은 글로벌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봄날’ 뮤직비디오를 찍어 크게 알려졌다. 2017년 공개된 이 뮤비는 5억 회 넘게 조회됐고, ‘일영’이란 팻말 앞에 선 뷔를 따라 하려는 아미들의 국제적 성지가 됐다.

일영역 구내 선로에서 교외선 상·하행 열차가 교행하고 있다.

일영역 구내 선로에서 교외선 상·하행 열차가 교행하고 있다.


새해 들어 다시 달리기 시작한 교외선이 교통 험지의 주요 출퇴근 수단으로, 또 케이(K)팝 성지를 품은 관광열차로 옛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마음은 시간을 달려가네/ 홀로 남은 설국열차/ 니 손 잡고 지구 반대편까지 가/ 이 겨울을 끝내고파” ‘봄날’의 노랫말처럼.

사진·글 이정우 사진가

 

*낯섦과 익숙함, 경험과 미지, 예측과 기억, 이 사이를 넘나들며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시각적 자극이 카메라를 들어 올립니다. 뉴스를 다루는 사진기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한 이정우 사진가가 펼쳐놓는 프레임 안과 밖 이야기. 격주 연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4월3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