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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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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의 귀향, 그러나 딸에겐 국적이 없네


사우디서 8년, 한국서 12년 일하다 돌아간 방글라데시인 무띠의 비애…
‘한국에서 낳은 아이’에 국적 안 주고 가족들 현지 재적응도 험난
등록 2009-12-02 17:12 수정 2020-05-03 04:25
노동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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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이야기
경기 남양주시 마석가구공단에는 중국 동포와 몽골인, 필리핀인, 방글라데시인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하지만 단속에 대한 극심한 공포 때문에 자신의 문화를 길거리에서 누리기가 쉽지 않다.
우리 공장의 방글라데시 동료들은 소시지와 김치찌개, 자장면을 먹지 않는다.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이슬람 율법 때문이다. 이주 노동자들은 공장에서는 한국 음식을 먹지만, 자신의 집에서는 고국의 음식을 해먹으며 향수를 달랜다. 공장 동료 피우롱과 페드로, 내 방 건너편에 사는 로미의 방을 찾았을 때 맛난 방글라데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고국에 있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고된 노동을 견딘다. 공단에서 형이나 친인척과 함께 머물며 일하는 노동자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가족노동‘의 형태다. 이들에게는 자식을 잘 가르치고 먹이고 키우는 것이 하나의 지상과제다.
세상 어디든 남녀 간의 사랑은 있어, 이곳 공단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필로이는 지금의 필리핀인 아내를 그렇게 만났다.
일하고 생활하는 환경이 폐쇄적인 까닭에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한국말이 서툴다. 그들에게 ’힘들어’가 노동과 단속 걱정에 찌든 몸의 언어라면, ’괜찮아’는 나와 남을 위로하는 마음의 언어다.



글 싣는 순서
제1부 안산 난로공장

작업 라인의 노예
4천원의 삶과 행복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2부 서울 갈빗집과 인천 감자탕집
언제나 젖은 앞치마
몰락 가장의 부인과 올드미스
사장님, 손님, 남편님

제3부 마석 가구공장

톱밥 더미에 갇힌 꿈
빠빠, 마마 그리고 겐드라노나
③ 13살 노동자의 귀환, 그리고…
지난 11월11일 20여 년에 걸친 이주노동을 잠시 접고 방글라데시의 가족 품으로 돌아간 무띠가 마석가구공단 안 자신의 셋집에서 딸 파티마의 사진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그는 서울 망우리에서 태어난 하나뿐인 딸을 한국은 물론 방글라데시 정부도 받아주지 않아 국제 미아가 되게 생겼다고 걱정했다.

지난 11월11일 20여 년에 걸친 이주노동을 잠시 접고 방글라데시의 가족 품으로 돌아간 무띠가 마석가구공단 안 자신의 셋집에서 딸 파티마의 사진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그는 서울 망우리에서 태어난 하나뿐인 딸을 한국은 물론 방글라데시 정부도 받아주지 않아 국제 미아가 되게 생겼다고 걱정했다.

‘노동’이라는 열차의 종착역은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이다. 이주노동자건 한국인 노동자건 결론은 다르지 않다. 노동 그 자체가 목적인 삶은 피곤할 것이다. 하지만 칙칙폭폭 달려가는 노동의 목적지가 같다고 해서 출발역이 동일한 건 아니다. 마석가구공단에서 만난 방글라데시 노동자 무띠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배움과 보살핌의 우산 아래 머물러야 할 나이에 일찌감치 노동의 시장에 자신을 내어놓고 돈을 벌어왔다. 그의 삶에는 저개발 국가에 태어난 이유로 국경을 넘어 몸을 팔아야 하는 아시아 노동자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 있다. 그 후유증 또한 만만찮다.

89년 콧수염 붙이고 사우디행

1989년 봄, 한반도는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의 포옹 사진이 가져다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고, 미국은 흑인 성직자와의 키스신이 담긴 마돈나의 (Like A Prayer) 뮤직비디오가 논란이 되던 4월25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담맘의 다란 공항에 낮 12시30분 비행기 한 대가 멈췄다. 7시간 전 방글라데시 다카를 출발한 비행기의 바퀴가 멈추고 문이 열리면서 앳된 얼굴의 한 소년이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방글라데시 노동자 15명 중 유독 어려 보였다. 소년의 이름은 무띠, 당시 13살이었다. 그의 코 밑에는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콧수염이 달랑거렸다. 지난 10월 말 마석가구공단 안에 있는 셋집에서 만난 무띠는 “나이 들어 보이려고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수염을 달고 갔다”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어린 나이를 속이기 위해 여권도 위조했다. 실제 1976년생이라는 그의 여권을 보니 1966년생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가난한 가정환경 탓에 초등학교 과정을 3년 만에 그만두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노동의 세계로 나서는 참이었다.

무띠는 담맘의 한 대형병원에서 청소일을 맡았다. 450여 명이 일하는 병원에서 의료진은 모두 미국 사람이었고, 방글라데시와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온 노동자는 청소 등의 허드렛일을 맡았다. 오전 7시부터 시작된 청소일은 오후 3시께 끝났다. 그 뒤에도 미국인 의사의 집을 청소하거나 정원을 정리하는 잡무를 맡았다. 그렇게 일해서 고국에 있는 엄마와 두 누나, 형을 먹여살렸다.

7년 8개월의 고된 이주노동을 마치고 스무 살 되던 1997년 초 무띠는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 하지만 집은 여전히 어려웠다. 이듬해 6월 이번엔 한국 땅을 밟았다.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들어오기 위해 그는 브로커에게 1천만원을 지불했다. 경기 화성에서 휴대전화 케이스를 만드는 회사에 취직했는데, 오전 8시30분부터 11시간 일한 대가로 받은 월급은 고작 31만원. 한 푼도 안 쓰고 3년을 모아야 겨우 브로커 비용을 댈 수 있는 급여 수준으로, 아무리 계산기를 두들겨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1년여 뒤 경기 광주에 있는 종이상자 제작 공장으로 옮겼다. 월급이 70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2년 뒤 그는 한 달에 20만원을 더 받기로 하고 용인에 있는 다른 공장으로 옮겨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뼈빠지게 일했다. 수당까지 합하면 한 달에 130만원은 챙길 수 있었다.

이 공장에서 일할 때 그는 열한 살 어린 현재 아내 타냐와 ‘전화결혼’을 했다. 한국 정서상 전화로 결혼한다는 것이 우스갯소리 같지만, 자유연애를 터부시하는 무슬림에게는 익숙한 혼인 방식이다. 양쪽 부모가 자녀의 혼인을 결정하면,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녀가 전화기를 들고 몇 마디 나눈 뒤 부부가 된다. 마석가구공단에서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한 식당에서 가끔씩 전화 결혼식을 치른다. 이때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자리를 함께해 축제를 즐긴다. 오랜 이주노동의 역사를 가진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11월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아동권리국제포럼에 참석한 방글라데시 청소년 로이 손주 쿠마르(두 번째)와 사비쿤 나하 모니카(왼쪽 세번째)가 월드비전을 통해 결연한 한국 학생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들은 이날 포럼에서 방글라데시의 조혼 풍습과 아동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역설했다.

11월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아동권리국제포럼에 참석한 방글라데시 청소년 로이 손주 쿠마르(두 번째)와 사비쿤 나하 모니카(왼쪽 세번째)가 월드비전을 통해 결연한 한국 학생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들은 이날 포럼에서 방글라데시의 조혼 풍습과 아동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역설했다.

이듬해인 2005년 무띠는 1년 전 결혼한 아내 타냐의 얼굴을 처음 봤다. 이미 미등록 신분이 된 그를 따라 미등록 이주노동을 자청한 타냐가 관광 비자를 얻어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무띠는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한국에서의 첫 직장이었던 화성의 휴대전화 케이스 공장을 찾았다. 타냐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다. 임금인상 문제로 얼굴 붉히고 등 돌렸던 사장에게 “사장님, 미안해” 하고는 취직을 부탁했다.

어머니까지 사망, ‘고아’로 귀향

무띠는 90만원, 타냐는 80만원을 받기로 한 그 공장을 반년 만에 그만둔 건 오로지 본인의 양심 때문이었다. 공장의 남성 과장은 휴대전화 케이스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 플라스틱으로 남성 성기 모양을 만들어 타이와 베트남에서 온 여성 노동자들에게 들이댔다. 무띠는 사장에게 “우리 이슬람 사람이잖아요. 이런 거 안 돼”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사장은 “사람이 다 그렇지 뭐, 괜찮아 임마”라고 말했다.

공장을 그만둔 뒤 두 사람은 성남 모란시장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일했다. 거대한 비닐하우스 17개 동에서 자라는 상추와 겨자 등에 물과 농약을 줘 재배하고 틈틈이 수확해서 포장까지 했다. 그러던 중 2005년 12월22일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났다. 서울 중랑구 ㅈ산부인과에서 임신 39주 만에 태어난 딸 파티마는 무띠에게 삶의 전부가 됐다.

그들은 비닐하우스의 지독한 농약 냄새가 어린 딸의 건강에 좋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그 뒤 마석가구공단은 세 식구의 삶의 안식처가 됐다. 무띠는 마석의 다른 이주노동자들 대부분이 그렇듯 가구공장 도장반에서 샌딩일을 했다. 도장 작업 사이사이 샌딩기로 가구를 문지르고 빈 틈에는 사포를 들이댔다.

날이 갈수록 파티마는 쑥쑥 크는데, 미등록 노동자인 두 사람의 신분은 불안했다. 언제 단속반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새 정부 들어 단속은 갈수록 심해졌다. 마침내 오랜 노동의 대가로 다카에 작은 집을 하나 지었다. 그래서 지난해 9월께 타냐와 파티마는 먼저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 두 달 뒤 마석에는 거센 단속의 폭풍이 몰아쳤다.

무띠가 다카행 비행기에 오른 지난 11월1일은 이주노동자 삶에서 희망과 불안의 쌍곡선이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일단 방글라데시에 돌아가더라도 굵어 죽지 않겠다는 자신감과 희망이, ‘이대로 헤어져 살아도 내 가족이 온전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 깊은 곳의 불안이 그의 고국행을 부추겼다. 전화선 너머 파티마는 “아빠가 없어 안 좋아. 보고 싶어서 한국 갈래”라고 계속 칭얼댔다. 아버지를 다섯 살 때 여읜 데 이어 두 달 전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열세 살 때부터 이주노동을 해온 무띠는 그렇게 나이 찬 ‘고아’가 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방글라데시 법원 “한국서 낳은 딸은 한국인”

무엇보다 그의 고국행을 서두르게 한 요인은 하나뿐인 금지옥엽을 방글라데시 정부가 국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소식이었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타냐가 전하길, 방글라데시 정부는 파티마가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국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고 한단다. 출국 전 무띠는 ㅈ산부인과에서 발행한 영문 출생증명서를 내게 보여주면서, “출생증명서를 방글라데시 정부에 제출했는데 왜 인정할 수 없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가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거주한 지 오래된 미등록 이주 노동자의 자녀에게 체류 자격을 주는 것도 아니다. 무띠가 방글라데시에 가면 파티마는 ‘무국적자’를 벗어날 수 있을까?

무띠와 같은 날 같은 비행기로 방글라데시에 돌아간 조힐이 가족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펼쳐 보이고 있다.

무띠와 같은 날 같은 비행기로 방글라데시에 돌아간 조힐이 가족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펼쳐 보이고 있다.

“형, 어떡해. 법원에 갔어. 우리 파티마 방글라 사람 아니래.” 11월25일 전화선 너머 무띠가 어눌한 한국말로 말했다. 법원에서 파티마를 국민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상급법원까지 대여섯 번 찾아갔는데도 인정받지 못했다며 곤란함을 호소했다. 방글라데시 법원은 한국에서 낳은 아기니까 한국 사람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무띠는 내게 세 식구가 한국에 올 수 있는 서류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 잠시 뒤 타냐가 전화기를 낚아챘다. 그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내게 “형, 다른 데(나라)는 아기 거기서 낳으면 (영주권) 다 주는데, 한국은 왜 안 그래요?”라며 따졌다. 속지주의와 속인주의의 차이를 전화로 설명하려다 포기했다.

이들은 파티마보다 한 살 더 많은 알리프도 똑같은 처지에 있다고 전했다. 알리프의 엄마는 지난해 11월 마석가구공단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단속 때 출입국단속반원들에게 잡혔다. 엄마만 방글라데시로 강제출국당할 뻔했으나, 가구공단 사람들이 “엄마만 보내면 아기는 어떡하느냐”고 항의해 알리프도 함께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 742호 ‘아파도 아프지 마라, 마히아’ 참조). 그런데 알리프 역시 현지에서 방글라데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알리프의 아빠는 여전히 마석가구공단에서 일하고 있다.

타냐는 “신랑이 돌아오니까 좋다”면서도 “온 가족이 다시 한국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많은 이주노동자가 한국 사회에서 몇 년 동안 적응한 뒤 고국에 돌아가 겪는 재적응 스트레스를 그도 겪고 있었다. 특히 여성의 외부 활동이 자유롭지 않은 무슬림 사회에서 벗어나 외국 바람을 쐬어본 타냐로서는 더욱 그런 듯했다. “여자들 여기 안 좋아요. 계속 집에만 있어야 해요. 밖에도 잘 못 가고…. 우리나라 여자들 그래요. 한국 좋잖아요. 거기서는 일도 하고, 맛있는 것 먹고, 친구도 만났는데….” 타냐는 전화 말미에 파티마 문제를 다시 꺼냈다. “파티마 한국에서 낳았으니까 한국 아기예요. 형, 잘 생각해봐요.”

이주노동의 3막은 어디에서

무띠는 오로지 가난 때문에 어릴 적 배움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국제 이주노동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서야 그는 이주노동의 2막을 끝냈다. 3막은 언제 어디서 펼쳐질지 모른다. 그의 딸 파티마는 부모가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무국적자가 됐다. 수많은 아시아 민중이 이처럼 고단한 노동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도 아시아 국가다, 그나마 먹고살 만한….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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