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대학 시절 하숙 생활을 2년쯤 했다. 두 사람이 한방을 쓰면 위계가 생긴다. ‘방장’이 있고, ‘방졸’이 있다. 나는 항상 방졸이었다. 이상하게도 방장은 늘 고시준비생이었다. 첫 방장은 사법고시생. 그는 밥 먹을 때마다 후루룩 쩝쩝 음냐음냐 소리를 냈다. 더러워 미치는 줄 알았다. 두 번째 방장도 사법고시생. 그는 낮에 잠을 잤다. 밤에 포커를 쳤다. 나는 정말 잠을 자고 싶었다.
(결국 자취 생활을 결행하게 만든) 마지막 방장은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는 과자에 몰입했다. 2평 남짓 좁은 하숙방에 과자 봉지 두어 개를 펼친다. 손으로 과자를 집어 우적우적 먹는다. 책을 읽는 것도,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음악을 듣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열심히 과자만 먹었다. 먹어보라는 말도 없이 혼자 다 먹는 그의 행태가 괘씸했던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려니 가슴이 떨린다. 그렇다. 나는 과자를 같이 먹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옆에 누운 방졸의 욕망에 새우깡 부스러기만큼도 관심 없는 그가 관료가 된들 누구를, 무엇을 위해 일하겠는가. 과자를 주지 않은 죄로 그는 밤마다 내 소리 없는 저주를 받았다.
30대 중반의 어느 날, 잠재의식의 한켠에 기생하고 있던 과자 몰입 고시생이 나를 자극했다. 이제 과자는 이루고 싶은 게 여전히 많은데 나이만 먹어가는 30대 후반의 작은 사치가 됐다.
금요일 밤, 마감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동네 슈퍼에서 과자를 산다. 귀한 휴일의 새벽이 올 때까지 과자를 먹으며, 히스토리·디스커버리·ESPN 채널을 돌린다(가끔 야한 채널도 ‘지나친다’). 박지성은 또 결장했으나 이청용이 분투하고 있다. 수성에는 메탄 비가 내리고, 태양 흑점 폭풍이 지구 오존층을 위협하고 있다. 그랬거나 말거나 남녀는 색을 탐한다.
그리고 내 곁에는 오사쯔 고구마, 꿀짱구, 감자깡 그리고 오징어땅콩이 있다. 오사쯔는 입안에서 녹는다. 몸 전체가 가라앉는 안온함이다. 고구마 맛을 (흉내)내는 과자 가운데 최고다. 꿀짱구의 매력은 녹지 않는 데 있다. 씹어돌려야 단맛이 난다. 그리고 다시 감자깡을 뜯는다. 포테토칩과 달리 짜지 않다. 단맛으로 비릿해진 혀를 탄수화물의 정직한 느낌으로 헹구어준다. 마지막은 언제나 오징어땅콩이다. 전쟁 같았던 지난주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부수는 통쾌함으로 새벽을 맞는다. 오징어 맛은 도대체 어떻게 (흉내)내는 걸까 고민하다 잠이 든다. 과자에는 사이다가 제격이다. 혈관마다 퍼져 심장마비의 지뢰를 설치하는 통쾌한 자학의 느낌이 최고다.
나는 ‘고시생’이라는 인종을 불신했다. 후루룩 쩝쩝 고시생, 포커 중독 고시생, 과자 몰입 고시생이 권력을 쥔다면, 세상 정말 갑갑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세상이 갑갑한 걸 보니, 혹시 그들이 덜컥 고시에 붙어버린 게 아닐까 의심이 든다. 오직 한 가지,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만큼은 공감이 된다. 영혼의 불안을 다독이지 못하면 무엇에건 집착하게 된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무얼까, 곰곰 생각하며 싸구려 과자를 먹는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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