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은 어디선가 “배가 불러야 시도 나온다”고 했다. 쿵 하는 천둥소리처럼, 이 얼마나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통찰인가? 고은의 그 어떤 향기로운 시보다도 깊은, ‘한마디의 번뜩이는 시’라고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늘 배가 고팠다. 굶은 적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늘 배는 고팠다.
전라도 산촌 마을에서 몇 마지기의 논을 일구며 살았던 우리 집은 겨울 한철 내내 고구마·감자와 함께 큰방에서 잠을 잤다. 아버지는 방 한구석에 대나무로 얼기설기 빙 둘러 엮은 울타리를 만든 뒤, 그 속에 가을밭에서 캐낸 고구마와 감자를 가득 쟁여놓았다. 큰방 고구마·감자 창고는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았다. 우리 식구는 전깃불 아래서 ‘야식’으로 고구마며 감자를 먹으며 1970년대 말 겨울밤을 보냈다. 겨울 산촌 마을에서 늦은 저녁은 이미 ‘심야’였다. 점심 끼니로 먹은 쌀밥의 힘이 떨어질 때쯤 되면 어머니는 고구마를 한 바가지 꺼내 가마솥에 삶았다. 아무리 목이 메기 십상인 고구마나 감자도 겨울 김치를 곁들이거나 국물이 흥건한 싱건지(동치미)를 한입 베어물면 금방 소화되고 속이 편안했다.
큰방에서 아버지는 술추렴으로 막걸리를 드셨다. 당시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한 달씩 돌아가며 막걸리 밀주를 만들어 팔았다. 막걸리 고객이래 봐야 동네 30여 가구에 불과했다. 어머니가 됫병짜리 소주병에 막걸리를 넣고 마개 대신 병 주둥이에 종이를 꾹꾹 눌러 틀어막으면 내가 배달에 나섰다.
우리 동네에도 전방(廛房·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가게. 흔히 ‘전빵’으로 발음)은 있었다. 그런데 전방 주인이 물건을 팔면서 셈을 치를 때 간혹 동전이 가게 툇마루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구르던 몇 개의 동전은 바닥 나무 틈 사이로 빠져 떨어졌다. 툇마루 아래는 닭장이었다. 떨어진 동전들은 닭똥에 섞여 전방 주인 집 비탈밭의 퇴비로 뿌려졌고, 이 밭에 가 여기저기 흙을 파헤치다 보면 운 좋게 10원짜리, 50원짜리 동전을 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주운 동전으로 그 전방에 가 사탕을 사 먹기도 했다. 고구마를 먹은 뒤 밤에 마당으로 나와 빨아먹은 사탕은 겨울밤 하늘의 별똥별처럼 빛났던 ‘야식’이었을까?
그랬다. 당시 몇몇 동네 할머니들은 꼬맹이들한테 “배 꺼질라, 뛰지 마라”고 살짝 호통치기도 했다. 운동장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난 뒤 여기저기 뒹구는 돌멩이를 괜히 차대던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고구마며 감자며 겨울철에도 먹을 건 많았다. 마을 밭 어디에서든 얼어붙은 땅을 뚫고 시리게 싹을 피워낸, 고소하고 달착지근한 봄동(겨울 내내 자라는 봄배추)을 캐먹을 수 있었다. 여름철이면 논두렁 물길이든 시냇물가든 미나리가 지천이었다. 지금 아내는 나를 ‘염소’라고 부른다. 배추·봄동·상추·미나리 같은 ‘풀’이 상에 오르면 내가 다 먹어치운다. 제풀에 생각해도 나는 영락없이 밥상머리에 앉은 한 마리 염소다.
엊그제 밤늦게 퇴근해 집에 들어가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둘러앉아 삶은 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언제부턴가 내가 고구마를 입에 대지 않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언제부터였을까? 고구마에 진력을 내기 시작한 때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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