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피하기만 해선 이길 수 없어

방어의 포인트는 눈 감지 않고 빈 곳 노리기
등록 2016-06-17 17:15 수정 2020-05-03 04:28

그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대낮에 20대 남자가 한 여학생을 도서관에서 무차별 폭행하고 있었다. 학교 선배인 자신을 무시하고 제대로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남자는 도서관까지 300m 넘는 거리를 쫓아와 여학생에게 손발을 마구 휘둘렀다. 여학생은 놀라서 뒷걸음쳤지만 순식간에 날아드는 주먹을 미처 피하지는 못했다. 내가 그 여학생이었다면 어땠을까? 잠시 동안 소름 끼치는 상상이 이어졌다.
사각 링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줄이 걸렸다. 각 코너에 묶인 흰 줄은 링의 정중앙에서 엇갈렸다. “이 줄이 상대의 주먹이라 생각하고 피하는 거예요.” 관장님이 줄을 머리 위로 넘기며 살랑살랑 시범을 보였다. 실컷 두드려 맞은 첫 스파링 뒤 방어 기술을 배웠다. ‘위빙’(weaving)은 상대의 훅 공격을 피하는 기술이다. 무릎을 가볍게 굽히며 상체를 낮춰 상대의 주먹을 머리 위로 흘려보내는 동작이다.

위빙 연습을 하다보면 뒤뚱거리는 오리가 되기 일쑤다. 한겨레 김지숙 기자

위빙 연습을 하다보면 뒤뚱거리는 오리가 되기 일쑤다. 한겨레 김지숙 기자

첫날은 거울 앞에서 연습했다. 무릎을 굽히는 동시에 왼쪽, 오른쪽 번갈아 스텝을 밟자 영락없이 뒤뚱거리는 한 마리의 오리가 되어버렸다. 관장님은 의외로 “위빙의 천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날 링 위에 올라 하얀 줄까지 걸어놓고 위빙 연습을 하고 있자니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기분이 으쓱했다. 정수리를 살짝 스치는 상대의 주먹(실제로는 링 위의 줄)이 느껴지고, 귀에서는 영화 의 주제곡이 흘렀다. 빠밤빰, 빠밤빰.

그래서 피하는 건 잘할 줄 알았다. 두 번째 스파링도 예고 없이 찾아왔다. 상대는 동갑내기 남성. 나보다 늦게 들어온 이였다. 그를 상대로 훅이랑 어퍼랑 위빙도 연습해보리라. “남성분은 힘의 20%, 여성분은 60%만 쓰세요.” 처음엔 상대가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더 두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가 그보다 단 며칠이라도 복싱을 더 배웠으니 조금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만이었다.

그가 구사하는 잽잽 원투에 나는 속수무책 당하고 있었다. 스텝이 멈추고 숨이 가빠올수록 상대의 체구는 더 크게 느껴졌다. 곧이어 “김지숙 회원님, 힘을 100%로!” 관장님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미 100%로 하고 있다고는 말 못했다. 단 한 차례 그의 주먹을 피하는 위빙을 한 뒤 오른쪽 훅을 명중시켰다. 그때 깨달았다. 방어의 포인트는 피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빈틈을 노리는 데 있다는 것을.

만약 도서관 그 자리에 내가 서 있었다면 한 번은 방어할 수 있었을까. 맞을 각오와 피할 준비를 하고 링 위에 섰을 때도 물리적 힘의 차이를 실감하고 적잖이 당황했다. 실제 상황이라면 쫄지 않을 자신이 없다. 복싱을 경험한 적 없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어떨까.

지난해 파퀴아오와 ‘세기의 대결’을 벌인 복싱선수 메이웨더는 ‘방어술의 대가’로 불린다.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하도 상대의 공격을 잘 피해 ‘미꾸라지’라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그의 독보적 아웃복싱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바로 시선이다. 그는 끝까지 상대의 주먹에서 눈을 놓지 않는다. 일단 이것부터 연습하면 어떨까. 불가피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눈 감지 않는 것. 필요 이상 겁먹지 말 것.

김지숙 디지털부문 기자 suoop@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 캠페인 기간 중 정기구독 신청하신 분들을 위해 한겨레21 기자들의 1:1 자소서 첨삭 외 다양한 혜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