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텐텐주 파티가 끝난 뒤

등록 2009-05-07 11:55 수정 2020-05-03 04:25
텐텐주 파티가 끝난 뒤

텐텐주 파티가 끝난 뒤

직업별 음주량을 체크해보면 어떤 직종이 최고의 주량을 자랑할까? 아무래도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의 주량이 제일 많을 듯하지만, 범위를 사무직 혹은 전문직으로 국한한다면 아마도 기자와 더불어 검사가 수위를 달리지 않을까.

그렇다. 내가 아는 검사들 상당수는 대단한 주량을 자랑한다. 예전 법조팀에 근무할 때의 경험에 바탕해보면, 검사들은 1차에서 고기를 굽거나 한정식을 들며 소주를 각 한 병가량씩 마시고 인근 카페로 2차를 가서 폭탄주 10여 잔을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이것은 평균이 그렇다는 말이고, 차수가 늘어나거나 같은 자리에서도 더 많이 마시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검사들의 주량을 처음 체감한 것은 법조팀에 근무하기 전 사회부 사건기자로 일할 때였다. 2006년 초 어느 날 여차저차한 이유로 K부장검사·L검사와 저녁을 함께하게 됐다. 나는 짝을 맞춘다며 내게 배속돼 있던 수습기자 P를 데리고 눈 쌓인 길을 종종걸음으로 걸어 약속 장소인 한정식집에 도착했다. 따뜻한 구들장에 앉아 엉덩이를 녹이고 있는데 곧 폭탄주가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K부장검사의 취향은 이른바 ‘텐텐주’. 양주잔에 양주 반절, 맥주잔에도 맥주 반절을 넣어 만든 ‘5부 폭탄’이 표준이었건만, 그는 양주잔에 양주를 가득 따르더니 그 잔이 담긴 맥주잔에 맥주도 가득 따르는 ‘10부 폭탄’을 제조했다. (텐텐주는 박만 전 서울지검 1차장 검사가 주로 애용하던 방식이라는 이유로 검찰 안에서는 ‘바크만주’로 불리고, 경찰에서는 강희락 경찰청장이 즐기는 방식이라고 해 ‘희락주’라는 이름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그렇게 텐텐주가 돌았고, 나 또한 질 수 없다며 같은 방식의 텐텐주를 빚어 돌렸다. L검사와 P수습기자도 차례로 ‘병권’(폭탄주를 만드는 역할을 일컫는 은어)을 행사해 폭탄주를 만들어 돌렸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양손은 뒷짐을 진 채 어금니로 맥주잔을 물고 고개를 들어 폭탄주를 들이켜는 ‘병아리주’ 등 다양한 음주 기법이 소개되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불콰하게 술에 취했고 주변을 살펴보니 바닥을 비운 양주 2병이 눈에 띄었다. 빈 맥주병도 가득 널브러져 있었다. 비틀걸음으로 한정식집을 나서는데 찬바람이 매서웠다.

사단은 며칠 뒤 일어났다. 주량이 약했던 P가 그날 주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 받아먹더니 결국 몸에서 탈이 난 것이다. 한밤중에 병원에 실려간 P는 십이지장에 염증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딸 걱정에 P의 어머니는 회사에 전화를 걸어 “기자 하려면 꼭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야만 하냐”는 하소연을 했다. 전화를 받은 선배는 내게 전화를 걸어 “얼마나 먹였기에 회사로 이런 전화가 오게 하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량이 적은 후배를 미리 챙겨야 했건만 내 잘못이 컸다. 지금도 회사에서 P를 마주치면 그때 생각에 미안한 마음부터 든다. 그래도 기자 하려면 술도 좀 마셔야지, 안 그래? P기자.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