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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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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주먹’이면 어떠랴

왼발 나가며 왼 주먹 ‘스텝 밟기’ 나만의 강시춤 세계에 빠지기
등록 2016-05-04 21:20 수정 2020-05-03 04:28
김지숙

김지숙

모든 게 알리 때문이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쏴라.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는 분명 사뿐사뿐, 살랑살랑 링 위를 누볐다. 그 현란한 스텝은 이 사람이 춤을 추는지 권투를 하는지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발놀림은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경쾌했고 쉬워 보였다. 사실 중요한 걸 깜빡 잊고 있었다. 그가 천재이고 전설이라는 것.

“자, 이제 뒷발의 뒤꿈치는 항상 바닥에서 떨어져 있어야 해요.” 서울 마포 S복싱스쿨 김동리 관장과 함께 전신거울 앞에 섰다. 오서독스(오른손잡이) 스탠스는 왼발이 앞쪽, 오른발이 뒤쪽에 위치한다. 왼쪽 주먹은 가볍게 쥐어 왼쪽 광대뼈 앞에, 오른손은 오른쪽 턱에 붙였다. 상체도 기본자세가 갖춰졌다. 김 관장의 포즈를 그대로 따라했지만 거울 속 내 모습은 뭔가 한참 부족해 보였다. “항상 가드 잊지 마시고, 가볍게 앞뒤로 뛰어볼게요.” 뒤꿈치를 살짝 든 오른발은 땅을 차는 느낌으로 점프하란다.

잽, 잽, 원투. 가장 기본이 되는 잽 동작은 왼발을 앞으로 차고 나가며 왼손 주먹을 날리는 것이다. 오른 주먹을 쭉 뻗는 것이 스트레이트. 잽과 스트레이트를 이어 원투라 한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의 주인공 홍수환 선수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4전5기 신화가 원투 스트레이트로 이뤄졌으며 제대로 된 원투가 챔피언을 만들어준다고 했다. 이제 막 숫자를 배우는 아이처럼 입으로 원투, 원투를 내뱉으며 스텝을 밟았다. 어깨 넓이였던 보폭은 스텝을 뛸 때마다 점점 좁아지고, 바닥에서 떠 있어야 할 오른쪽 발은 자꾸 가라앉았다. 발바닥에 불이 날 때까지 점프가 이어졌다.

그런데 자세의 문제라기보다 좀더 근본적으로 이 몸짓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뭔가 굉장히 어색한 움직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깨달았다. 왜, 어째서, 복싱은 같은 쪽 손발이 함께 움직이는 것일까. 테니스, 볼링, 야구, 마라톤, 학창 시절 익혔던 행진까지. 팔다리는 늘 교차로 움직여왔다. 그렇다. 너무도 유명한 알리의 스텝 때문에 실제 복싱의 풋워크가 부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걸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날 복싱의 최대 난제는 스텝도 스텝이거니와 체육관 한 면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전신거울이었다. 뻣뻣한 몸통에 잔뜩 긴장한 어깨, 콩콩거리는 점프는 영락없이 추억의 중국 영화 속 ‘강시’였다. 거울에 비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한 동작이 끝날 때마다 절로 웃음이 비어져나왔다. 입술을 앙다물고 그만 웃어야지 다짐하면서도 낄낄, 지켜보는 관장님의 시선이 민망하여 낄낄, ‘강시춤’ 작명이 딱 들어맞는다며 또 낄낄. 하긴 골프도 힘 빼는 데만 3년이 걸린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야 해요.” 거울 앞에서 머뭇대는 모습을 본 김 관장이 조언했다. 복서들은 어째서 모두 명언제조기인가. 링 위에 올라가면 모든 책임을 선수 혼자 지게 되어 있다. 화려하지만 고독하다. 관중의 함성과 시선을 신경 쓴다면 시합이 시작되기도 전에 패배할 것이다. 비록 어설프게 쥔 주먹 때문에 ‘바보 주먹’이라 놀림받고 남들 보기 민망한 강시 스텝을 밟고 있지만, 강시춤이면 어떻고 바보 주먹이면 어떠랴. 일단 다른 사람의 시선을 걷어버리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나보자.

김지숙 디지털부문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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