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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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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 원정대가 떴다

새 글러브 ‘헐크’를 품은 이유
등록 2016-10-09 11:59 수정 2020-05-03 04:28
트로피를 받고 기뻐하는 ‘아현동 핵주먹’과 관장님 모습. 김지숙 <한겨레> 기자

트로피를 받고 기뻐하는 ‘아현동 핵주먹’과 관장님 모습. 김지숙 <한겨레> 기자

아직 뙤약볕이 정수리를 쪼아대던 8월20일, 서울 공덕동 S복싱스쿨 회원들이 경기도 안산으로 원정을 떠났다. 선수 넷, 코치진 둘, 응원단 둘, 취재진(?) 한 명으로 구성된 ‘공덕 원정대’의 출정 목표는 바로 수도권생활체육복싱대회!

시합날 아침까지 계체량을 맞추지 못했다는 참가 선수 정원씨는 안산으로 가는 지하철에 앉아 먹지도 못할 빵봉지에 연신 머리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았다. 마치 뇌로 빵을 먹는 듯한 그 모습이 얼마나 인상적이던지. 정원씨와 함께 유일한 여성 참가자인 ‘아현동 핵주먹’은 계체를 마치자마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카메라를 향해 브이(V)자를 그려 보였다. 10kg 이상 더 나가는 상대와 맞붙게 된 20대 안군도 계체를 마치자 배고프다며 돈가스 한 접시를 싹 비웠다.

이런 태평한 선수들과 달리 긴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관장님이었다. 하긴 수도권생활체육복싱협회 소속 체육관 8곳에서 50여 명의 선수가 참가했다고 하니 체육관별 자존심을 건 대결 아니겠는가.

경기는 2분 2라운드. 토너먼트 예선을 통과하면 결선에 오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공덕 원정대’ 첫 경기는 막내 19살 태영군이었다. 경기 전에는 조금 긴장한 듯 보이더니 링 위에 오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상대를 제압하고 가볍게 예선을 통과했다.

복스! 주심의 목소리에 ‘공덕’의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됐다. 두 선수가 인사차 글러브를 부딪치고 떼자마자 안군의 카운터가 제대로 들어가 맞았다. “그렇지.” 세컨드(경기 중 선수를 돌보는 사람)를 보는 관장님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스파링 때와는 다른 주먹들이 쏟아졌다. 마치 2배속을 해놓은 듯 빠르고 강한 펀치들이 오갔다. 경기 시작 1분 만에 상대 선수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다시 30초 뒤 깔끔한 원투에 이어 훅이 들어갔다. 주심이 두 선수를 갈라놓고 카운팅을 시작했다. 몸무게에서 열세였지만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 쳐. 계속 쳐.” 관장님이 난타를 주문하자 상대편 세컨드는 “계속 걸어야 돼. 상대도 똑같이 지쳤어”라고 맞받아쳤다. 2라운드도 안군의 우세로 예선전 통과.

여성부 경기는 ‘공덕 원정대’끼리 맞붙었다. 다른 체육관 여성 참가자가 뒤늦게 출전을 포기해서 결국 둘이 경기를 치르게 됐다. 관장님과 코치님이 다른 코너에 서서 각자 세컨드를 봤다. 도대체 누굴 응원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는 상황. 평소 같이 운동하는 사이니까 좀 느슨하지 않을까 했는데 웬걸 둘 다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링이 울리기 무섭게 ‘잽잽 투’로 선제 공격을 날린 아현동 핵주먹이 승리자가 됐다.

5전 전승, 그제야 관장님 표정이 다시 살아났다. 체육관으로 돌아오는 길 ‘공덕 원정대’의 손에는 트로피가 들려 있었다. 직접 링 위에 오른 것도 아닌데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며칠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 글러브를 검색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날 이후 버킷리스트에 조심스레 ‘백사장 복싱대회’를 적었다. 내년엔 나도 대회에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일단 ‘헐크’를 샀다. 새 글러브 이름이다. 초록색이라 헐크다. 물건에 이름 붙일 나이는 지났지만 손에 끼는 순간 호랑이 기운이 절로 솟아날 만한 이름 아닌가.

김지숙 디지털뉴스팀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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