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내들은 왜 자꾸 서로를 부둥켜안을까? 일요일 오후 텔레비전 채널 선택권을 박탈당하던 어린 시절에 자주 했던 생각이다. 왜 그땐 일요일 오후만 되면 그렇게 복싱 중계를 자주 했는지. ‘빰빠라 밤빠라 밤 빠라 밤~’ 복싱 중계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던 시그널 뮤직, 은 당시 어린 나에겐 지루함을 예고하는 음악이었다. 만화나 드라마를 볼 기회를 뺏긴 어린이는 멍하니 아버지 옆에서 경기를 보며 또 생각했다. 쟤들 되게 힘들어 보인다.
“이미 하고 있는데도, 하기 싫어.” 애초에 ‘복싱 바람’을 넣었던 C선배가 옆에서 줄넘기를 하며 외쳤다. 그렇다. 걷기만 해도 지치는 삼복더위에 일부러 땀을 내며 움직이는 것은 하고 있으면서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줄넘기를 하며 별별 생각을 다한다. 주로 하는 생각은 바로 ‘도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라는 근원적인 의문.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운동한 적 없어 말하기 민망하지만, 이런 것이 바로 ‘슬럼프’가 아닐까?
이런 내적 갈등을 간파당한 것인가. “두 분 헤드기어와 글러브 끼세요.” 친분 있는 C선배와는 한사코 스파링을 거부해왔건만 관장님은 기어코 우리 두 사람을 마주 세웠다. “오늘은 접근전 연습할 거예요. 가드 바짝 올리고, 상대의 빈틈을 노려 훅과 어퍼로 공격하세요.”
우리의 왼발은 안쪽을 마주한 채 줄넘기로 묶였다. 발이 묶이자 상체가 거의 맞붙은 상태가 됐다. 팔꿈치가 거의 붙을 정도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자, 빼꼼한 틈 사이로 상대의 눈이 보였다. 처음엔 눈이 마주쳐서 낄낄댔지만 두어 번 주먹이 오가다보니 어느새 우리의 눈빛은 진지해져 있었다. 상대의 훅 공격을 막는 것과 동시에 빈틈에 어퍼를 날려야 하는 상황이니, 상대가 어떤 주먹을 낼지 초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맨날 ‘스파링은 무섭다’더니 이 사람 라이트 훅이 장난이 아니다.
3분씩 2라운드가 후딱 지나가고 상대를 바꿔 2라운드를 더 연습했다. 발이 묶여 있으니 뒤로 피할 수도 없고 날아오는 주먹을 고스란히 막아내야 했다. 펀치가 꽂힐 때마다 뒷발이 무너졌다. “하체에 힘을 딱 주고 버텨. 밀리지 말고.” 관장님의 주문은 오늘도 내 뉴런을 스쳐 지나가고, 한 대라도 덜 맞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에도 오른발이 속절없이 흔들리더니 결국 볼썽사납게 나가떨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때였다. 어릴 적 복싱 중계에서 선수들이 자꾸 상대방을 껴안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클린치, 접근전에서 상대방의 맹공에 불리해질 경우 재빨리 상대의 팔이나 팔꿈치를 껴안고 방어하는 방법.
행동심리학자들은 사람의 ‘개인적 영역’을 보통 50cm라고 말한다. 친밀한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이 거리에 낯선 인물이 불쑥 들어오면 ‘사랑’ 혹은 ‘사고’가 일어난다. 가드를 맞붙인 그때 상대와의 거리는 5cm 미만. 우리가 나눈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눈앞에 날아오는 주먹 앞에선 그저 무념무상, 슬럼프고 뭐고 생각할 짬이 없었다. 주마등처럼 지나간 깨달음은 하나였다. 일단 안고 보자.
※참고 기사: ‘마법의 50cm… 사랑 혹은 사고가 나는 거리,’
김지숙 디지털부문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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