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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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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가장 쓰라린 닭볶음탕

등록 2009-11-18 15:58 수정 2020-05-03 04:25
내 인생 가장 쓰라린 닭볶음탕. <한겨레21> 조혜정 기자

내 인생 가장 쓰라린 닭볶음탕. <한겨레21> 조혜정 기자

공자는 음식을 먹을 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食不語) 음식 맛을 제대로 알고 먹은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나는(아마 다른 많은 이들도) 누구와 먹느냐, 무슨 얘기를 나누느냐도 음식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누군가를 위해 손수 음식을 만들 땐 상대가 맛있게 먹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도 한다.

찬바람 부는 날은 유독 쓸쓸하다. 그럴 땐 대책 없이 무너져도 좋을 믿음직한 벗과 나누는 소주만 한 처방전이 없다. 바로 그때 내가 준비하는 안주가 닭볶음탕이다. 먹어본 이들이 “회사 관두고 닭볶음탕 가게를 차려라”며 감동하고, 몹시도 입이 짧은 나의 동거인조차 배를 두드리면서도 “더 달라”고 했을 만큼 실패한 적 없는 메뉴다.

정해진 레시피는 없다. 그때그때 내 기분, 함께 먹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간장을 더 넣거나 고춧가루를 덜 넣거나 하는 식이다. 다만 설탕은 쓰지 않는다. 단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설탕의 초절정 단맛은 혀끝에 닿는 순간 어쩐지 ‘악마의 키스’ 같다는, 순전히 주관적인 불쾌감이 드는 탓이다. 그 대신 양파를 넉넉히 넣는다. 양파를 익히면 매운맛은 날아가고 단맛만 남는다는 건 상식.

내 닭볶음탕에 없는 또 하나는 닭의 껍질이다. 쫄깃한 식감 때문에 닭껍질 마니아도 은근히 많지만, 난 이타적인 체형 탓에 지방 덩어리인 닭껍질을 함부로 먹을 처지가 못 된다. 껍질을 벗겨내면 양념에 기름이 뜨지 않아 좀더 담백한 맛도 난다. 닭을 살 때 주인장께 “껍질은 벗겨주세요”라고 부탁하면 된다. 뼈 바르는 걸 귀찮아하는 이와 함께 먹을 땐 아예 닭가슴살이나 다리살, 안심 등 부분육을 쓰기도 한다.

감자 대신 넣는 단호박은 내 닭볶음탕이 호평받는 가장 큰 이유다. 단호박은 감자보다 식감이 차지고 부드러운 단맛이 나기 때문에 매운 닭볶음탕의 양념과 무척 잘 어울린다. 씨를 다 파낸 뒤 한입 크기로 잘라 닭과 함께 처음부터 익히면 된다. 손으로 눌렀을 때 손톱이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녀석이 신선한데, 이런 단호박은 칼질도 쉽지 않아 손을 다치지 않도록 신경써야 한다.

지난 주말, 26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이가 찾아왔다. 나는 17년 동안 사랑한 남자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에 가슴이 무너진 터였다. 예의 닭볶음탕에 청양고추를 잔뜩 넣어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 남자의 열애 소식을 전하는 방정맞은 연예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1분 간격으로 한숨 한 자락 내쉬고 소주 한 잔씩을 들이부었다. 나를 지켜보던 지인이 입을 열었다. “대체 몇 살인데 이래?” 그동안 내가 그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설명했지만, 지인은 남은 양념에 밥을 비벼 먹을 때까지 “으이구~”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청양고추 탓인지, 내 스스로 생각해도 철딱서니 없고 웃겨서인지 속이 쓰려왔다.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설레고 가슴 뛰던 17년을 그렇게 닭볶음탕과 함께 씹어삼켰다. 여태 먹었던 닭볶음탕 가운데 가장 쓰라린 맛이었다. 굿바이, 장동건. ㅠ.ㅠ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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