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99% 정도 떨어질 때쯤, 우울 모드로 딱 진입하기 직전, 나를 웃음짓게 만들 달달한 초콜릿 같은 것은 다름 아닌 ‘춤 영화’ 보기였다. 줄거리나 주인공은 전혀 상관없다. 어떤 혹평을 얻은 영화라도, 난 그 안에 춤을 추는 장면이 많기만 하면 됐다.
춤 영화를 보는 것은 어느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아도 됐기에, 아마 춤으로 보낸 시간 가운데서도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었을 테다. 무한 외박을 누렸던 대학 시절, 밤 12시가 다 되어도 어두운 노래의 가사만 귀에 착착 감기고, 눈을 꼭 감을수록 정신은 말똥말똥해져 도무지 잠들지 못할 태세라면 준비 모드에 돌입해야 했다.
1편에 3천원, 2편에 5천원짜리 비디오방에 단단히 옷을 껴입고- 혼자 가면 여름에도 춥다- 들어선다. 삼각김밥 2개와 음료수는 필수다. 혼자 볼 영화인데 뭘 저렇게 뚫어져라 고르나 하는 단골 비디오방 파트타이머의 눈길에도 아랑곳 않고 나는 주저앉아 비디오가 진열된 선반 가장 밑부터 샅샅이 뒤진다. 좀 촌스러워 보이는 비디오방은 DVD가 아닌 비디오를 갖추고 있어서, 좀 지나간 영화를 찾다 보면 의외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등은 비디오방을 헤매던 나의 눈에 딱 걸렸던 그 작품들!
엔도르핀 생성에 춤 영화 감상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해준 ‘작품’은 다. 아마도 초등학교쯤이었을 테다. 당시 는 밤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까지 방영해 좀처럼 영화를 끝까지 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내 마음을 단번에 빼앗았다. 좀 심란해 보이는 미스코리아 머리를 하고 마룻바닥을 휘젓다가 오디션 심사위원들이 손을 얹어놓은 책상 위로 올라가 보란 듯이 춤을 췄던 그. 낮에는 용접공, 밤에는 클럽 댄서로 일하다 무용가로 성공하는 알렉스는 나의 로망이었다. 영어의 A도 모르던 때, 주제가인 중 알아듣는 가사라고는 ‘왓 어 필링’뿐이었지만 끝없이 흥얼거리며 다녔다.
그 뒤로 2~3년의 시간이 흘렀을까? 발레는 배웠지만, 정작 제대로 된 발레 공연은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던 나는 를 만났다. 여기에 나온 남자 주인공들의 춤을 보고 ‘남자도 춤을 저렇게 아름답게 출 수 있구나’ 했다. 발레에, 탭댄스에 영화 속에 이어지는 춤의 향연을 보던 나는 웃다가 울었다. “와, 좋다” 하면서.
아직도 춤 영화는 나를 흔들어놓는다. 케이블TV에 지겹게 나오는 춤 영화 는 이제 5번은 족히 본 듯하지만, 나는 여전히 2시간을 꼬박 바치고야 만다. 이 영화들이 나를 들뜨게 하는 이유는 예전과 조금 달라졌다.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라고 꿈을 꿨던 아이는 이제 ‘저렇게 살았더라면…’ 하고 아쉬워한다. 남자아이가 탄광촌에서 발레리노의 꿈을 키워 성공한다는 줄거리의 주인공 ‘빌리’의 모습은 이제 내가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아닌 판타지가 돼버렸다. 그래도 춤추며 울고 웃는 빌리의 모습을 나는 다시 찾는다. 판타지여도 괜찮다. 잠시라도 꿈꿀 수 있다면.
이정연 기자 한겨레 경제부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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