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18일, 서울 잠실구장 2루에 한 선수가 서 있었다. 185cm, 85kg의 건장한 체격. 국가대표 출신의 롯데 자이언츠 포수.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둔 당시 만 31살의 젊은 가장. 한때 마해영과 함께 ‘마림포’라 불리며 막강 롯데 타선을 책임지던 임수혁 선수다. 그런데 누구와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픽 쓰러졌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심장마비 장면은 운동과 는 거리가 먼 푸짐한 중년 아저씨가 흥분하 다가 가슴을 쥐어짜며 쓰러지는 것이었다. 심장마비에 무지했던 나에게는 운동으로 탄 탄하게 단련된 젊은 선수가 갑자기 쓰러지는 상황이 이례적으로 보였다. 과연 구단은 저 런 이례적인 상황까지 고려해 응급구조 체제 를 갖춰야 할 의무가 있을까.
심장질환 병력 없어도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들
심장마비로 인한 저산소성 뇌손상. 임수혁 선수의 병명이다. 심장박동이 갑자기 정지하 더라도 우리 몸속에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 는 산소가 어느 정도 남아 있어 4분 이내에 심폐소생술을 하면 뇌손상 없이 다시 살아 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처치 없이 4분이 지나면 서서히 뇌손상이 발생한다. 인지기능 이 손상될 수도 있고, 언어기능이 손상될 수 도 있고, 운동기능이 손상될 수도 있고, 시간 이 10분 이상 지나면 사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고 당시 잠실구장에는 미숙련 간 호사 1명만 대기한 채 어느 누구도 심폐소생 술을 시행하지 않았고, 구급차에는 심실제 세동기(심장박동이 미미해지고 불규칙해질 때 전기적 충격을 가해 회복시키는 의료장 비)도 없어서 결국 임수혁 선수는 응급조치 없이 병원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산소호 흡이 중단됐다. 그 결과 사고 발생 뒤 만 2년 이 넘도록 초점을 잃은 눈으로 사람을 바라 볼 뿐 방문객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가족과 말도 못하고, 스스로 손발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뇌기능이 심하게 손상됐다.
지난 6월19일 보건복지부의 ‘2011~2012 급성심장정지 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급성 심장정지(심장마비) 환자는 매년 증가 추세 다. 2012년 기준으로 119 구급차를 이용해 응급실에 내원한 환자는 2만7823명이고, 그 중 15~64살 환자가 42.6%나 되고, 이들 환 자의 8.9%만이 기존에 심장질환을 앓고 있 었다. 이 통계는 구급대원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된 경우만 집계한 것이고 실제 발생한 급성심장정지 환자 수는 그 이상이어서, 심 장마비로 인한 사망자가 교통사고 사망자보 다 더 많다고 한다. 다시 말해 평소 심장질환 없이 겉으로 멀쩡한 사람도 심장마비의 위험 에 노출돼 있는 것이다.
롯데 구단은 초기에는 임수혁 선수의 치 료비를 부담했지만 사고 뒤 2년이 넘어가자 더 이상의 치료비 부담에 난색을 표했다. 임 수혁 선수 가족은 롯데리아 운영권이나 롯 데그룹의 매장 일부를 임대해주면 여기서 나온 수익금으로 치료비와 가족의 생계비를 알아서 충당하겠다고 했지만 롯데 구단은 거부했다. 당초 임수혁 선수 가족은 롯데 구 단을 상대로 한 법적 대응을 원하지 않았지 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국프로야구선수 협회를 통해 내가 근무하던 선수협회 자문 로펌에 법률 지원을 요청했다.
통 큰 모습 보여주지 못한 구단
이거야 원, 도대체 어떻게 임수혁 선수가 얼마나 살지를 예상해서 간병비를 계산하고 (이 경우 보통 소송 절차에서 여명(餘命) 감정 을 하는데, 아무리 예측치라지만 산 사람을 앞에 두고 언제 죽을지 말하는 것은 잔인하 다), 임수혁 선수가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해 서 얼마를 벌 수 있을지 예상해서 금액을 계 산해야 하나. 에휴. 가족이 제시한 안이 합리 적이고 모양새도 딱 좋겠건만. 롯데 구단은 최동원 선수의 경우에도 그랬듯 통 큰 모습
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금은 관람석 수가 5천 석 이상인 운동장에 심폐소생 응급장비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응급의료법이 개정됐지만 당시에는 구체적인 기준도 없었다.
2003년 4월16일, 소멸시효 만료일을 며칠 앞두고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에 민사조정 신청을 제기했다. 스포츠 활동의 특성상 신체적 접촉뿐 아니라 자신의 능력 이상을 발휘하기 바라는 승부욕과 투지, 경기의 분위기에 따라 안전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구단은 선수들이 경기 중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사전에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경기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할 경우에 대비해 충분한 시설과 인력을 배치하고 안전사고 대책을 세워야 함에도, 당시 구단은 이러한 의무를 소홀히 한 채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를 실시할 만한 장비나 인력을 전혀 확보하지 않아서 결국 임수혁 선수가 현재까지 식물인간 상태에 있게 됐다는 것이 주된 주장이었다. 소송은 사건이 우호적으로 종결되기를 원하는 가족의 의사 등을 고려해 서로 치고받는 정식 소송 대신 ‘조정’ 신청 형식을 취했고, 사고 구장이 잠실인 점을 고려해 롯데 이외에 LG도 피고에 포함시켰다.
재판부는 심정적으로는 임수혁 선수의 처지에 동조하는 분위기였지만, 법률적으로는 어느 범위까지 응급처치를 실시할 장비와 인력을 확보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외국의 사례도 중요할 것으로 보여서 시합이 열리는 구장에 의사와 간호사가 대기한다는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노조의 확인서와 일본프로야구선수회의 확인서도 제출했다. 결국 법원은 롯데 등이 2억2천만원을 지급하는 조정안을 제시했고, 양쪽 모두 조정안을 수용해 재판은 일단락됐다.
임수혁 선수가 신영록 선수를 살렸다…
임수혁 선수가 쓰러진 지 만 10년이 지난 2011년 5월, 축구장에도 똑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종합경기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제주 유나이티드의 신영록(당시 24살) 선수가 갑자기 그라운드에 쓰러진 것이다. 다행히 임수혁 선수 사건 이후 심폐소생술을 배웠던 제주 축구단 트레이너가 신영록 선수에게 심폐소생술을 바로 실시한 뒤 병원에 이송해 일부 언론에서는 “임수혁 선수가 신영록 선수를 살렸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5월 어버이날을 앞두고 신영록 선수가 장애인복지관에서 재활훈련을 하는 TV 영상을 보니 아직까지는 야외에서 독립 보행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마도 이송 과정에서 응급조치가 최상의 상태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뇌기능 중 일부 운동기능이 손상을 입었고 당분간 재활훈련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도 임 선수와 비교하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조금만 더 최상의 응급조치를 받았으면 장애 정도가 줄었을 텐데 싶어 아쉽다.
임수혁 선수와 신영록 선수 사건은 심장마비가 발생했을 때 응급조치의 중요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장애인 발생 원인을 살펴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보통 심장마비가 발생하면 삶과 죽음의 길 두 가지만 생각하는데, 중간에 장애인의 길도 있다.
우리나라에 등록된 장애인 중 90%는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후천적 요인에 의한 경우다. 인생의 어느 지점까지는 장애를 갖지 않고 살다가도, 두 선수와 같이 한순간에 장애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예비 장애인’이다. 응급조치는 무조건 빨라야 한다. 아주 늦으면 죽고, 조금 늦으면 1분 늦을 때마다 장애가 점점 늘어난다. 응급조치 시설과 인력에 대한 비용을 최대한 지출해서 당사자와 가족이 겪는 막막하고 고단한 삶을 조금이라도 더 막아야 한다.
2010년 2월7일 임수혁 선수는 만 9년 동안 자신을 힘들게 간병해온 가족을 뒤로한 채 41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상훈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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