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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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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발소리

등록 2010-03-19 10:58 수정 2020-05-03 04:26

‘심야생태보고서’ 코너를 만든 취지는 말 그대로 기자들의 밤 생활을 독자에게 살짝 엿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이순혁 기자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들로 시작해 음주와 가무 편을 지나 각 기자들의 달콤쌉싸래한 야식의 추억으로 이어진 이 코너는 꽤 인기를 끌었다. 반면 음주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시선을 탓하는 독자도 있었다. 그런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애초 취지에 따라 마감날마다 반복되는 편집국의 밤 풍경을 살짝 보여드리는 것으로 심야생태보고서 마지막회를 갈음하려 한다.

2010년 3월11일 밤 편집국. 밤 12시를 넘기자 편집장 P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기자들은 컴퓨터 자판을 더 열심히 두드린다. 그날 출고된 기사들에 대한 데스킹이 마무리되면 P는 더 이상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몇몇 기자에게 ‘맥주 한잔’을 유혹한다. 다음날 기사를 출고해야 하는 바쁜 기자들은 제외다. 그래서 다들 바쁜 척하는 것이다.
이날은 A와 Z와 I가 걸려든다. 단골로 걸리던 S는 밤 12시도 되기 전에 사라졌다. 아마도 집에서 부인과 함께 굴전을 부쳐먹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단골 낙점자 H도 이날 밤 12시를 넘겨 새벽 일찍(?) 귀가했다. 전날 과도한 음주를 한 탓이다. 집에서 만삭의 아내와 함께 간짬뽕으로 속풀이를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P와 A와 Z와 I는 회사 앞 호프집에 자리를 잡는다. “딱 30분만!”을 외친 뒤 맥주를 마시기 시작한다. P는 말을 많이 하는 걸 싫어하는 성격으로, 술을 매개로 해야만 소통이 원만해지는 괴벽을 갖고 있다. 취기가 돌면 말문이 좀 트이기도 하고,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주고받는 수작(酬酌)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진다고 믿는 부류다. 또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눈과 귀가 밝아지고 생각이 자유분방해져, 대화 속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길어올리기도 한단다. 실제 의 표지를 장식했던 기사 가운데는 그렇게 태어난 것도 꽤 있다. 이날도 P는 술자리 대화를 통해 몇 가지 아이디어를 건졌다고 즐거워한다. 사무실에서는 짜증을 내며 기사 마감을 닦달하고 술집에 데려와서는 기사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P와 더불어 수작하기 즐기는 기자는 별로 없다.
그래서 Z가 솔직히 말한다. 밤 12시를 넘어 P의 어슬렁거리는 발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왜 자판을 더 두드리게 되는지, 그리고 P에게 낚인 몇몇이 자리를 뜨고 나면 남은 기자들이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심야생태보고서에 이런 걸 쓰란 말이에요.” P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심야생태보고서 마지막회에 쓸 이야기가 마땅히 없었던 차다.
집이 먼 A는 “집에 가서 영어 자료를 읽을 게 있다”며 먼저 가방을 챙긴다(평소에 보이지 않던 행동이다). 요즘 부쩍 외로움을 타는 듯한 Z와 I는 마구 ‘달릴’ 태세다. P는 그만 일어서고 싶은데, 좀처럼 그런 일이 없는 I가 이날따라 더 있으라고 붙잡는다. 어느덧 새벽 2시께. P를 구해준 건 그때까지 기사를 쓰다가 귀갓길에 잠시 들른 B. 그에게 바통을 넘긴 P는 뒤통수에 ‘술 마시자고 꼬드길 때는 언제고 먼저 가기냐?’라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사무실로 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또 하나의 밤을 탈고한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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