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침하게 흐린 품이 비가 올 듯한 날이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날만 흐렸다. 그날은 그러니까 첫 타석부터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오랜만에 입맛에 딱 맞는 투수였다. 어슬렁거리는 투구폼에서 날아오는 공은 대체로 무릎에서 가슴 사이에 일정하게 도착점이 형성됐고, 무엇보다 빠르지 않았다. 사회인 야구에선 드물게 안정적인 로케이션을 가진 투수였다. 떨어지는 변화구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정어정한 궤적이 치기 나빠 보이지 않았다.
첫 타석부터 나쁘지 않았다. 날아오는 공이 무릎 앞에서 수박까지는 아니어도 멜론처럼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다. 코치가 일러준 대로 중심이동을 원만하게 못할 바엔 아예 중심을 오른 무릎에 완전히 싣고 타석에서 기다렸다. 잔뜩 웅크린 폼을 홀로 상기하며, 요새 자주 놀림거리가 되곤 하는 이대형 선수의 그 타격폼을 새삼 상기했다. 공을 치기도 전에 1루로 달리고 싶단 듯 열려버렸던 그의 자세는 중심을 뒤에 그리고 낮게 두며 상당히 개선됐고, ‘이대형 3할 치는 소리’라던 일부 팬들의 조롱은 추억이 됐다.
3구인가, 4구 약간 낮은 공을 휘둘렀다. 됐다. 맞았다. 중력이 옴 붙어서 도저히 떠오르지 않던 공이 내야를 훌쩍 건너 중견수 앞에 떨어졌다. 최근 중시되는 지표대로 말해보면, ‘타구 속도’(Exit Velocity)가 기막힌 타구였다. 타구 속도는 왜 중요한가, 강하고 정확하게 맞았단 의미다. 소 뒷걸음치다 개구리 잡은 안타가 아니라 뒷무릎에서 출발한 나의 타격 의지가 허리 회전과 손목을 거쳐 그대로 공을 관통했다는 소리다.
두 번째 타석도 깔끔했다. 3루수와 유격수가 동시에 쳐다봤지만, 둘 다 한 발도 뗄 수 없는 자리를 빠르게 뚫고 지나갔다. 타이밍이 조금 늦었다 싶었지만, 야수의 정면을 향하지 않는 자리에 총알처럼 때려내면 안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오늘은 또 이렇게 2안타 게임인가.’ 가뿐히 1루에 올라섰는데, 뭔가 조금 주저됐다. 왜 슬픈 순간은 그렇게 잠깐의 예감으로 먼저 찾아오는가.
그날, 포지션은 좌익수였다. 익숙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이상하게 몸이 가뿐했다. 날아오는 공을 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황은 2아웃에 주자 2·3루였다. 5:3으로 지고 있었고, 수비수들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타자와 맞서고 있는 우리 팀 투수의 외로움도 떠올랐다. 큰 타구였다. 코너 외야수가 가장 잡기 힘든 타구는 라인 밖으로 휘어져나가는 플라이다. 낙구 지점을 포착하기 어렵고, 타구는 생각보다 늘 더 뻗어나가기 마련이다.
그 타구가 딱 그랬다. 조금 뛰어가면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스타트를 끊었는데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 타구를 잡는다면, 얼마나 근사할 것인가. 의식하지 못했지만 아마 뜀박질에 신이 묻어 있었을 거다. 족히 20m 이상은 재게 달렸을까, 날아오는 공의 위치와 발걸음의 간격이 최대치로 좁혀졌을 때 갑자기 펜스가 청천벽력처럼 닥쳤다. 쿠션이라곤 조금도 없는 철조망 펜스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아니, 멈춰야 할 이유를 생각하기엔 너무 빨리 와 있었다.
글러브가 공을 잡고, 철조망 펜스가 나를 잡았다. 쓰러졌다. 무릎은 뜨끈뜨끈했고, 얼굴은 화끈했다. 기적에 가까운 수비를 했다는 기쁨을 어찌해보기도 전에, 모여든 사람들이 두리번두리번 상태를 살폈다. 일어날 수 없었다. 그래도 심판은 분명 아웃 콜을 했겠지. 이닝은 끝난 거지. 하늘이 그저 까맣게 보이는 상황에서 한 선배가 손가락 2개를 펴곤 보이느냐 물었다. 어룽어룽했지만, 분명 2개였다. 안타를 2개나 치고 이런 플라이볼을 잡았는데도 왜 일어서질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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