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게 두드려 맞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복싱을 시작한 이상 안 맞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스포츠의 핵심이 ‘많이 때리고, 덜 맞기’인 것을 고려하면 일단 덜 맞기는 대실패. 맞는 것도 훈련이라는 측면에선 훌륭한 시작을 끊었다. 복싱장 드나든 지 3개월 만에 링 위에 올랐다. 첫 스파링을 했다. 그날 링 위에 오르기 전까지 나는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사람 때리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분명 관장님은 헤드기어를 씌우며 그렇게 말했다. 평소보다 큰 글러브가 손을 감쌌다. 헤드기어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머리가 조여오고 시야각은 좁아졌다. 심장이 머릿속으로 들어온 듯 온몸이 두근거렸다.
첫 번째 상대는 우리 체육관의 문지기. 그를 거치지 않고서는 스파링이 시작되지 않는다고 했다. 경기시간 3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글러브끼리 맞부딪치자 스파링이 시작됐다. 어차피 기술은 안 되니 ‘깡’으로 덤벼보라는 조언이 귀에 꽂혔다. 어찌됐든 배운 대로 들이댔다. 잽, 잽, 원투, 잽 훅, 쓱 빵…. “어, 이 언니 주먹 장난 아니야.” 당연히 유효타는 거의 없었다. 수시로 맞고 있는 건 내 쪽인데, 상대의 그 한마디가 용기를 줬다.
어떻게 2라운드가 지났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끝나 있었다. 다음 스파링은 ‘문지기 동생’과 복싱장의 에이스. 이들의 격투는 그야말로 치열했다. 지켜보는 사람이 연신 입을 가리게 만드는 펀치들이 오갔다. 잠시 뒤 나는 또 링에 오르기로 돼 있었다. 바로 복싱장 에이스와 2차 스파링. 그의 실력을 눈앞에서 자세히 보니 공포가 스멀스멀 몸을 휘감았다. 몇 분 뒤 저 주먹을 받아내고 있을 사람이 바로 내가 될 거란 생각은 그를 더 두려운 상대로 만들고 있었다.
에이스는 붉은색 글러브를, 나는 파란색 글러브를 끼고 인사를 나눴다. 쿵쾅대던 심장도 링에 들어서자 잦아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심장 따위 두근거리는지도 몰랐다는 편에 가까울 것이다. 연신 날아오는 펀치 피하랴, 도망 다니랴, 되지도 않는 주먹 휘두르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지극히 당연한 말일지 모르겠으나, 자꾸 얻어맞으니 한 대라도 더 때리고 싶어졌다. 본능적으로 그의 오른쪽 팔을 잡고 훅을 쳤다. 반칙이었다. 무의식적인 반칙도 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스파링 후반부로 들어서자 관장님이 에이스한테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때려, 연타로!” 배신감이 엄습했다. 때리는 연습이라더니 맞는 연습이었구나. “10초 남았습니다.” 이 말을 신호탄으로 연타가 날아들었다. 결국 명치에 인상적인 어퍼컷이 꽂히고 종이 울렸다.
청춘영화에 흔히 그런 장면이 나온다. 놀이터 같은 데서 서로 주먹질을 하다가 바닥에 쓰러져 서로 웃으며 우정을 확인하는 장면. 도통 이해가 안 갔었는데 그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주먹을 나누고 나니 최선을 다해준 상대가 고맙게 느껴지고, 친근감까지 들었다. 경기가 끝나고 서로 포옹하는 건 그냥 의식적인 인사가 아니었구나. 링에서 내려와 흥분과 감동에 젖어 마우스피스까지 맞춰버렸다. 그나저나 다음 스파링은 어쩌지. 벌써 두렵다.
김지숙 디지털부문 기자 suoop@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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