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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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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빈곤으로 ‘완조립’돼가는 삶들


세월 가며 몸값은 추락하고 빚더미는 높아가는 ‘4천원 시급 인생’…
그래도 작업 라인 없어질라 조마조마
등록 2009-09-22 06:49 수정 2020-05-02 19:25
노동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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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이야기
지난 7월 하순 최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15곳가량 전화로 문의했고, 5개 인력회사에 이력서를 냈다. ㄷ인력회사를 통해 마침내 구한 곳은 경기 안산 반월공단의 A사. 주력 상품인 석유난로와 대기업 하청 생산 품목인 냉장고, 비데 등을 조립 생산한다. 난로 제작 라인에서 공기통 높이와 심지 쏠림 등을 검사하는 ‘9번 공정’이 내게 맡겨졌다. 꼼짝없이 서서, 야간 연장근로가 있는 날은 하루 11시간까지 라인의 속도에 이끌려 ‘단순 공정’을 되풀이해야 했다. 머리가 전혀 필요 없었다. 무겁기만 했다. 떼어내고 싶었다. 일이 고되고 임금은 적으니, 공단에는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날품’들로 넘친다. 그런데도 공장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이문을 남긴다. 다양한 ‘착취의 기술’이 숨은 탓이다. 출근 시각부터 치자면 하루 최대 13시간을 A사의 ‘부속 설비’로 일한 한 달도 답을 주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면 더 나은 미래를 약속받을 수 있나. 가난은 모두 이들의 죄인가. 이들이 태어난 조국은 운명인가. 명확한 건, 오늘 시급 4천원짜리라는 현실보다 내일도 시급 4천원일 것이란 절망이 이들에겐 몸서리치게 끔찍하다는 사실이다.



글 싣는 순서

제1부 안산 난로공장


① 작업 라인의 노예

② 4천원의 삶과 행복

③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김정효 기자

김정효 기자

1. 악몽

악몽을 꾼다. 링을 컨베이어벨트 안으로 떨어뜨린다. 통근버스를 놓쳐 뛰고 또 뛴다. 1초까지 에누리 없이 채워 잔 뒤 새벽 6시20분에 일어나야 하는데, 뒤척이다 깨버리는 새벽 5시30분이나 6시5분은 원망스럽다. 8월 말, 여태 돌던 선풍기가 땀을 다 훔쳐내지 못한다.

현실이 악몽으로 다시 찾아오는 까닭은 아무래도 ‘영혼의 복수’다. 제 의식과 영혼을 보호 못한 육신에 던진 경고다. 그래서 난 육신을 보호하기 위해, 하루가 시작될 때마다 머리를 쥔 채 결근을 고민했고, 잔업까지 들어가면 ‘기자인 게 들통 나라’ ‘단전돼라’ 애절하게 주문했다.

하지만 그 따위 주문은 안중에도 없는 라인 앞에서 육신은 위약하기만 했다. 링을 놓친 건 8월17일, 야간 잔업에 들어선 뒤다. 손에 힘이 빠졌다. 쨍그랑~. 옆에 있던 8번 공정의 파견직 여성(31)이 다급히 물었다. “(컨베이어벨트) 안으로 들어갔어요? 밖으로 떨어졌어요?” 두 달 넘게 근속해온 것으로 보이는 ‘베테랑’이다. “모르겠어요, 못 봤어요” 하자 여성은 소리쳤다. “라인 세워주세요!”

쫓겨나거나 스스로 떠나거나

곧 라인이 멈추고 반장이 달려왔다. “이런 ×, 오늘 9시까지 도망가는 놈 하나도 없을 줄 알아.” 오늘 야근은 저녁 8시까지라고 이미 공지된 가운데, 군데군데 작업이 느려 화가 나 있던 차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결국 컨베이어벨트 밑에서 반장이 직접 링을 꺼내줬다. 링이 잘못 끼이면 라인이 통째로 서는 모양이다. 링은 공기통에 올려놓고 심지의 높이를 확인하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도구지만 나 같은 날품 몇몇보단 귀할 것 같다, 아니 귀하다. 나는 비정규직이지만, 7~9㎜ 높이를 정확하게 재는 링은 정규직이다.

8월26일 2번 공정을 맡았던 한 여성이 쫓겨났다. 점심 식사 뒤 C타임(오후 1시30분~3시30분) 작업 중이었다. 작은 가방 하나 들고서, 지시 없이는 결코 떠날 수 없는 제 라인의 위치를 저벅저벅 벗어났다. 주변에선 “좀 이상한 여잔데, 유명해”라고 말해줬으나,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무엇이 이상한지, 무엇보다 그의 작업이 서툴렀는지에 대해 듣지 못했다.

8월19일 30대인 듯한 남성은 A타임(오전 8시30분~10시30분) 2시간만 일한 뒤 말없이 사라졌다. 전날 공장에 들어왔다. 1번 공정을 맡다 ‘용역의 무덤’이라 불리던 10번 공정으로 와 그는 허덕였다. 반장의 지적을 몇 차례 받았다. “왜 이렇게 느려?” “그것도 못해요?”

2시간 만에 내 옆 사람이 ‘증발’한 것에 진심으로 뜨악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닳고 닳은 ‘날품’처럼 말 한마디 먼저 붙이지 않은 내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그는 이틀 동안 철저히 침묵한 채 일하다 공장에서 사라졌다. 떠나니 말을 건다. “그냥 가면 어떡하느냐”는 험담들. ‘힘들죠?’라고 한마디만 건넸더라도, 하는 생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미안했다. 그들도 그날 악몽을 꾸었을까, 궁금했다.

2. 삶의 무게

고된 노동의 종착역이 ‘빈곤’이 되는 역설에서 벗어날 길 없는 이들에겐 악몽조차 달콤하다. 그것이 현실만 아니라면. ㅈ인력회사를 통해 A사로 들어온 정성훈(가명)씨의 고향은 경북 문경이다. 그의 나이는 46~50살. 이달로 55R 라인에서 일한 지 석 달째다. 우리 라인의 남성 가운데 ‘왕고참’이다. 나이도, 근속 기간도 가장 많다.

올 6월 중순 ㅈ인력의 구인광고를 보았다. 45살까지만 뽑고 있었다. 혹시나 하며 전화했지만 거부당했다. 일주일가량 지나자 같은 내용의 구인광고가 또 붙었다. 쉰 살까지 가능하단다. 당장 전화를 했다.

“첫날 (전동 드라이버로) 너트를 끼웠는데, 다음날 야 이거 니미, 아침에 손이 안 펴지더만. 이거 어쩔까, 한참 생각했지. 근데 뭐 수가 있나. 한 주만 더 해보자 했지. 그러다 다른 공정으로 바뀌고.”

한 학기 등록금 대려 137일 일하는 어머니

평생을 육체노동으로 살아왔으나, 몸값은 꾸준히 추락했다. 1988~98년 괜찮은 중소기업에서 호스를 만들었다. 하지만 금융위기로 공장은 문을 닫았다. 안산 고잔 신도시에서 건설 일용직 등을 했다. 드문드문, 하루 7만원을 벌었다. 그러다 천장공사 시공사에서 일했다. 올 초부터 돈을 받지 못했다. 결국 나왔다. “나이 때문에 어디 갈 데가 없는 거야.”

반년가량의 실업 끝에 받은 첫 급여는 119만원. 그는 지난 6월에 생긴 이곳의 난로조립 라인이 다음달이면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렇다면 그도 ‘없어질지’ 모른다.

일러스트레이션 최규석

일러스트레이션 최규석

경기 수원 지역 공장에 다니는 40대의 김영순(여·가명)씨는 15년간 식당에서 일을 했다. 주방과 홀서빙을 오고 갔다. “정말 힘들었다.” 임계치를 넘어서자 공장으로 왔다. 1년6개월이 넘는다.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올 1월부터 야근조를 지원했다. 평균 130만~150만원을 번다. 택시기사인 남편은 월 70만원을 벌어온다. 사실상 김씨가 생계를 책임진다. 저녁 8시30분부터 새벽 5시30분까지 일을 하고, 잔업으로 2시간을 더 한다. 하지만 잔업만 좀 줄어도 임금은 곤두박질친다. 지난 6월엔 83만3180원을 받았다. “어처구니없다.” 중학생 아들, 고등학생 딸이 있다. 저축은 없다.

A사에서 7년 동안 일한 정규직 김희숙(40대·여·가명)씨는 아들(24)이 자라면서 학비 부담이 생겨 공장일을 시작했다. 경기 고양의 자동차수리 공장에 다니던 남편이 화물운송업을 시작하면서 안산으로 이사왔다. 남편의 벌이가 줄긴 했으나, 300만원가량은 된다. 외아들은 자라 천안에서 대학교를 다닌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김씨는 공장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에 아들에게 부친 2학기 등록금 440만원은, 김씨가 하루 8시간 137.5일을 일해야 마련되는 돈(상여금 제외)이다.

‘안산·시흥 비정규직 노동자 실태조사’를 보면, 10명 가운데 절반가량(44.8%)은 “소득으로 필요 의식주만 해결할 뿐”이라고 했고, 20.3%가 “매월 적자를 보는 상황”이라고 답했다. 안산·시흥비정규노동센터가 2007년 7월부터 4개월 동안 330명을 대상으로 방문 조사(복수 응답)한 결과다. 3. 수렁에 빠진 청춘

28살 염철수(가명)씨는 경기 부천에서 공고를 나왔다. 기독교 물품 유통사업을 3년간 했다. 총판이 돈만 갖고 튀었다. 밑천은 어머니가 아들 결혼자금으로 모아뒀던 것이었다. 때때로 유흥업소에서 일을 하다, 지난 8월 A사에 들어왔다. 저축? 3천만원가량의 빚이 있다. 이를 갚으려면 하루 11시간 600일을 일해야 한다.

PC방과 부동산중개업을 하다 망한 김정민(34·가명)씨도 갚고 갚아 남은 빚이 7천만원 정도라고 한다. 1400일을 일해야 한다.

‘빚-비정규직-빈곤’의 악순환

한번 빠진 수렁은 좀처럼 헤어나기 어려운 사회다. ‘빚 - 비정규직 - 빈곤 노동’의 악성 트라이앵글에 걸린다. 빚진 자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은 일해도 빈곤한 자가 되며, 그는 다시 빚에 노출될 공산이 크다.

‘막장 노동’에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도 크지 않지만 아주 없진 않다. 빈곤 노동자의 불안정한 삶은, 일거리가 줄면 돈을 못 받은 채 쉬는 불안정한 일터와 직결된다. 이것이 빈곤 노동자 사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다시 한번 가르며 격차를 낳는 요인이 된다.

안산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혁(22·가명)의 첫 직장은 평택의 자동차조립 공장이었다. 반장을 빼곤 모두 이주노동자였다. 일당 5만원(시급으로 치면 6250원)짜리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주근, 그리고 보통 밤 11시30분까지 잔업을 했다. 밤 12시까지 야식을 먹고, 새벽 3시까지 휴게 없이 철야를 하는 날도 있었다. 일이 많은 시기, 이주노동자들이 기숙하는 회사 컨테이너에서 잔 뒤 아침 8시 다시 라인에 서는 일이 일주일에 한 차례 정도 반복됐다. 그리 해서 버는 돈이 월 160만~170만원, 잔업이 적은 달은 130만원 정도였다.

화물운송업에 종사하는 아버지는 자주 다쳤다. 어머니는 안 계시다. 카드빚이 쌓였다. 전세를 월세로 바꿨다. 최근 반년가량을 또 다쳐 누운 아버지는 지난 5월부터 1t 트럭으로 바꿔 골판지 운송을 시작했다. 고교 운동선수인 남동생 학비, 빚, 집값, 차할부금·유지비 등을 내면 둘이 벌어도 남는 돈이 없다.

상혁은 대학교를 가고 싶다. “공부도 꽤 했다”는 그는 “물리학 같은 걸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첫 공장’을 소개해줬다.

A사로 옮긴 8월25일, 그는 직업소개소에 간다며 집을 나섰다. 그는 다시 급류에 휩쓸리듯 밤 9시까지 라인 앞에서 허우적댔다. 하필 휴대전화도 망가진 그날, 밤 10시께 귀가하자 아버지는 “어디 팔려간 줄 알았다”며 걱정했다.

비정규직의 애로 사항

비정규직의 애로 사항

물리학 배우고 싶은 노동자의 꿈

평택에서 1년6개월을 일했는데도 따져보니 번 돈은 700만~800만원. 믿기지 않는다는 내게 상혁은 “원청에서 파업하거나 일거리가 줄면 그냥 쉬거든요.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거나 저녁 8시(야근조)에 나갔다가 밤 12시에 퇴근한 것도 꽤 됐어요”라고 설명했다. 결국 지난해 11월 자동차산업이 어려워지자 회사는 상혁 같은 파견 노동자를 일괄 정리했다.

정성훈씨의 오늘이 20대 상혁과 철수씨의 내일일지 내다보기 어렵다. 다만 심지의 끝이 겨우 난로이듯, 이들이야말로 정해진 라인 안에서 절망과 빈곤으로 ‘완조립’돼가는 인생인지 모른다. 라인을 규정한 ‘경영진’은 누구일까? “잘살려면 성실하라”며 빈곤의 게으름과 무능력만 추궁하는 반장은 자본인가, 국가인가?

4. 일터의 불행

지난 9월11일 약간은 긴장하며 온라인 계좌를 연다. 인력회사가 급여를 송금하기로 한 날이다. 앞서 가불한 20만원을 더해, 66만7070만원이 찍혀 있었다. 8월치다. 9월 첫 주에 일한 건 10월11일에 받는다. 한참 웃었다. 예상치와는 너무 달라 토해낸 실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다른 사람보다 잔업을 덜 했으니’ 하며 ‘나태’를 스스로 인정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실제 만난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선 ‘사회적 부당함’이나 ‘인간에 대한 결례’를 그저 삼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급여가 나와도 그 내역이 무엇인지 따지지 않는다.

내 경우, 8월31일까지 주근 112시간, 연장근로 25시간을 했다. 화·목요일 잔업을 무조건 걸렀고, 공장의 대응을 살피기 위해 한 차례 결근, 한 차례 조퇴를 일부러 시도한 결과다.

주근과 잔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아야 인력회사에서 ‘선전’한 급여에 다가갈 수 있다고 지난 1회 기사에서 밝혔다. 그렇지 않을 경우, 급여는 이처럼 극적으로 추락한다. 근무 초반에 만난 다른 라인의 30대 후반 남성은 “지난달(7월) 11시 야근을 12번 했다. 남자가 120만~130만원을 받아서 뭐하겠느냐”며 “매일 나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매일 잔업하는 게 중요하다”고 훈수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행복일까, 나는 의심스럽다. 일만 하는 것이 행복이 되기도 어려울 뿐더러, 하루 13시간씩 머무르는 이들의 일터에는 갖춰진 게 없다.

‘날품-정규직-반장’을 구별하는 옷 색깔

미안한 얘기지만, 규모가 상당한 A사는 교도소를 닮았다. 출퇴근 때마다 지문인식 기계에 날인 등록을 한다. 정문으로 들어오면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마당은 ㄷ자 구도로 3~4층짜리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다. 관리직 사무실이 들어선 중심 건물의 외벽 높이 커다란 시계가 걸려 있다. 딩동, 딩동, 딩동~. 근무 시작 5분 전, 근무 시작과 종료, 휴식 시작, 식사 시작 시각에 정확히 종을 친다. 모두가 그에 맞춰 일을 하고 멈춘다.

그곳엔 벗도 없고, 선후배도 없으며, 동아리도 없고, 오후 5시30분 퇴근버스도 (때때로) 없고, 파견 노동자에겐 휴가도 없다. 자녀를 위한 어린이집도 없다.

각 인력회사마다 색깔이 다른 티셔츠를 입힌다. 서로 이름을 잘 모르고, 옷 색깔과 인상착의로 구별한다. 날품들의 보라색, 검은색, 빨간색 등이 가득 핀 공장 마당엔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알 수 없는 이들의 땀내, 그리고 이방인들끼리 주고받는 낯선 눈빛만 가득하다. 그리고 정규직의 초록색, 반장의 주황색. 인력을 식별시켜 관리의 효율성을 높이는 공장 풍경은 교도소에도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젊은 공장 노동자는 퇴근 뒤 PC방에서 1~2시간 게임을 하는 걸로 스트레스를 푼다. 24살 정원식(가명)씨는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만 하는 건 내가 아니고 죽어있는 나”라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곤죽이 된대도, 퇴근 뒤 새벽 1시 남짓까지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다. 그는 “유일하게 ‘자신’으로 돌아가 살아있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멸시’와 ‘부당’을 내면화할지언정, 모르진 않는다. 안산·시흥 비정규직 노동자 10명 가운데 64.9%가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이 너무 적다”, 39.8%가 “노동시간이 너무 길어 힘들다”, 39.1%가 “복리후생이 빈약해 불만이다”, 15.4%가 “관리·감독자가 인격적 대우를 하지 않는다”며 노동조건상 애로 사항을 토로했다.(‘위 실태조사’)
정규직·비정규직 임금 격차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정규직·비정규직 임금 격차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5. 공장 경제학

금융위기 이후 파견직이 활성화되며 축적된 ‘공장 경제학’은 한편으론 치졸했고, 한편으론 섬세하지만, 하나같이 공고했다. 당연히 유일의 가치는 최대의 생산효율이다.

40대 정규직 여성은 7년 전 A사에 입사할 때부터 정규직이었다. “정규직이 그만두면 차츰 파견직으로 대신하더니 3년 정도 지나고선 정규직을 아예 뽑지를 않았다”고 기억한다. 요즘도 간혹 공정 검사직은 정규직을 뽑는다는데, 난로 제작 라인에선 내가 맡은 ‘9번 공정’이 바로 그 검사직 가운데 하나다. 실제 처음 잔업을 빠져야겠다고 말했던 8월13일 반장은 “(너트 조립 등과 달리) 공정에 이름까지 올라가는 자린데 안 된다”며 “(잔업을 빠지면) 라인에서 뺄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 중요한 자린가 싶었다. 물론 다른 라인에 견줘 우호적 평가를 받는 반장은 날 보내줬고, 이튿날 라인에서 빠지지도 않았다.

귀마개도 목장갑도 나중에

A사에서 심지를 제작하는 이들은 매월 10만원을 더 받는다. 심지의 재료에서 나오는 먼지나 유해성 물질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라인에서도 심지를 공기통에 끼우는 1번 공정의 경우 만만치 않게 먼지를 마셔야 한다. 그는 토시를 끼고 앞치마를 두른다. 하지만 10만원은 없다. 마스크도 주지 않는다.

전동 드라이버 회전 소리에 첫날부터 머리가 부서질 것 같았다. 8월24일부터 휴지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즈음, 공장 벽엔 ‘귀마개 착용’이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단 사실을 알았다. 알려주지도 않고, 나눠주지도 않고, 도무지 라인만 내려보며 근무를 하니 2주가 지나서야 안내판을 ‘발견’한 것이다. 근무 1~2주엔 목장갑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8번 공정 여성이 “원래 월·수요일엔 새것을 줬는데, 이것도 소모품이라면서 요즘엔 잘 안 주네요”라고 말했다. 3주째가 되어서야 정상으로 지급됐다. 작업 전 “장갑 가져가”라는 반장의 지시는 노동자들이 가장 반기는 지시 가운데 하나였다.

A사는 지난해까지 밤 11시 잔업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량이 많이 나오면서 결국 밤 9시가 일반화됐다. 인력회사들의 설명이다. ‘용역’들은 거대한 공사 현장에서 구덩이 하나 파는 삽자루 같다. 새로 온 날품들에게 ‘전체 공정’을 일러줄 리 없다. 해당 공정 요령조차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는다. 반장은 기본 요령만 알려준 뒤 하루이틀 지나면서 때론 친절히, 때론 윽박지르며 노하우를 추가적으로 전수해준다. 이유가 보였다. 마찬가지다. 다 알려줘봤자 내일 안 나오면 반장만 헛수고한 것이 된다. 그래서 대체로 추궁당하며 배워나가는 게 많다.

노동자는 언제나 후순위다. 노동과 생산의 효율적 관계만이 이물의 방향을 결정한다.

사업장의 법정 복리후생 적용 여부를 묻는 질문에, 시간외 수당을 적용한다고 답한 이는 54.6%, 주 1회 유급휴일을 준다고 답한 이는 36.1%밖에 되지 않았다. 월차·연차 휴가를 준다고 응답한 이도 34~35%선에 머물렀다. 사내 복지시설 이용이 가능하다고 답한 이는 33.7%밖에 되지 않았다. (‘위 실태조사’) 6. 막장 노동 그리고 기만

이들의 임금이 적정하다는 논리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투자 없이 선택할 수 있는 ‘막장 노동’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 안에서 정해진 법규나 관례로부터 ‘기만’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숨은 갈취들이 있다.


잔업수당마저 후려치는 회사

김영순씨가 다니는 수원 지역 공장은 잔업 수당의 일부(일주일당 4시간)를 본급의 1.25배만 쳐주는 '영특함'을 유지한다. 개정 당시 원성을 샀던 근로기준법 조항에 근거한다. 주 5일제가 적용되는 업체(현재 20인 이상) 경우, 초기 잔업 4시간의 수당은 1.25배로 칠 수 있다. 하지만 한달에 4시간만 가능하다는 해석이 있다. 그런데 주 4시간씩 잡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루 8시간 이외의 연장근로는 무조건 본급의 1.5배를 주는 곳이 많다. A사도 그렇다. 시급 4천원짜리 일자리에서 일주일에 연장근로 8시간을 했을 때 4만8천원을 받는 게 보통이라면, 이 회사는 4만4천원을 준다. 1.5배인 6천원을 4시간 적용하고, 나머지 4시간엔 1.25배인 5천원을 치는 것이다. 김씨는 지난해 12월 역대 최저로 60만원가량을 받았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의 반년 등록금을 내면 다 털린다. 가히 ‘김영순의 간을 빼먹는다’고 할 만하다.

대부분의 공장에선 일주일에 5일을 근속하면 이른바 ‘주차 수당’이라며 하루치 기본급(3만2천원)을 더해준다. 법적으로 명시된 ‘주휴수당’이다. 그런데 없는 곳도 있고, 이틀치를 주는 곳도 있다. 들락날락 하는 날품들을 잡아두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는 반대로, 불가피한 사정일지언정 하루만 결근해도 5만~10만원이 뭉텅 사라진다는 얘기다.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병이 나도 새벽 통근버스를 타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내가 받은 급여에선 4대보험 5만4930원이 공제됐다. 첫 주는 의지와 무관하게 화요일부터 일한 탓에 주차를 받지 못했고, 다음주는 하루 결근해 또 주차를 놓쳤다. 그리고 근무복 값 1만5천원이 또 떼였다. 원가는 7500원이라는데 믿기지 않는다. 인력회사는 이걸로도 이문을 남긴다.

정규직 최민우(32·가명)씨는 A사에서 일한 지 2년6개월이 된다. 1년 근속한 끝에 정규직이 되었다. 자신을 알선해줬던 인력회사는 “정규직까지 되지 않았느냐”며 퇴직금 주길 주저했다. 파견 노동자도 1년을 근속하면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 노동청에 제소한다 만다 며칠을 따진 끝에 79만원을 받았다. 날품 경력 오래된 이에게 이런 일은 차고 넘친다.

안산·시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렇게 일을 해 10명 중 3.6명이 한 달 100만~150만원, 3.3명이 100만원 미만의 급여를 받았다. 조사 당시 시급은 3480원이었다.(‘위 실태조사’)뭘 시켜도 잘할 사람들… 그런가

지난 8월19일, 아침 8시 공장 안을 둘러보았다. 이미 제 공정 위치에 서서 드라이버를 만지작거리는 이들이 있다. 짐차로 짐을 나르는 사람도 있다. 통근버스가 나를 공장 마당에 아침 7시45분에 부리고, 밤 9시10분에 실어갔으니, 정확히 13시간 25분을 공장에 있던 날이다.

사업이 망해 공장에 온 김정민씨는 활달했다. 10번 공정을 맡았는데, 주변 작업자에게 불안해 보일 만큼 자주 말을 걸었다. 물론 오후 들어서는 말수가 줄었고, 3일 뒤엔 아예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날 “정말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거 보고 놀랐다”며 “여기 사람들, 뭘 시켜도 잘할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런가. 알 수 없다. 세상은 ‘다른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9월4일, 근무 마지막날 퇴근길 기분은 묘했다. 프로젝트를 끝냈다는 안도감,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들 세계에 대한 미지로 가득하다는 불안감이 교차했다. 그날 공장 노동자들과 고깃집에 갔다. “목에 낀 심지 먼지 닦자”며 삼겹살을 시켰다. 딩동, 딩동, 딩동~. 직원 호출 벨소리에 모두가 기겁했다. A사의 종소리, 아 야근인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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