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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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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문학상] 인디안밥

<한겨레21> 제1회 ‘손바닥 문학상’ 가작 수상작
등록 2009-11-26 15:13 수정 2020-05-03 04:25
인디안밥

인디안밥

한혜경

1. 혼자 추는 춤

5월 하순의 어느 대낮-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기 직전까지, 여자는 핫핑크색 비키니와 어깨띠만을 걸친 채 전신거울을 마주 보고 막춤을 연습하는 중이었다(수캐 한 마리가 유일한 관객이었다). 그녀가 다니는 학교가 갑자기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내일 있을 1인시위를 포털 사이트 인기검색어 순위에 올리기 위해선 뭔가 독특한 퍼포먼스가 필요했다. 여자는 춤을 추다가 지치면 높으신 분 보란 듯이 돗자리에 누워 선탠까지 할 작정이었다. 설사 풍기문란죄로 잡혀간대도 오히려 환영이었다. 9시 뉴스에 나갈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물론 제모도 다 끝냈다. 어느 각도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도 체모(體毛)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벌금이 부과된다면 학생들이 조직한 비상대책위원회의 기금으로 충당하면 될 터였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으면 소음 기준 때문에 꼬투리를 잡힐까봐, 여자는 헤드셋을 끼고 혼자만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로 했다. 혹시 모를 행인들의 시비나 성희롱에 대비해 건장한 남학생 두 명도 확보해뒀다. 그 바람잡이 겸 보디가드들은 구경꾼인 척하기로 했다.

비키니 위에 걸친 어깨띠에는 근조 화환에나 어울릴 법한 붓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공부하게 해주세요.

‘철이와 미애’의 하나뿐인 히트곡 가 끝나자 여자는 춤을 멈췄다. 그리고 음악을 끄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TV를 켰다. 일일연속극에서 자주 봤지만 이름만은 알 수 없는 중견 탤런트가 진지한 음성으로 ‘월 9900원에 모든 것이 보장된다’고 말했다. 여자는 숨을 헐떡이며 채널을 돌렸다. 방바닥에 엎드려 있던 시츄가 일어나 침대 위로 뛰어 올라왔다. 땀에 젖은 여자의 손이 개의 목덜미를 무성의하게 몇 번 쓰다듬었다. 녀석이 여자의 손을 맛있다는 듯 핥았다. 여자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창문을 열었다. 바깥 풍경 대신 붉은 벽돌로 된 이웃 빌라의 벽이 창 앞을 꽉 메웠다. 지저분한 방충망 사이를 비집고 희미한 바람이 불어왔다. 땀을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다시 채널을 돌렸다. 여자는 바둑·게임·스포츠·골프·불교·기독교 채널은 1초도 안 돼 넘기고 주말 쇼프로 재방송을 찾아 계속 리모컨을 누르다가, 항상 지나치던 뉴스 채널에서 갑자기 멈췄다.

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흔해졌을까.

텔레비전을 틀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누군가의 죽음은.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는 유행처럼, 요 몇 해 도저히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유명인들과 그 외의 온갖 사람들이 하도 자살해 이제는 누가 자살한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거라고 여자는 생각해왔는데, “그가 자살했다”는 말은 ‘야 연예인 ○○○이 죽었대’라고 만우절마다 떠돌던 악성 루머처럼 뜬금없이 시작해, 그가 몸을 던진 절벽과 그가 숨을 거둔 어느 대학병원 외관과 그 병원 앞에서 붉어진 얼굴로 우는 사람들의 얼굴을 생중계로 보여주면서 “자 이래도 안 믿느냐”며 그녀의 자취방으로 쳐들어왔다. 온몸의 땀이 어느새 다 마를 때까지 여자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물이 약간 고이다 말았다. 일어난 여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옷장을 여는 것이었다. 화려한 색채의 여름 원피스들을 제치고, 가장 구석에 있던 검은 재킷과 검은 원피스가 오랜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2. 예의

광장으로 향하는 모든 길은 전경버스와 방패를 든 전경들로 가로막혔다. 여자는 어차피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에 새삼스레 놀라지 않았다. 다만,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전경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자보다 어릴 게 분명한 그들은 여자보다 늙어버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그 눈에서 자신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우울과 불안을 읽었다. 아무도 서로에게 말을 걸지도 묻지도 않는 사이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지나갔다. 여자는 덕수궁 방향으로 돌아서서 걸었다.

왜 안 되는 건데?

젊은 남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여자는 뒤를 돌아봤다. 여자 또래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혼자 전경들을 밀치고 있었다. 앳된 티가 아직 남아 있는 전경들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하고는 남자를 간단히 제압했다. 남자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야, 지금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전경들은 대답 없이 흐트러진 줄을 가지런히 맞추고 부동자세로 되돌아갔다. 여자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여자를 보았다. 쌍꺼풀 없는 크고 맑은 눈이었다. 여자는 껌 파는 할머니를 발견했을 때처럼 재빠르게 시선을 피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덕수궁 담벼락부터 사람이 많았다. 광장으로 가지 못한 인파였다. 여자는 길게 늘어진 줄 끝에 서지 않고 좀더 걸어가 봤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흰 국화나 촛불을 든 사람들이 많았다. 여자는 작은 토트백 말고는 든 게 없는 자기의 손이 무안해졌다. 이 근방의 차도와 인도의 경계는 전경버스가 빙 둘러싸고 있었다. 버스에 탄 사람들도, 택시를 탄 사람들도, 자가용을 운전하는 사람들도,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볼 수 없도록. 허연 전경버스 위로 간간이 시내버스의 지붕이 지나갔다.

그녀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흰 국화와 검은 근조 리본을 나눠주는 곳을 찾아냈다. 긴 책상 위에 가득 쌓여있는 흰 국화를 사람들이 한 송이씩 가져갔다. 여자도 꽃을 집어들었다. 책상을 지키고 있던 중년의 아저씨가 여자에게 옷핀 꽂은 근조 리본을 주었다. 여자는 왼쪽 가슴팍에 그것을 달았다. 그제야 뭔가 제대로 격식을 차린 기분이 들었다.

그의 분향소는 덕수궁 바로 앞 널찍한 길바닥에 마련돼 있었다. 대학교 축제 주점에서나 봤음직한 노란 천막에다 바닥에는 은박 돗자리가 깔렸고, 바로 뒤에는 전경버스의 하얀 옆구리에 근조의 검은 현수막이 붙어 벽을 대신했다. 천막을 튼튼하게 지탱하기 위해서인지 가느다란 기둥의 밑을 물이 꽉 찬 2ℓ짜리 생수 페트병으로 에워싸 청테이프로 고정해놓았다. 커다란 그의 사진은 대부분의 영정 사진이 그렇듯이 죽음의 낌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여자는 비로소 눈물을 흘렸다. 길바닥이라 서럽고, 은박 돗자리라 애처롭고, 천막의 기둥이 너무 앙상해 보여서 안쓰럽고, 서울에 있는 모든 전경과 버스를 다 갖다놓은 것 같아 분하고, 더운 날씨에 그의 몸이 더 빨리 썩을까 불쌍하고, 무엇보다도 자신 역시 그를 죽게 만든 사람들 중 한 명이라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가방 속에 티슈가 있었으므로 콧물이 흐를 것 같아도 안심할 수 있었다. 친할머니가 죽었을 때도 안 울었던 여자는 텔레비전으로만 봤던 그를 위해 울면서 긴 줄의 끝에 섰다.

3시간30분이 지나자 여자의 차례가 왔다. 거의 육체노동에 가까운 기다림이었다. 여자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조문을 여러 번 해봤지만 이렇게 영정 앞에 설 때면 언제나, 절은 몇 번이나 해야 하고 위에 오는 손이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국화는 어느 방향으로 놓아야 할지 상주에게는 어떤 말을 건넬지 표정을 어떤 식으로 지어야 할지를 싹, 잊어버렸다. 그녀는 함께 줄 서서 기다렸지만 말을 섞지 않은 3명의 타인과 함께 신발을 벗고 올라갔다. 향내와 국화꽃 향기에 담배 연기가 섞여 어디서도 맡을 수 없는 죽음의 냄새가 났다. 절을 할 때마다 원피스 밑으로 드러난 맨살에 서늘한 돗자리가 쩍 붙었다 떨어졌다.

신발에 발을 넣다 말고 여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영정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였다. 벌써 다음 줄의 사람들이 올라와 절을 시작했다. 밑위가 짧은 핫팬츠를 입은 여자애가 엎드릴 때마다 엉덩이의 골과 팬티가 드러났다.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길 위에 서서 둘러보니 상복을 갖춰 입고 온 사람보다 평상복 차림의 사람들이 많았다. 마침 방송사 카메라맨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같이 있던 다른 사내가 여자에게 인터뷰를 부탁했다. 여자는 사내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은 검은색 옷도 입지 않았고 하다못해 근조 리본도 달지 않은 채 소금기가 진한 땀내를 풍겼다. 게다가 얼굴에는 단시간에 너무 많은 슬픔을 목격하고 기록하느라 쌓인 업무 스트레스만 가득해 보였다. 여자는 어쩐지 마음이 상해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는 대꾸했다.

그럴 기분이 아니네요.

3. 우울함의 방식

밤이 되었다. 사람들이 켠 촛불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여자는 시츄의 밥그릇에 사료를 채워주지 않고 나온 것, 곧 다가올 막차 시간, 내일 예정된 1인시위를 강행할지 취소할지 등등의 문제들로 신경이 쓰였지만 아직까지 분향소 주위를 맴돌았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자기를 못 가게 붙잡는 것 같고, 혹은 집까지 갈 엄두가 안 날 정도로 진이 빠져서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여자뿐만이 아닌 듯 보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분향을 마치고도 그저, 저마다 촛불을 켜들고 각 개인이 가진 슬픔의 표현력에 따라, 어떤 사람은 눈물짓고 어떤 사람은 분통을 터트리고 어떤 사람은 그저 초점 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며 그냥 그곳에 있었다.

여자는 다리가 아팠다. 옷을 더럽혀도 상관없으니 아무 데나 좀 앉아 쉬고 싶었다. 자리를 찾아다니다 영업 끝난 ‘던킨도너츠’ 가게 앞에 딱 두 사람이 앉을 수 있을 만한 빈틈을 발견했다. 신문지까지 얌전히 깔려 있는 걸 보고, 여자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불행히도 자리 양쪽에 앉은 남자들은 여자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다. 왼쪽에는 서울역에서 며칠 노숙하다 온 것처럼 쉬척지근해 보이는 중늙은이, 오른쪽에는 금방 자기 무릎에다 토할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는 젊은 취객. 여자는 혼자 온 것을 몹시 후회하며 거기에라도 앉을까 말까를 고민했다.

이게 그분의 진짜 유서 전문입니다. 언론에 공개된 걸 믿지 마십시오.

여자는 깜짝 놀라 돌아봤다. 파마머리의 사내가 전단을 돌리며 같은 말을 한 번 더 외쳤다. 주위의 사람들이 사내에게 몰려가 손을 내밀었다. 여자도 손을 내밀었다. 서로 먼저 받기 위해 약간의 실랑이를 한 뒤에야 그 A4용지 한 장짜리 전단을 받을 수 있었다. 여자가 그것을 재빨리 읽어 내려가는데 한 아주머니가 사내에게 물었다.

이건 출처가 어떻게 되나요?

사내는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 대답이 없었다. 여자는 사내를 붙잡고 자세한 이야기를 캐묻고 싶었지만 그냥 침묵했다. 대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톡, 어깨에 가벼운 무게가 와닿았다. 여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우비를 꺼내 입고 전단을 품에 넣었다. 빗방울은 하나, 둘, 셋을 셀 동안 급작스럽게 양이 늘었다. 여자는 던킨도너츠 차양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딱 두 명이 앉을 만한 빈자리는 아직 아무도 앉지 않았다. 거기 깔린 더러운 신문지는 그의 죽음을 알리는 호외였다. 여자는 그걸 주워 읽고 싶어 쳐다보았다. 갑자기 검은 캔버스화를 신은 큰 발이 나타나 신문을 밟았다. 빗물로 젖은 발자국이 난 걸 보고 여자는 그 신문을 단념했다. 신문을 밟은 사람이 여자의 옆으로 뛰어 들어왔다. 몇 시간 전에 봤던 그 젊은 남자였다.

휴지 있으세요?

전경에게 소리 지르던 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저음으로 남자가 말했다.

아…, 예.

여자는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주었다. 남자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씩 웃었다. 그가 티슈로 얼굴과 머리의 물기를 닦는 동안, 여자는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남자를 관찰했다. 신발과 크로스백을 포함하여, 입고 있는 피케셔츠와 스키니진과 후드집업 점퍼까지 전부 검은색이었다. 가슴팍에는 그녀와 같은 근조 리본이 달려 있었다. 캐주얼이긴 하지만 썩 훌륭한 상복 차림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축축한 공기에 섞여 남자의 향수 냄새가 났다. 햇볕에서 바싹 말려 방금 걷은 수건에서 나는 냄새 같았다. 미묘하게 낯간지러운 긴장감이 들었다. 서로를 의식하는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였다.

저기요.

예?

혼자 오셨어요?

… 네.

여자의 대답을 들은 남자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제발 무슨 말이든 어서 해주기를 바라며 여자는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반나절 동안, 기다리는 것에는 이제 완전히 질렸다. 남자는 별 얘기 아니라는 듯 말을 꺼냈다.

제가 지금 너무 우울해서 자살할지도 모르거든요.

여자는 눈을 크게 떴다. 농담일까 싶어 남자의 얼굴을 살펴봤지만 웃음기 한 점 없었다.

아니, 왜요? 여기서 그런 소리가 나와요? 절대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말까요?

남자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그쪽이 저랑 같이 있어줘요.

갑자기 쏴아아아아 더 커진 빗소리가 어색함을 덮어주었다. 여자는 화를 내려다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 이런 데서 작업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남자는 말없이 여자를 따라서 웃었다.

4. 도발

청계천 상류의 거대한 조형물이 보였다. 여자 눈에는 빨강과 파랑이 섞여 배배 꼬인 그 모습이 오늘따라 땅에서 돋아난 기괴한 생명체의 일부처럼 보였다. 전경버스 몇 대와 전·의경들이 그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아까 있던 쪽에 비하면 무척이나 단출한 규모였다. 젖은 돌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신발 밑창을 뚫고 발바닥까지 전해져왔다. 여자는 촛불을 양손으로 꼭 쥐었다. 그나마 조금 따뜻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겉옷을 벗어줘서 반팔 피케셔츠 차림이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환한 점 하나를 가리켰다. 커피숍 체인점 ‘탐앤탐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었다.

거봐요, 24시간 맞잖아요.

여자는 더 빨리 걷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시간에 문을 여는 곳이라고는 술집, 편의점, 모텔, 패스트푸드 체인점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서울은 꽤 융통성 있는 도시가 아닌가? 크림을 듬뿍 얹은 달콤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커피숍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저쪽에서 방패를 든 전경 세 명이 다가왔다. 그들은 ‘척, 척, 척’ 발소리를 내면서 이윽고 남자와 여자의 앞까지 와 멈추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자와 여자는 전경들을 바라보았다. 그중 가운데의 한 명이 딱딱하게 말했다.

촛불을 끄십시오.

네? 왜요?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전경들을 힐끗 보더니, 가만히 여자의 손목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내뱉었다.

무시해. 가자.

전경들이 두 사람 앞을 또 막아섰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움켜잡았다.

촛불을 끄십시오.

니들이 왜 그걸 명령하는데?

남자가 전경들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여자는 겁에 질려 입을 다물었다. 전경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에워쌌다. 가운데 전경이 남자 앞으로 바싹 다가와 말했다.

왜 반말하십니까?

왜? 꼽냐? 그래, 그럼 존댓말 해줄게. 저기요, 촛불을 끄건 말건 니들이 뭔 상관인데요? 니들이 이 촛불 주인이에요? 응?

반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당장 촛불을 끄십시오.

가운데의 전경이 높낮이 없는 톤으로 대답했다. 다른 두 전경은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입간판처럼 서 있었다. 여자가 보기에 촛불은 전경이 입김을 후 불면 금방 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굳이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여자는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남자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만해요.

남자는 아랑곳 않고 전경에게 쏘아붙였다.

넌 슬프지도 않냐? 감수성은 어디다 팔아먹었니?

촛불을 끄….

전경이 채 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눅눅한 찬바람이 촛불을 덮쳤다. 심지에서 가느다란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모두들 할 말을 잃고 그 연기가 밤공기에 녹아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자는 꺼져버린 초를 더 꼭 붙들었다. 남자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됐잖아. 비켜.

전경들은 세 명이서 나란히 대열을 맞추어 걸어갔다. ‘척, 척, 척’ 규칙적인 발소리는 거대한 조형물 쪽으로 조금씩 사라져갔다. 남자와 여자는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탐앤탐스 커피숍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손을 계속 잡고 있기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놓기에는 이미 애매한 분위기였다. 여자가 제안했다.

우리 커피는 관두고 술이나 먹죠.

술이오? 아깐 싫다더니.

그냥 갑자기 막 취하고 싶어요.

사실 나도 그런데. 그럼 종로로 빠져야겠네요.

아니, 술집은 싫어요. 사람 많은 데는 이제 진짜 신물 나요.

그럼 어디가 좋을까…. 술집이 아닌 곳에서 술을 마시려면 갈 데가….

남자의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모텔 네온사인을 향했다.

우리 집에 갈래요?

여자는 그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까 부끄러웠지만, 모텔에 가는 것보다야 낫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택시를 잡으러 큰길로 걸어갔다. 여자가 말했다.

라이터 좀 잠깐 줘봐요.

뭐하게?

남자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줬다. 빈 택시는 금방 나타났다. 남자가 택시를 향해 손짓하는 동안 여자는 라이터를 켜 초에 불을 붙였다. 촛불은 아까보다 더 밝게 빛났다. 택시가 두 사람 앞에 멈춰섰다. 남자는 차문을 열고 여자 쪽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자유의 여신상처럼 촛불을 높이 쳐들었다. 어린아이처럼 잔뜩 들뜬 얼굴이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전경들을 향해 소리쳤다.

야, 이 새끼들아! 나 촛불 켰다! 암만 지랄을 해도 소용없어, 병신들아! 니들 어린것들이 꼰대처럼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알아? 깝치지 마아!

남자는 입을 딱 벌리고 여자를 쳐다보다가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의 폭소를 터트렸다. 전경들은 잠시 우왕좌왕하는가 싶더니 이쪽으로 대열도 안 맞추고 마구 뛰어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잽싸게 택시에 올라탔다.

이문동이오.

여자는 자리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었다. 미터기를 켜며 중년의 기사가 물었다.

거기가 어디 근처죠?

… 옛날 안기부 있던 동네 있잖아요.

아, 중앙정보부 있던 데? 알지. 알았어요.

기사는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차창을 전부 열었다. 또 바람결에 촛불이 꺼졌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

쟤들도 알고 보면 불쌍한 애들인데….

여자는 말끝을 흐리고 남자를 슬쩍 보았다. 남자는 흐뭇한 표정으로 여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 쪽으로 몸을 약간 틀자 그 순간 남자가 입을 맞추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거센 바람의 무게를 온몸으로 맞으며 여자는 입술을 살짝 벌려 남자의 혀를 맞이했다.

5. 비일상적인 일상

훼미리마트는 평소와 똑같았다. 귓불에 피어싱 자국이 많고 말수는 적은 남자 알바생이 카운터에 서 있고, 여자가 선호하는 품목은 전부 진열대의 제자리에 그득하고, 알바생의 취향임이 분명한 여자 댄스그룹의 노래가 어김없이 흘렀다. 그는 언제나 ‘소녀시대’나 ‘원더걸스’나 ‘카라’의 노래만 틀었다. 가끔은 남자 가수의 노래도 틀어줬음 좋겠다고 느낀 적도 있지만, 여자는 이곳에 물건을 사러 잠깐 들르는 사람이므로 혼자 있는 알바생의 적적함을 달래줄 작은 즐거움을 빼앗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여자에게 여자 아이돌의 노래는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아이보리색 꽃무늬 벽지처럼 무의미한 배경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이 노래들이 거슬렸다.

이퓨워너프뤼리, 에블바리프뤼리, 안 된다는 말은 노, 노, 노, 노.

우울해서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남자는 카라의 후렴구를 따라 부르며 안줏거리를 고르고 있었다.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소년이 뛰어 들어왔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년은 고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호기심에 소년을 훔쳐보았다. 소년은 구석으로 가더니 고민 없이 덥석 어떤 물건을 집어들고 카운터로 갔다. 과자도 음료수도 잡지도 없이 달랑 그것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이게 전부라는 듯이 ‘탁’ 하고 소년이 올려놓은 그것은 콘돔이었다. 패키지를 보고 여자는 그게 자신도 써본 적이 있는 0.03mm 두께의 초박형 일제라는 것을 알아챘다. 알바생은 주민등록증을 요구하지 않고 묵묵히 계산했다. ‘현금영수증 필요하세요?’라는 질문도 안 했다.

소년이 나가자 남자와 여자도 카운터 위에 물건을 내려놓았다. 1500cc짜리 하이트 피처 세 병, 치즈포, 커피맛땅콩, 콘칩의 바코드를 알바생이 기계에 찍는 동안, 여자는 세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잘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울고 욕하고 힘들어하던 곳에 있었는데, 단지 택시로 20분 떨어진 이 동네로 오니 아까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게 가짜 같았다. 그 어떤 죽음이라도 타인의 일상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이런 날에도 여자 아이돌 그룹의 댄스곡은 아무 데서나 발랄하고, 소년의 성욕은 편의점의 눈부신 형광등 밑에서도 당당하고, 무뚝뚝한 알바생은 여자가 단골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오늘도 인사 한마디 없고, 여자는 클럽에서 만난 청년들과 그랬던 것처럼 만난 지 몇 시간밖에 안 된 남자를 집에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보았다. 밝은 곳에서 보니 얼굴이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다. 남자가 신용카드로 계산을 하고 물건이 담긴 비닐봉투를 들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내리쬐는 축축한 골목길을 걸어갔다. 간간이 비닐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났다. 줄곧 조용하던 여자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나 중2 때 친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

그래? 어쩌다가?

중풍 때문에 오른쪽 몸이 마비돼서 7년을 누워 지내시다가, 당뇨 합병증이 와서….

그렇구나.

우리 엄마가 큰며느리라 간병을 혼자 다 했어. 똥기저귀 갈고, 먹이고, 씻기고, 늙은 아기 키우는 것처럼 7년이나. 6년째 되던 해에는 군수가 어떻게 알았는지 효부상을 내리더라. 세상에 조선시대도 지났는데 효부상이라는 게 있더라고.

어머니가 고생이 많으셨네.

근데 보통 장례식장에서 곡을 하잖아. 엉엉, 아이고 아이고, 이런 거. 근데 할머니를 묻으러 영구차를 다 같이 타고 벽제로 가는데, 앞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 엄마가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알아? 엉엉, 아이고 어머님, 엉엉엉, 곡소리는 진짜 큰데 눈가는 완전 뽀송뽀송 한 거야. 아버지는 눈이 빨개져서 우는데, 엄마는 그냥 입으로만 억지로… 차라리 가만히 있든가, 되게 징그럽더라.

그럼 너는 울었니?

난 못 울었어. 분명 슬픈데 눈물이 안 나오는 거야.

뭐, 어리면 그럴 수도 있지.

다들 울고불고 난리가 났는데 나도 따라 울어야 할 것 같고 안 울면 이상할 것 같았거든. 어떻게든 쥐어짜보려고 별별 슬픈 생각을 다 해보고 팔뚝 살도 꼬집어봤는데 죽어도 안 나오더라. 참 이상하지. 분명 할머니를 엄청 좋아했는데.

너무 슬퍼서 그랬을걸. 눈물의 양과 슬픔의 양이 꼭 정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키우다가 다른 집에 줘버린 치와와가 목에 닭뼈가 걸려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KBS에서 틀어주던 만화영화 에서 주인공 오스칼이 죽었을 때, 교통사고로 죽은 옆반 아이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흰 국화를 보았을 때처럼, 여자는 자신과 피와 살이 맞닿지 않은 죽음에 대해서만 눈물이 났다. 중2 때의 여자는 할머니의 관이 들어간 구덩이가 어느새 봉긋하게 솟아오른 걸 보자 마치 누가 제 가슴에다 구덩이를 파서 흙을 들이붓고 꽉꽉 밟아놓은 듯한 기분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영구차 뒷좌석에서 사촌동생들을 데리고 ‘침묵의 공공칠빵’ 게임을 했다. 어른들에게 혼이 날까, 목소리도 웃음도 비명도 죽이면서. 제일 많이 틀린 사람은 여자였다. 벌칙으로 ‘인디안밥’을 당할 때마다 가슴속에 잘 다져져 있던 흙덩이가 와르르 허물어지는 것 같아 조금은 개운해졌다. 사촌동생들이 그렇게 세게 등짝을 때리는데 그날따라 밉지도 않았다. 여자는 누가 지금 자기에게 인디안밥을 시원하게 갈겨줬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인디안밥이 아니라도 기분만 나아진다면 뭐든 괜찮을 것만 같았다.

저기야.

비슷비슷한 다세대주택 중 한 동을 가리키며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여자의 뒤를 따라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6. 두 잇(Do it)

흠, 책이 참 많네.

책꽂이 앞에 선 남자는 를 뽑아들고 몇 장 넘기더니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여자는 남자가 책꽂이에서 자신이 숨기고 싶어하는 개인정보나 성격까지 읽어낼까봐 부끄러워졌다. 다행히 남자는 책에 금방 흥미를 잃고 벌써 다른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뭐야?

아, 그거 내일 1인시위 나갈 때 할 어깨띠.

1인시위는 왜?

남자가 자리에 앉아 빈 잔에 맥주를 따르며 반문했다.

지금 다니는 학교가 어쩌면 없어질지도 모르거든. 그래서….

여자는 학교 이름도 전공도 학년도 말하지 않았다.

에이, 설마 학교를 무슨 하루아침에 홀랑 없애겠어?

남자는 학교 이름도 묻지 않았다.

‘설마’ 했던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데.

여자는 남자의 말에 기분이 상했지만 담담한 말투로 되물었다.

하긴 그렇긴 하지. 정말… 그래.

남자가 힘없이 맞장구쳤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맥주를 마시며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잠에서 깨어나면 설마 했던 일, 말도 안 되는 일, 믿을 수 없는 일이 가장 먼저 일어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일은 아주 가끔씩 좋은 일일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나쁜 일이었다. 여자는 그 일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회상해보았다. 그것은 남의 일이기도 했고 동시에 여자 본인의 일이기도 했다. 마치 깊은 구덩이에 혼자 떨어져 누군가 한 삽, 두 삽, 세 삽 떠넣는 흙을 맞는 듯한 느낌이 엄습했다. 구덩이는 점차 흙으로 가득 찬다. 이윽고 그의 자살에 관한 회상까지 마치면 마지막 한 삽의 흙이 여자의 머리 위로 듬뿍 쏟아진다. 지금껏 일어난 일들보다 더 나쁜 일이 어딘가에서 몰래 일어나는 중이라는 걸 흙더미 속에 파묻힌 여자는 분명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시간에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술 마시는 일이 고작이다…. 두 사람은 경쟁하듯 술을 마셨다. 취한 여자는 남자에게 내일 있을 1인시위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줬다. 그래서 예쁜 핑크색 비키니와 태닝 오일을 장만했다고, 춤출 음악도 신나는 90년대 댄스곡으로만 골라 MP3 플레이어에 다 넣어놨다고, 오늘은 아침부터 2시간 넘게 춤 연습을 했더니 종아리 근육이 아프다고, 그렇지만 이제 다 소용없는 짓이라고 주정을 했다. 남자는 한참을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너, 검은색 비키니 있어?

있어. 왜?

그냥 해. 검은색 비키니 입고, 머리에 하얀 국화 꽂고 춤춰. 욕 좀 먹으면 어때.

하긴, 그러면 추모 퍼포먼스도 되고 1인시위도 되네.

여자는 갑자기 정신이 맑아졌다. 남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의 빈 잔에 맥주를 채워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둘은 술이 바닥날 때까지 마셔댔다.

아~ 진짜 기분 꿀꿀해 죽겠네.

남자가 기지개를 켜며 하품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텅 빈 페트병을 만지작거렸다.

너 아까 자살하고 싶다고 했지.

응.

아직도 죽고 싶니?

여자의 진지한 얼굴을 보자 남자는 웃으며 받아쳤다.

여기서는 안 죽을 테니까 걱정 마. 난 아무도 없는 조용한 데서 눈에 안 띄게 죽을 거다. 그래도 내가 어디 가서 민폐는 안 끼치는 타입이거든.

야!

여자의 큰 목소리에 시츄가 잠에서 깨어나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어떻게 죽든 일단 자살하면 무조건 다 민폐야. 시체 찾느라 경찰이랑 셰퍼드도 생고생이지, 너희 가족도 걱정하지, 시체를 만약 찾으면 또 시체 치우는 사람 비위 상하지, 너 하나 때문에 완전 두루두루 민폐잖아, 바보야.

정적이 흘렀다. 남자는 일어나 침대로 갔다. 그리고 대자로 드러누워 천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럼 죽지 말까?

그래, 누구 좋으라고 죽니.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야지.

죽지 않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우울함이 없어지냐?

여자는 남자 옆에 털썩 눕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입 닥치고 그거 하자.

7. 인디안밥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체위를 바꿨다. 여자는 성생활을 시작한 이래 창피해서 절대 요구하지 못했던 ‘더 세게’나 ‘뒤에서’를 외쳤다. 젖은 살끼리 규칙적으로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시츄는 침대 밑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이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위로 올라와.

남자는 여자의 팔을 끌어당기며 누웠다. 여자는 허벅지 근육이 뻐근할 정도로 열심히 움직였다. 침대 위에 콘돔의 비닐포장이 굴러다녔다. 남자의 양손이 여자의 상반신을 더듬었다. 시츄가 안절부절못하면서 남자 머리맡의 침대 가장자리에 앞발을 걸쳤다. 곧 침대 위로 점프할 기세였다.

안 돼!

엄한 목소리로 여자가 꾸짖었다. 놀라서 굳은 쪽은 시츄가 아니라 남자였다.

너 말구.

여자는 침대에서 내려와 시츄를 번쩍 들어다 밖에 내놓고 방문을 닫았다. 남자는 침대 위에 여자를 무릎 꿇고 엎드리게 했다. 바각바각바각, 철퍽철퍽철퍽. 방 밖의 개가 발톱으로 방문을 긁으며 들여보내 달라고 떼쓰는 동안, 방 안의 두 인간은 교미하는 개들처럼 행위 자체에만 몰두했다. 갈수록 깊숙하게 들어오는 남자의 방식이 여자는 이상스레 좋아서, 더 세게 해달라고, 부끄럽다는 의식 없이 애원했다. 그러자 남자는 이것이 최후의 행위라도 되는 것처럼 절박한 기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여자는 살살 해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방문을 긁던 시츄는 이제 아예 짖어댔다. 개 짖는 소리는 여자의 귀에 소음이 아니라 아득한 환청처럼 들렸다. 점차 모든 생각들이 휘발했다. 여자는 몸이 간지러웠다. 남자의 움직임에 맞춰 자기의 온몸이 가뭄 든 논바닥처럼 갈라지고, 그 틈으로 검은 흙덩이가 후두두둑 쏟아져나오는 느낌이었다. 여자는 눈을 감고 흙이 침대 시트 위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아 눈을 다시 뜨자, 털려나온 흙이 아주 작은 무덤처럼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나왔을 꼭대기 부분의 흙은 백사장의 모래만큼이나 고왔다. 여자는 그 미세한 입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절박한 신음 한 번을 토해낸 남자는 드디어 멈추었다. 그는 여자의 등에 엎어진 채 서서히 허물어졌다. 두 사람은 한 몸인 채 흙무덤 위로 쓰러졌다. 참기 힘든 잠이 찾아왔다. 이것은 여자가 살아오면서 지금껏 겪어본 모든 것 중 가장 훌륭한 ‘인디안밥’이었다.

8. 둘이 추는 춤

눈 뜨자마자 여자는 이불부터 걷어봤다. 하늘색 침대 시트는 음모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붙어 있을 뿐 깨끗했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팠지만 여자는 방 안을 꼼꼼히 살펴보려 애썼다. 책상 위에는 그녀가 어제 입었던 검정 원피스와 속옷이 얌전히 개켜진 상태로 놓여 있고, 창문은 반이나 열려 있어 바람이 들어왔다. 조금 열린 방문 사이로 시츄가 쪼르르 달려와 여자에게 꼬리를 흔들었다. 여자는 방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래된 중고 냉장고가 웅 하고 숨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자 그녀는 알몸 그대로 방을 나갔다.

남자가 신고 온 검은 캔버스화는 현관에 없었다. 냉장고 옆 시츄의 물그릇에 맑은 물이 담겨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TV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잠깐 나갔다 올게’라고 적혀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여자는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 수영복 가지러 집에 왔어.

수영복은 왜?

너랑 같이 춤추려고.

정말? 왜? 넌 우리 학교 학생도 아닌데….

그냥. 같이 추고 싶어.

1인시위라서 같이 출 순 없는데. 나 있는 데서 20m 안에 있음 불법이야.

그럼 20m 1cm 떨어져서 추면 되지 뭐.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게.

더 이상 봄바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직 여름바람도 아닌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어와 흙냄새 밴 여자의 맨몸을 어루만졌다. 별안간 웃음이 나왔다. 여자는 서랍장을 뒤져 검은 비키니를 찾아내 입었다. 그리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봐주는 이도 없고 음악도 없지만 유쾌한 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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