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별꼴이다. 방금 칼국수를 저녁 식사로 두둑이 먹고 와 심야생태보고서를 쓰겠다며 인터넷에서 한 사진과 글을 보는데 군침을 흘려버렸다. 그러면서 나는 확신했다. 사진 속 음식이 언급되지 않고서 반도의 심야생태 지도는 완성되기 어렵다. 이 음식을 소개할 땐 꼭 이렇게 말하고 싶다. “미안하다, 뽀그리다.”
라면을 기대한 이에게 진짜 미안하단 뜻은 아니다. 되레 사과는 뽀그리가 받아야 한다. 뽀그리는 라면이 아니다. 뽀그리를 라면이라고 하는 건 파리를 새라 하고, 옆집 영식이를 ‘공식아’라고, 가수 이문세를 이달세(달=moon)씨라 부는 것과 비슷하다. 뽀그리는 온전히 뽀그리다.
군대 시절이었다. 뭘 해도 궁상맞고 어색한 이등병 계급장을 떼고 일병을 달았다. 5월이었다. 그러니까 여자친구는 떠났다. 일병 다는 것까지만 보듬어줘야 한다고 오래전 ‘연애세부시행규칙’(모든 부대는 전투세부시행규칙을 대외비로 갖고 있다)을 짜왔던 것처럼 그녀는 박진했다.
그날 새벽 2시께 위병소 야간근무를 섰다. 5월의 춘천, 소쿠리로 퍼담아 뿌린 듯한 별들로 어지러웠다. 부사수는 탈영을 생각하지 않았다, 일병은 이젠 일병다워야 한다며 울지도 않았다, 고 말해도 될까. 사수한테 여자친구와 헤어진 얘길 미주알고주알 했다. 헤어지자는 말에 까닭도 묻지 않았단 걸 쿨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을 할수록 자꾸만 까닭이 사무쳤다. 사수는 근무가 끝난 새벽 복판에 제 관물대에서 라면 두 개를 꺼내와 뽀그리를 해줬다.
그는 라면을 크게 뽀개고 조심스레 봉지를 뜯어 분말 스프와 건더기 스프를 넣고 방정맞게 흔들었다. 그리고 봉지 반에 차도록 뜨거운 물을 더 조심스레 붓고 고무줄로 터진 입을 조였다. 이후 3~4분을 기다리는 숙달된 고참의 조리 과정은 경건했다. 마법 같았다. 면은 생색내지 않고, 오밀조밀 제 몸을 풀어헤쳐 매콤히 홍조를 띠고 있었다. 국물 한 방울 버릴 게 없었다. 생전 처음 맛본 뽀그리는 그렇게 이별도 견디는 힘이 되었다.
뽀그리가 숨어 있던 식탐을 깨운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60kg를 오가던 몸무게가 복무 중에 68kg까지 늘었다. 한겨울 새벽 경계근무 뒤 위장에 털어넣은 뽀그리, 뽀그리를 먹고 피운 담배 한 개비, 뽀그리를 먹고 마신 소주 한잔은 어떤 라면보다, 어떤 담배보다, 어떤 술 한잔보다 달았다. 뽀그리가 고참들만 자유롭게 해먹을 수 있는 계급 음식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 군은 훈련 대신 뽀그리로 인해 전투력이 약해지거나 강해졌을 것이다.
이제 세상이 건네주는 ‘위로’는 많다. 먹을 것도 많다. 그러나 나는 다시 60kg이 되었고, 뽀그리처럼 ‘간편한 위로’가 더 절실한 나이가 되었다.
포털에 뽀그리를 치니 한 분의 글이 검색되었다. “그냥 생각이 나서 삼실에서 해먹었다. 뽀그리… 군 제대하고 먹으면 맛없다고 하던데, 흠~ 괜찮더만.” 지난 2월16일의 글이다. 그때 나는 군침을 삼키고 말았던 것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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