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노동과 저임금 때문에 한국인 노동자들은 더 이상 찾지 않는 ‘노동의 섬’ 경기 남양주시 마석가구공단의 한 공장에 취직했다. 이곳의 부족한 노동력은 외국인 노동자가 대신 메우고 있다. 공장 안은 톱밥 먼지로 가득하다. 전기톱날 도는 소리에 귀가 멍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공장의 문을 늘 안에서 잠근 채 일한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단속하러 나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단속은 이들을 흔적도 없이 한반도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 같은 공포로 다가온다. 공장일은 고되다. 가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무거운 가구틀을 계속 이리저리 옮겨야 한다. 하루에 한두 번 들어오는 합판을 나르는 일은 장난이 아니다. 공장에는 자칫 실수하면 크게 다치기 쉬운 위험한 도구들도 널렸다. 기자도 압축공기로 스테이플러를 박는 ‘타카’를 다루다가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핀이 박히는 부상을 당했다. 이곳에선 누구나 거치는 통과의례다.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인과 비슷한 노동을 하더라도 더 적은 임금을 받는다. 체류 비자를 갖고 있지 못한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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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 출근한 지 이틀째 되는 날, 40대의 경상도 출신 여성 노동자가 내게 “처음엔 몽골에서 온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한국 사람이네”라고 말해 크게 웃은 적이 있다. 기른 지 한달이 넘은 내 콧수염을 보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그럴 법도 하다. 이 곳 마석가구공단에는 워낙 다양한 국적의 노동자들이 일한다. 필리핀과 방글라데시 출신이 대략 150∼200명, 네팔과 인도네시아 출신도 30∼40명 일하는 것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 밖에 중국 동포를 비롯해 타이, 몽골,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케냐 등지에서 온 사람들도 소수 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문화가 혼재돼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막상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모두들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단속에 전전긍긍하다 보니 자신의 방을 벗어난 공간에서는 이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게 무슬림들이다. 공단에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남성 무슬림들이 ‘뚜삐’라고 불리는 챙 없는 모자를 쓰고 거리를 어슬렁거린다. 인도네시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이다. 그들은 밤 9시30분께가 되면 공단의 모처에 모여 서쪽을 향해 절을 한다. 원래는 하루에 네 번씩 꼬박 절을 하는 게 이슬람의 율법이다. 하지만 모두 한국 사람인 공장 사장들이 낮 시간에 일하던 무슬림 노동자가 공구를 내려놓고 절하는 풍습을 용인할 리 없다. 그래서 공장 출근 전 한 번, 퇴근 뒤 한 번으로 줄었다는 게 방글라데시 친구들의 설명이다.
1. 그들이 자장면을 먹지 않는 까닭공장의 강도 높은 육체노동에 허덕이는 내게 유일한 복음은 식사 시간이었다. 배를 주리는 것도 아닌데, 숟가락만 들면 구멍난 장마철 둑방처럼 입맛이 폭발했다. 그렇게 허겁지겁 숟가락질을 하다 이상한 걸 발견했다. 10월10일 토요일의 일이다. 낮 12시30분이 되자 밥이 배달되기에 “오늘도 연장근무구나” 했다. 반찬으로 소시지가 나와 열심히 먹고 있는데 방글라데시 친구 3명이 따로 차려 먹는 밥상에는 소시지가 보이지 않았다. ‘맛있는 건 나눠먹자’는 평소의 소신대로 소시지를 주려 했더니 다른 동료가 말렸다. “저 친구들은 돼지고기가 들어간 건 안 먹는다고.” 흠, 무슬림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소시지에 돼지고기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순간 깜빡했다.
그 뒤로도 그들은 입에 척척 달라붙는 제육복음은 물론 김치찌개도 먹지 않았다. 그게 그들의 율법이었다. 그들이 타국 땅에서 종교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먹지 않을 권리만큼은 충분히 행사할 수 있다. 덕분에 나를 비롯한 한국인 노동자들은 돼지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공장을 그만두기 며칠 전에는 야근을 앞두고 중국음식점에서 볶음밥을 시켜먹었는데 또 방글라데시 친구들의 접시에는 밥만 있을 뿐 자장이 얹혀 있지 않았다. “어, 이거 잘못 나온 거 아냐?” 하다 아차 싶었다. “자장면에도 돼지고기가 들어가는구나.” 방글라데시 친구들은 그 맛있는 자장면도 먹지 않는 것이다.
공장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집에 가면 자기 나라 음식들을 다 해먹는다. 공단 안의 슈퍼마켓에서는 방글라데시나 필리핀 등지에서 공수해온 웬만한 음식 재료를 다 판다. 현지 물가보다 2배 이상 비싸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현지 음식 재료 장수가 탑차를 끌고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한다.
‘라우칭그리토르카리’와 소주공장을 그만둔 뒤 맞은 첫 번째 월요일, 내 앞방에 사는 방글라데시 출신 로미(가명)의 방에 들렀다. 방 안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프라이팬 위에 굵고 짧은 새우가 지글거렸다. 이어 그는 호박도 함께 볶더니 물과 함께 동남아 특유의 향신료를 넣고 다시 졸였다. 음식 이름은 ‘라우칭그리토르카리’라고 했다. ‘라우’는 호박, ‘칭그리’는 새우, ‘토르카리’는 탕이라는 뜻이란다. 즉, 한국말로 ‘호박새우탕’인 셈이다. 여기에 그들이 즐겨먹는 양고기 조림과 함께 소주를 내왔다. 그는 맛있게 먹는 내게 “형, 맛있어?”라고 계속 물었다. 그들이 한국 음식을 처음 먹을 때 입맛에 잘 맞지 않았던 것처럼, 대개의 한국 사람들도 동남아 음식에서 풍기는 특유의 향신료 냄새를 처음에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라우칭그리토르카리는 소주의 좋은 안주였다.
잠시 뒤 우리 공장 도장반에서 일하는 피우롱(가명)의 집에 갔다. 그가 사는 방도 역시 내가 사는 집처럼 한 건물 맨 꼭대기층의 조립식 건물에 있는 서너 평 남짓한 크기다. 피우롱은 우리 공장 목수간에서 일하는 페드로(가명)와 함께 산다. 둘이 지내면 외롭지도 않고 한 달 방값 등 각종 요금도 절반만 내면 되는 장점이 있다. 페드로도 요리를 즐기는데, 그는 모처럼 찾은 한국인 손님에게 밥과 함께 국물 요리인 ‘달’, 그리고 생선튀김과 소고기조림, 피클 종류를 내왔다. 물론 소주도 함께였다. 무슬림들은 원래 술을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술에서만큼은 율법의 적용을 보류한 무슬림들이 이곳 가구공단에는 적지 않다. 고된 노동 뒤 찾아오는 피로와 외로움을 이런 식으로라도 달래야 한다는 사실을 아마 알라신도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인샬라.
페드로도 계속 물었다. “맛있어?” “응, 맛있어.” 그는 전작이 있어 한 그릇을 미처 다 비우지 못한 내게 “왜 맛있는데 다 먹지 않느냐”고 추궁했다. 진짜 배가 불러서 못 먹는 건데. 내가 예전에 싱가포르, 인도, 중국같은 다른 아시아 나라로 출장갔을 때도 그쪽 음식을 다 잘 먹었다는 구차한 설명을 들은 뒤에야 그는 내가 자신의 음식을 정말 맛있게 먹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는 듯했다.
2. 방글라데시 총각들의 은밀한 사생활오로지 단속 걱정이 머리에 꽉 찬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별다른 취미생활이란 없다. 틈틈이 집에서 술 한잔 한다. 고기가 그리울 때 치킨집에 전화하면 공단 안까지 배달을 해준다. 피우롱은 “야근 안 하면 술 안 먹는데, 야근하고 힘들면 잠이 안 와서 소주 반병 아니 조금 더 먹고 잔다”고 했다. 요즘 월요일 빼고는 계속 야근인데…. 토요일 밤에는 페드로와 함께 공단 밖 치킨집에 가서 소주 한두 병을 먹고 들어온다. 공장을 그만둔 토요일 밤에도 출롱(가명)과 나를 포함해 모두 네 남자가 마석 시내에서 술을 한잔 했다. 내가 “오후 6시에 가자”고 했더니 피우롱이 “형, 9시에 가자, 단속할지 몰라” 그랬다. 이들은 단속이 두려워 일요일에도 낮 시간에는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밤 시간에는 고국에 있는 식구나 친구들과 인터넷 채팅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전화는 국제전화카드를 사서 쓴다. 페드로의 방을 처음 찾은 날도 그는 내가 방바닥에 앉은 뒤로도 계속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통화 중이었다. 이를 엿듣던 피우롱이 전했다. 페드로의 사촌동생이 방글라데시에서 의사가 됐다는 것이다. 그 나라에서도 의사는 돈 많이 버는 직업이라며 무척이나 기뻐했다. 잠시 뒤 우리는 축하의 잔을 나눴다.
사실 무엇보다 궁금했던 건 이들 총각의 성생활이었다. 10년 동안 공단에 틀어박혀 지내면서 성적 욕구를 어떻게 해결할까? 공단 안에는 미혼 여성들도 많지 않아 사귀기도 쉽잖을텐데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슬쩍 캐물을 때마다 그들은 말을 돌리거나 “‘알라신 사람들’ 그런 생각 안 한다”며 시치미를 뚝 뗐다. 내 총각 시절처럼 혼자서 해결하지 않을까 하는 성급한 결론을 내려본다. 남양주시외국인근로자복지센터의 한 직원은 호기심 어린 내 질문에 “일부 이주노동자들이 서울 근교 집창촌을 찾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대다수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마석 시내 술집에서 잔을 기울이던 때 페드로는 홀서빙 여직원과 자연스럽게 한국말로 대화하며 생글생글한 눈빛을 지었다. 내가 “형, 꼬시는거야?” 그랬더니 그는 자주 오는 술집이라 얼굴을 아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방글라데시 총각 셋 중에 가장 잘생긴 그의 눈가 주름이 그날따라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3. ‘가족노동’에 저당 잡힌 삶피우롱의 방을 찾았을 때다. 낯선 두 남자가 눈에 띄었다. 옆방에 산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가운데 한 명은 피우롱의 친형이고, 다른 한 명은 그의 매형이었다. 피우롱의 형이 먼저 한국에 온 뒤 그를 불러들였고, 그 다음에 매형이 뒤따라왔다. 그들이 방에 들락거리는 동안 피우롱과 페드로는 피우던 담배를 급히 끄고 소주잔을 감추곤 했다. 방글라데시에서도 윗사람에 대한 예의가 엄격하다고 했다. 더구나 알라신이 금지한 술과 담배를 입에 대고 있으니….
피우롱의 경우는 이주노동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어차피 자기 나라에 일거리도 많지 않고, 같은 양의 노동을 해도 한국에서는 서너 배 넘는 돈을 벌 수 있으니,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와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공장의 출롱도 마찬가지다. 10년 전 그는 4년제 대학 진학을 포기한 대신 먼저 마석가구공단에 와 일하던 친형의 뒤를 따라왔다. 형은 2년여 전 방글라데시로 먼저 돌아갔다. “빠빠·마마 다 힘든데, 빠빠가 몸이 힘들어서 그것 때문에 갔어”라고 출롱은 설명했다. 고국에 남은 다섯 식구를 그 혼자 벌어 먹여살린다. 그는 지난달에 야근 혹은 연장근무 17일이라는 살인적인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190여만원을 벌었다. 그 가운데 매달 80만∼90만원을 ‘나라’에 보낸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말하는 나라는 출신 국가를 말한다. 나머지 돈으로 방값을 내고 전기·수도·전화·케이블을 비롯해 최소한의 삶을 위해 필요한 비용을 치른다. 이제 날이 추워지니 한국보다 따뜻한 나라에서 온 그는 기름보일러를 열심히 때야 할 것이다.
이주노동은 이처럼 가족 가운데 여러 명이 와서 노동하거나, 고국에 남아 있는 나머지 가족들의 현재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젊은 시절을 저당 잡힌 채 노동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혼자만의 노동이 아닌 ‘가족노동’인 것이다.
아들·딸 잘되는 게 유일한 꿈인 마리아 누나
이들은 대부분 대가족 출신인데, 4남매인 출롱은 형제가 적은 편에 속한다. 피우롱과 페드로는 형제가 모두 7남매다. 필리핀 출신 마리아(가명) 누나는 무려 10남매 가운데 여섯째다. 마리아 누나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아들 한스(20)와 딸 아밀렌(19)이 잘되는 것이다. 특히 사랑스런 딸 아밀렌은 내년 4월이면 간호학 분야 대학을 마치는데 현재 한 병원에서 간호사 실습 중이다. 대학을 마치고 나면 미국 시민권이 있는 친척의 도움을 얻어 미국으로 이주할 계획이라고 한다. 누나도 아밀렌을 따라 미국으로 가 다시 딸의 뒷바라지를 하는 게 목표다.
“누나 너무 기대하지 마. 아밀렌도 결국 미국에서 남자랑 사귈 거 아냐. 매리지(결혼)할 수도 있잖아. 그럼 누나는 천덕꾸러기 될 거야. 알아, 천덕꾸러기? 누나가 아밀렌 눈치를 봐야 하고, 그럼 같이 살기 힘들 거야. 그렇잖아.”
그의 방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마리아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가족을 위해 일하지만 막상 가족과 함께하기는 어려운 게 이들의 처지다. 내 옆방에 사는 몽골 친구 뭉크(가명)는 고용허가제로 2007년 한국에 들어왔다. 그도 역시 다른 공장에서 도장일을 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특히 도장반에 근무하는 비율이 높은데, 그만큼 한국 노동자들이 그 분야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뭉크는 비자가 있는 등록 외국인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활은 미등록 외국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함께 사는 부인이 관광비자로 들어와 1년 넘게 ‘불법 체류’하는 탓이다. 유엔의 ‘이주노동자 권리 협약’은 모든 이주노동자에게 가족결합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물론 현실에선 쉽잖다.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들어온 노동자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은 없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거의 모든 선진국, 이른바 인력 수입국들은 이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노동자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눈길을 외면하는 건 오로지 국가와 법뿐이다.
맞벌이하려 이산가족 자청지난해 12월 마석가구공단을 취재하면서 처음 만난 뭉크는 태어난 지 두어 달 된 아들 랑고(가명)와 함께 공장 기숙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녀석을 볼 수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묻자 그는 “올해 4월 몽골에 보냈다”고 했다. 부인과 함께 둘이서 돈을 벌기 위해서다.
4.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타국에서 고립된 삶을 오래 견디기란 힘든 노릇이다. 그러다 보면 간혹 이 안에서 서로 눈이 맞는 짝들이 나온다. 그들도 사람이고, 피가 끓는 청춘이다.
우리 공장 인근의 신발공장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출신 필로이(34·가명)는 자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구나다르마대학 경제학 학사 출신이다. 그의 첫 직장은 경기 일산의 어느 책공장이었다. 프레스 기계로 종이 자르는 일을 했다. 한국말도 일도 잘 모르는 그에게 공장장은 “이 새끼, 저 새끼”라고 막말을 하며 빨리빨리 일하기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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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을 일하고도 한 달에 90만원을 받기로 한 월급은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현재의 공장으로 옮겼다. 그에게 맡겨진 일은 사출기계에 신발 밑창 재료인 플라스틱을 붓고, 틀에서 찍혀 나온 제품을 니퍼로 다듬어 다음 공정으로 넘기는 것이다. 그는 이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의 처는 필리핀 사람이다. 3년 전 서울 이태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석 달 전 사랑스런 딸 겐드라노나(가명)가 태어났다.
비자보다 사람을 먼저 볼 수는 없나필로이보다 한 달 늦게 한국에 와 마석가구공단에서 함께 일하던 친동생도 근방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던 아일랜드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 형제 모두가 한국에서 다른 나라 여자를 만나 국제결혼을 한 셈이다. 동생은 2007년 부인을 따라 아일랜드로 갔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고민과 고향에 대한 진한 향수를 넘어서는 건 부모와 형제자매를 먹여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이다. 이주노동자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가족을 만들기도 한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다’라는 간명한 진실은 그들이 여권 안에 한국 체류 비자를 갖고 있는지에만 쏠린 눈길을 조금만 거두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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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접한 마석가구공단의 이주노동자들이 자주 쓰는 말 가운데 인상적인 표현은 “힘들어”와 “괜찮아”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두 마디는 그들의 심경을 손쉽게 드러내는 무기다. 그 활용 범위는 매우 넓다. “힘들어”는 말 그대로 그들의 고단한 노동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몇 번씩 등장한다. 단속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장에서의 인간관계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도,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고국의 현실을 토로할 때도 “힘들어” 한마디면 상황이 정리된다. 나는 그들이 그 얘기를 할 때면 바로 이어 “힘들어” 하고 후렴을 넣어주곤 했다.
“괜찮아”는 “힘들어”에 뒤따르는 때가 많은데 주로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체념할 때나 스스로를 위로하는 용도로 쓰인다. 열악한 작업 환경 때문인지 몸이 아프다는 노동자에게 “어떻게 해?”라고 물어도 “괜찮아”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 말 뒤에는 “한국에서 돈 벌려면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이 숨어 있다. 이전 공장에서 수백만원의 임금을 받지 못했다는 이에게 “지방노동위원회에 제소라도 해봐”라고 얘기해도 “괜찮아, 형” 한다. “나는 ‘불법 사람’인데 어떻게 관공서를 찾아가 권리를 주장하겠어”라는 말이 그의 목구멍 바로 밑에서 다시 몸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즉 “힘들어”와 “괜찮아”에는 고단한 현실과 미등록 신분에 대한 좌절, 그럼에도 스스로를 위무하고 동료를 위안하려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두 마디만 갖고는 공장에서 생존하기 힘들다. 한국말은 이주노동자에게 큰 스트레스다. 한국말을 잘 못하면 스스로가 답답하기도 하지만, 공장에서도 차별받는다고 생각한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A는 “형, 우린 일도 잘해야 하고 한국말도 잘해야 해. 한국 사장들, 일 잘하는 것보다 한국말 잘하는 거 더 좋아해”라고 말했다. 같은 나라에서 온 로미도 “공장일 하려면 한국말 잘해야 해요. 한국말 못하면 사람들이 답답해해요”라고 말했다.
로미는 한국의 웬만한 채소 이름은 물론이고 다소 높은 수준의 추상명사들도 곧잘 사용하곤 했는데, 인근 월산리 가구공장을 다닐 때 한국인 동료 집에 매일 근무 뒤 찾아가 ‘실전 한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우리 공장의 출롱도 노력파에 속하는데,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며 한국말을 익힌다. 요즘엔 야근이 많아 ‘본방사수’는 쉽지 않고 주말에 재방송을 주로 본다. 하루는 점심 휴식 시간에 휴대전화로 최근 인기리에 방송 중인 드라마를 다시보기 하다 “김태희 예쁘지” 했더니 그는 “형, 나는 최지우가 예쁜 것 같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서울 서초동 ㅇ모텔 현장 세팅을 다녀온 뒤 “뭔 시뻘건 대낮에 공사 중인데도 모텔을 들락거리는 ××들이 그렇게 많지?”라고 묻자 그는 “형, 마누라는 마누라고 애인은 애인이야”라고 답해 나를 웃기기도 했다.
이들과는 반대로 한국말을 아예 작정하고 배우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도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웰링턴(가명)의 경우다. 한국에 온 지 5년 가까이 됐음에도 그가 구사하는 한국 단어는 몇 개 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영어 90%에 한국말 10%를 섞어 쓴다. 자기 나라 대학에서 지질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는 그에게 왜 한국말을 잘 못하는지 물었다. “일부러 안 배웠어. 사장님 한국말로 욕하는 거 알아듣기 싫어서.” 웰링턴은 2년여 전부터 공장을 그만두고 공단 근처에서 컴퓨터 부품 거래를 하고 있다. 피부색이 어두워질수록 사람을 무시하는 강도가 세지는 한국의 정서상 공장 다닐 때 사장에게 맞아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왜? 그의 답변은 “마이 사이즈”(내 덩치)라고 답했다. 그는 근육질의 탄탄한 몸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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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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