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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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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안주, 두부

등록 2010-02-03 14:55 수정 2020-05-03 04:25
겸손한 안주, 두부. 한겨레 자료

겸손한 안주, 두부. 한겨레 자료

지난호 심야생태보고서 ‘미스터 2200원’은 침을 꼴딱꼴딱 삼키면서 읽었다. 어릴 적 막걸리 심부름을 다니면서 몰래 홀짝거렸던 정인환 기자는 “노란빛이 곱게 바랜 주전자와 함께 논두렁 밭두렁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고 썼다. 나, 안다. 내게도 첫 술은 막걸리였다.

막걸리와 궁합이 잘 맞는 안주는 뭘까. 두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생두부, 노릇노릇한 부침 두부가 제격이다. 도토리묵이나 빈대떡, 제육볶음도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맛이 강해 막걸리 고유의 맛과 향을 누른다. 두부는 자극적이지 않다. 막걸리 맛을 풍부하게 해준다. 아래로 깔리면서 은근하게 받쳐준다. 겸손한 안주다.

집에서도 흔히 먹을 수 있어서인지 아니면 별로 이문이 남지 않아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기술이 들어갈 여지가 별로 없다고 여겨서인지는 몰라도, 두부 전문점이 아니면 두부 요리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의외로 적다. 메뉴판에 아예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단골집이 필요하다. 덜 바쁜 시간에 가면 “사장님, 점점 젊어지시네요” 한마디로 없는 메뉴를 부탁할 수도 있다.

즐겨가는 집은 회사 근처 효창공원 앞 허름한 식당이었다. 공사장 인부들이 밥을 대놓고 먹는 집이었는데, 몸도 맘도 넉넉한 이 집 사장님의 두부부침 솜씨가 예술이었다. 두부 끝에 젓가락을 대면 홍해처럼 쫙 갈라진다. 두툼하지만 속까지 알맞게 익는다. 푸딩보다 부드럽고 치즈보다 고소했다. 두부 한 점에 막걸리 한 모금, “인생 뭐 있어?”가 절로 나왔다.

‘두부부침의 달인’이던 그 사장님이 식당을 접은 뒤, 그 맛을 잊지 못해 집에서 시도해봤다. 번번이 실패했다. 두부튀김이 돼버린 적도 있었다. 너무 두껍게 썰면 깊은 곳에 온기가 닿지 않았다. 프라이팬의 가열 정도, 불의 세기, 식용유의 양, 뒤집는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다 잘 들어맞으면 비슷한 때깔은 나도 그 맛은 아니었다. 같은 재료로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요리에도 ‘짬밥’ 차이는 뛰어넘을 수 없었다. ‘프라이팬의 달인’이 될 때까지 도전할 수밖에.

두부와 사랑에 빠진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해남 땅끝마을 이모집 옆에 두부 공장이 있었다. 말이 두부 공장이지 가내수공업에 가까운, 그래서 네모반듯하게 예쁜 두부를 만들지 못해 바가지로 퍼서 파는 집이었다. 막 굳어지기 시작한 몽글몽글한 하얀 덩어리. 간장에 살짝 찍어먹던 그 맛은 최고였다. 교사였던 이모부는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것”이라며 막걸리를 따라주셨다. 사발 바닥에 깔리는 수준이었지만 으쓱해졌다. 공식적으로는 첫 데뷔 무대였다. 그때도 막걸리와 두부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산이 좋아 산 밑에 살다 보니 주변에 괜찮은 두부집이 많아 좋다. 두부에도 먹는 순서가 있다. 생두부를 먼저 먹는다. 순수하다. 다음 두부부침. 고소하다. 마지막은 두부찌개로 마무리한다. 칼칼하다. 술은 역시 막걸리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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