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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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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끼리 서로 알아주고 연대하자”


‘노동 OTL’ 2부를 읽고…
혼이 반쯤 달아난 듯한 식당 아줌마가 눈에 들어오며 절로 돕게 되더라
등록 2009-11-06 11:08 수정 2020-05-03 04:25
노동OTL

노동OTL

얼마 전 회식이 있었다. 갈빗집.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회식팀들이 여럿이다. 식탁 숯불마다 빠짐없이 자글자글 고기가 익고 있다. 넓은 홀에 손님들이 등을 마주댈 정도로 가득 들어차 왁자지껄하다.

직접 물병·재떨이·반찬 챙긴 회식 자리

그리고 빼곡한 식탁과 손님들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달리는 여자들도 있다. 홀 벽에 붙어 있는 전광판에 붉은 글씨가 뜬다. “호출 7번.” 그때마다 딩동, 기계음이 울린다. 흥에 겨운 손님들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귀기울여보면 쉴 새가 없다. 그런데 그건 아주 일부분이다. 호출 버튼을 누르지 않고 소리쳐 부르는 손님들이 훨씬 더 많다. “아줌마, 고기 더 주문받아요.” “언니, 소주 두 병 더.” “여기, 물 좀!” “불판 다 탔잖아요. 아까 갈아달라니까!”

나는 눈치껏 벌떡벌떡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오고, 재떨이를 가져오고, 다 먹은 반찬 그릇들을 챙겼다. 동료가 타박을 주었다. “그냥 불러서 시키면 되잖아.” 이때다 싶어, 말했다. “ 임지선 기자 체험 기사 읽어봤어? 안 읽었으면 말을 마.”

그때 그곳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얼굴은 혼이 반쯤 달아난 듯했다. ‘식당 아줌마’가 된 임지선 기자도 그랬다더라. 그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

임지선 기자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게 되었을 때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고 썼다. 몇 달 몇 년을 일하시는 분들에게 민망스러워도 진심이었을 거다. 나도 자신 없다. 나 역시 월소득 120만원의 비정규직 노동자니, 돈은 둘째 치자. 하지만 나는 12시간 일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일하다가는 우선 내 체력과 건강이 버티지 못할 게 뻔하다. 그러면 이분들은 강철 체력을 가진 슈퍼우먼들일까? 모르긴 몰라도 약값과 병원비로 솔찬히 나갈 것이다. 아니다. 병원 갈 시간이 없겠구나. 하루 12시간 노동, 한 달 1~2일 휴일로는.

이런 일을 하시는 분들이 100만 명에 달한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이 2009년 3월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분석한 것에 따르면, 숙박음식점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92%, 99만4천 명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수가 가장 많은 산업 부문은 도·소매업으로 126만 명이다.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거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여성 노동자들이다. 직종별 분류로 해도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서비스직과 판매직에서 비정규직은 10명 중 8명으로, 200만 명을 넘어선다. 우리는 이 여성들을 어디에서나 마주친다. 식당·가게·마트,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곳에서.

비정규직의 한 달 임금 소득은 124만원 정도다. 정규직 253만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사실 여성 비정규직은 이보다도 더 낮다. 김유선 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남성 정규직 시간당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여성 정규직은 67.4, 남성 비정규직은 50.8, 여성 비정규직은 겨우 39.1에 불과했다. 남성들은 그래도 정규직이 더 많은 반면, 여성 노동자는 비정규직이 65%라는 점까지 고려해보면, 여성들의 일자리는 대개 저임금 비정규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떳떳하게 어느 직장에 다닌다고 말하기 머뭇거려지는, 용역직이나 일용·임시직 일자리들이다. 또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의 65%가 여성이다.

혹시라도 “여자들 일하는 거야 집에만 있기 뭐하니까 여윳돈 좀 벌려고 부업 삼아 나오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집에만 있기 뭐해서 하루 10시간씩 일하리?”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위기는 여성을 대거 노동시장에 나오게 만들었다. 돈을 벌던 남편들이 실직하거나 망했고 다시 일을 하게 되더라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여성이 일하러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런 사정들은 임 기자의 기사에도 잘 나와 있다). 여성을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로 몰아넣는 것은 빈곤이다. 그러나 이 일자리는 빈곤을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한다.

‘엄마들이 해오던 일’로 가치 폄하
식당들이 모여있는 골목.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식당들이 모여있는 골목.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그럼 왜 여성의 일자리는 이렇게 비정규직이고 저임금일까? 임지선 기자의 체험 기사를 읽은 독자라면 “여자들 일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리 없겠지만, 일자리의 성격 자체에 바로 이러한 관념이 구조화돼 있다. 여성 비정규직의 일들을 보자. 주로 가사노동의 연장선이거나 감정노동 또는 돌봄노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가사노동: 밥하고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일. 식당일도 그렇고 지하철이나 병원, 학교 건물들을 청소하는 분들은 거의 여성 노동자다. 육체적 노동강도로 따지면 무지하게 힘들다. ‘힘이 센’ 남성이 할 법하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여성의 일로 간주된다. 원래 집에서 엄마가 하던 가사노동의 연장선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감정노동: 상냥하게 웃으며 대하는 일. 판매대의 점원, 식당 홀 서빙하는 사람, 상담원, 안내원, 텔레마케터 등. ‘고객은 왕’인지라 손님이 진상을 부려도 울컥 올라오는 울화는 목구멍까지만 눌러두고 미소를 지어야 한다. 하도 미소를 짓다 보면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런 것도 여자의 일이다. 여자는 상냥하고 온순하며 사람들의 감정에 민감하게 대응할 줄 알기 때문이란다. 하긴 가정에서 남편을 즐겁게 해주고 아이들을 달래고 시부모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가.

돌봄노동: 아이나 환자, 노인을 돌보는 일. 보육교사, 간병인, 요양보호사 등. 이런 일자리가 늘어나고 정책적으로 뒷받침되는 것은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가정 내에서 여성이 엄마나 딸, 며느리로서 무급으로 봉사해야 할 테니까. 물론 노동시장의 일자리가 되어도 여전히 여성의 일이다. 그리고 하루에 10시간씩 일하면 100만원쯤 버는 비정규직이다.

자원을 지닌 기업의 역할 중요

이런 일들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할 수 있고 하는 일로 간주된다. 원래 가정에서 엄마들이 다 해오던 일이 아닌가. 특별한 자격이나 기술이 없어도, 돈도 안 받고 당연히 하던 일. 그러니까 정규직 직원으로 고용할 필요도 없고 임금도 많이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저임금의 일차적 원인은 노동시장의 상황, 즉 빈곤에 내몰려 이런 일자리라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여성 노동자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동력의 가치란 꼭 수요·공급 원리에 따라서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사회적 힘, 예를 들어 조직력이나 일에 대한 사회적 가치 평가 같은 것도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이 점에서 여성 노동은 가정에서 ‘엄마들이 당연히 해오던 일’의 연장선상으로 간주되면서 크게 가치가 폄하된다.

이것은 사람들의 인식 문제가 아니다. 자본이 여성 노동자를 값싸게 이용하는 전략으로서 사회적으로 구조화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시장을 확대해가면서 유지되는 체제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에서 점점 더 많은 부분들이 시장의 상품 관계로 편입된다. 집에서 해먹던 밥을 자주 식당에서 사먹게 되고, 옛날에는 집에서 놀던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게 된 것도, 이러한 상품 관계가 생활에 더 깊숙이 침투하는 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 때문이다. 더군다나 서비스 업무는 자동화되기가 어려운 편이므로 특히 고용 구조에서 상대적인 비중이 높아진다.

이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했던 부분들이 비록 시장적인 방식일망정 사회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은폐된 가정 내에서 재생산 노동을 수행해야 했던 여성에게는 부담을 덜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부문의 일자리란 것이 노동시장에 나온 여성에게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떠맡겨진다는 점이다. “어차피 집에서 여자들이 돈 안 받고 매일 하던 일하고 비슷한데, 뭐”라는 명목으로. 자본주의는 이윤 창출의 영역을 발견하는 것과 더불어, 거기서 노동력을 싸게 이용하는 방법도 찾아낸다.

저임금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정책들이 제시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연구자인 나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아무리 좋은 정책을 만들어내더라도 그게 쉽게 실현되지는 않는다. 특히 노동자를 위한 정책은 더 그렇다. 어쨌든 정책 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자원을 가진 것은 기업이니까. 노동자를 위한 정책은, 사람들의 강력한 지지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하다. 나도 그렇고 을 읽는 독자의 다수가 노동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우리 노동자끼리 서로 사정을 알아주고 연대하고 지지해야 한다.

식당만 가면 유난히 종업원들의 ‘서비스 정신’을 감시하고 투덜거리는 친구가 있다. “이 식당은 왜 이렇게 불친절해!”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식당 노동자들의 노동시간과 노동강도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불친절할 가능성도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역설적인 것은, 서비스 정신을 강조하고 그래서 서비스·판매직 여성 노동자의 감정노동을 강화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수행하는 노동자를 같은 노동자이자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손님을 기쁘게 해주는 ‘기계’로 볼 뿐이다.

‘투명인간’ 아닌 ‘사람’으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여성이 주인공인 미국 추리소설이 있다. 그녀는 식당 손님들의 얘기를 들으며 추리를 해낸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참 이상하지. 내가 옆에서 청소를 하거나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내가 보이지 않나봐.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들 얘기를 하거든. 식당 종업원이란 투명인간 같은 거야.” 또 한 정규직 남성 노동자가 내게 한 말도 있다. “전에는 화장실에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들어와도 아무렇지도 않게 볼일을 봤다. 내가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자, 그때서야 그 아주머니들이 들어오면 흠칫하게 되더라. 그전에는 그 여성 노동자를 아예 인식하지도 않은 거다.”

노동자 연대의 출발점은 간단할 수 있다. 서로를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 보고 사정을 알아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노동 OTL 기획 기사의 취지도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장귀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정책위원장·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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