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만이었을까. 서울 명동의 ‘섬’을 찾았다. 한동안 떠다니는 섬처럼 살았다. 물이 차면 한 개의 섬이 내 곁에 있었고, 잠을 깨면 그 섬은 또다시 환상 속으로 사라졌다.
거의 10년 만에 낡은 미닫이문을 열고 섬에 도착했다. 저마다 기억하는 전설은 달랐지만, 모든 섬은 하나의 전설로 남았다. 나는 전인권과 담배 연기, 커트 코베인의 안개 낀 음성으로 섬을 떠올렸다. 동행한 선배 K는 김민기와 김광석으로 섬을 추억했다.
섬은 과거를 묻지 않는다. 섬은 과거를 기억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김광석과 정태춘을 목놓아 부를 수 있는 곳이 섬이다. 그러다 가끔 운이 좋으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쏘는 사람이 있어 섬은 참 정겹다.
선배 K는 김민기의 를 노래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열광했다. 노랫가락에 몸을 맡긴 그들이 “뭐든지 다 시켜”라고 했을 때,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나는 말했다. “통닭.” 나는 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명동의 외딴섬에서 “통닭”을 외치는 행위는 명동 한복판에서 헤드폰 끼고 70데시벨짜리 이단옆방귀 뀌는 짓이라는 걸. 그래도 추운 겨울밤이면 사무치게 그리운 그 이름, 통닭.
시도 때도 없이 통닭을 외치게 된 것은 이 음식의 저주받은 구성과 관련이 있다. 통닭은 피자와 다른 것처럼 족발과도 다르다. 낙지볶음과 다르고, 제육볶음과 다르며, 김치찌개, 계란말이, 오징어, 땅콩, 노가리, 번데기, 대구포, 햄·소시지, 황도, 마른 안주 등 세상의 모든 술안주와 다르다. 통닭을 빼면 어떤 술안주도 계급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 망할 놈의 통닭만은 다르다. 다리와 날개, 가슴살, 엉덩이, 목 등 부위별로 튀겨나오는 통닭은 취객을 철저히 줄 세운다. 지금까지 외길 육식 인생을 살아왔지만, 통닭 앞에서 당당히 “나는 엉덩이살이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을 못 봤다. 통통한 닭다리, 쫄깃한 닭날개야말로 모든 육식인의 로망이다. 마리당 각 2개밖에 없는 닭다리와 닭날개는 서열에 따라 배분되는 것이 상식이었고, 모두가 동급일 때 힘의 논리가 서열을 대신했다.
유독 늦된 아이로 자랐던 나에게는 더욱 그랬다. 집안 식구가 모여살던 시절 닭다리는 언감생심이었다. 군대에서도 후임병이 없었던 탓에 닭다리 맛을 잃어버릴 뻔했다. 대학 졸업 이후 마침내 ‘독립’을 이뤘을 때 배달된 통닭 한 마리를 온전히 독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즐거움이었다.
나에게 통닭은 고독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치명적 야식이다. 캔맥주를 곁들인 통닭의 즐거움을 탐닉할수록 주말에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렵지 않았다. 외딴섬에서 통닭의 노예로 길들여졌던 셈이다. 금요일 자정을 향해 초침이 맹렬히 달려가고 있는 지금, 나는 빨리 통닭이 기다리고 있는 그 섬에 가고 싶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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