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선한 손길의 사회 세계[손바닥문학상 우수상]

송새옷
등록 2025-01-04 21:05 수정 2025-01-09 08:32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1

 

제발 그만, 손목의 스마트워치가 울린다. 진동이다. 노크하듯이 두 번. 지잉 지잉. 본드로 측정된 본인의 스트레스 상태는 ‘심각’이므로 진동 세기는 가장 약한 수준지만, 진동은 지잉 지잉 머리뼈까지 울린다.

나는 급히 주변을 돌아본다. 스트레스를 찾는다. 36시간 완전한 휴식을 보장받기 위해서, 스트레스 상태를 ‘매우 심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평온한 휴식을 위해 스트레스 최고점을 찍어야 한다.

스트레스가 될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스트레스를 증량하는 데는 혐오만큼 쉽고 간단한 것이 없다. 지금 내 옆 도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99.99% 운전 자동화가 실행된 이후로 도로 교통사고 사망률은 최근 0.1% 아래로 급감했다. 그래서 혐오를 찾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도로의 풍경에 평화로움이 과하다. 불법 주차된 차가 차선을 막고, 막무가내로 끼어든 차는 브레이크등을 깜빡거리고, 횡단보도 앞에서 뒤차는 클랙슨을 울리고…. ‘본드’ 이전의 풍경은 찾아볼 수 없다.

이륜차에도 예외는 없다. 저 빨간 혼다 발키리는 느릿느릿 자전거 도로 위를 기어가고 있다. 시내 배기음 제한 기준 때문일 것이다. 오토바이를 추월하는 전기자전거는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있다. 레이싱 슈트를 입은 라이더는 고개를 푹 숙인다.

지잉, 지잉. 또 한 번 진동이 울린다. ‘서윤님이 위치한 곳에서 20m 떨어진 곳에 버려진 캔이 있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메시지를 읽었다. 도로를 쳐다보다 그만 조건반사적으로 메시지를 확인해버렸다. 나는 캔을 주워야 한다. 메시지를 확인한 내 잘못이다. 못 본 척 가만히 내버려두고 알림이 울린 지점에서 멀리 떨어지기만 하면 그만인데, 나는 충실하게도 메시지를 확인해버렸다. 본드가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다. 본드는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캔이 있다는 사실만 알려준다. 그러나 나는 캔을 주워야 한다는 것을 안다.

“어휴….” 체념과 짜증을 반반 섞은 한숨을 길게 내뿜으며 걸음을 옮긴다. 스마트워치에 표시된 지도의 위치를 찾아가본다. 그런데 나 혼자가 아니다. 셋이 있다. 세 사람은 각자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꼭짓점을 지키고 있다. 그 가운데에 소시지 통조림이 떨어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맛없는 소시지 먹어보기? 얼마 전 에스엔에스(SNS) 유행을 탔던 것이다. 시시티브이(CCTV) 드론은 아무 소리 없이 공중에 떠 있다.

나는 이등변삼각형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선다.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는 필요 없다. 무슨 일로 모여 있어요? 물을 것도 없다. 쉽게 알 수 있다. CCTV 드론은 길바닥에 버려진 캔을 발견했고, 드론에 내장된 본드는 버려진 캔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다’ ‘안 한다’ 둘 중 하나다. 스트레스 지수를 끌어올리는 것에 실패했으므로 ‘못 한다’의 선택지는 없다. ‘한다’의 선택지는 물리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된다. 포인트를 쌓아 선행 등급을 높이면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공영주차장 무료 이용, 대중교통 운임 무료, 금융 우대, 전용 민원 서비스, 세금 환급, 취업 가산점, 공무원 시험 가산점, 상품권 지급 따위의 혜택이 등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된다.

‘안 한다’의 선택지에 불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를 일이 된다. 사고가 발생했다고 치자.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이 캔을 밟고 넘어져 크게 다치는 사고가 일어난다 해도 나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없다. 나에게 알려줄 뿐이다.

[5살 아동 최○○ 군은 캔을 밟고 넘어져 앞니가 부러지고 이마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길가에서 달리기하는 어린아이를 통제하지 못한 보호자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누군가 캔을 주워주기만 했다면…] 하는 식으로 알려준다.

그래서 진짜 내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알게 되면 또 다르다. 찝찝함과 죄책감 사이를 진자운동 하는 어떤 감정이 오랫동안 달라붙는다.

나에게는 딱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 주말 오전 11시였다. 알림이 울렸다. [서윤님의 이웃 102동 702호 김지훈님께서 오늘은 빵과 우유를 구매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지를 받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내 음성을 인식한 본드는 똑같은 메시지를 다시 띄워주었다. [서윤님의 이웃 102동 702호 김지훈님께서 오늘은 빵과 우유를 구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메시지를 받았다.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씩 3주 동안 총 세 번 받았다. [102동 702호 김지훈님께서 목숨을 비관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안부를 주고받는 이웃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2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스트레스 수준을 ‘매우 심각’으로 끌어올리는 것뿐이다. 캔 하나 줍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길바닥에 버려진 캔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옆구리가 찢어진 캔에서 쏟아져 나온 국물은 바닥을 적시고 있다. 역겨운 냄새를 풍긴다. 안에 든 소시지는 튀어나온 내장처럼 세상 밖을 향하고 있다.

나는 버스를 타야 한다.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 길바닥의 저 냄새나는 쓰레기를 내 손으로 처리할 수 없다.

“아니, 그러니까 이거 테러 아닐까요?”

이등변삼각형의 꼭짓점 중 한 명이 말을 꺼낸다. 금테 안경을 쓴 중년이다. 금테 안경의 얼굴은 잔뜩 상기돼 있다. 이미 서로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 옆, 전자팔찌는 세상의 피곤함을 다 끌어안은 모습이다. 어깨는 축 처져 있고 눈은 반쯤 감겨 있다. 이등변삼각형에서 꼭지각에 서 있는 트렌치코트만 방긋방긋 웃고 있다.

“네? 테러요?” 전자팔찌가 되묻는다.

“저, 죄송한데 알아들으셨으면 그렇게 되묻지 말아주세요.”

“아, 네….”

본드를 사용하지 않는 극소수 인원 중 몇몇이 길가에 쓰레기를 투하하거나 CCTV 드론을 새총 따위로 공격한다는 뉴스는 쉽게 접할 수 있는데, 테러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혹시? 금테 안경은 혹시 ‘본더’라고 불리는 본드의 신봉자인가. 감히 본드가 만드는 사회질서를 공격하다니, 생각하며 잔뜩 달아오른 것인가.

음…, 아니다. 금테 안경이 진짜 ‘본더’라면 돈이라도 줍는 것처럼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캔을 주워 들었을 것이다.

본드가 만드는 사회질서라는 것은 ‘선한 손길의 사회 세계’를 말한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못 본 척 지나치지 않고, 길거리의 쓰레기 같은 것은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 손으로 깨끗하게 치우는 이상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복잡하게는 알고 싶지 않다. ‘본드와 함께 건설하는 선한 손길의 사회 세계’라는 10시간짜리 오프라인 강의를 들으면 선행 점수 30점을 준다는데, 사이비종교 모임 같은 곳에는 참석하고 싶지 않다. 내 주말은 소중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본드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본드는 사장에게 지시를 내리고, 사장은 본드의 지시를 전달하고, 직원들은 본드를 사용해 일을 처리한다. 본드가 없으면 출입이 제한되는 식당이나 상점도 많다. ‘5살 이하 어린이 및 노약자는 이용을 금하여 주십시오’ ‘개봉 시 절단 부분이 날카로우니 주의하십시오’ ‘밀·대두·우유에 민감한 반응이 있으신 분은 섭취를 금합니다’ 등 경고문의 역할을 본드가 대신한다. 상점 입장에서는 본드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온갖 법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진짜 본더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스마트 안경을 쓴 트렌치코트다. 메뉴판의 메뉴를 정할 때도 본드가 골라주는 음식을 먹고, 옷을 고를 때나 화장할 때도 본드가 추천해주는 조합과 컬러를 따르고, 대화하며 상대의 얼굴을 살필 때도 본드의 분석을 믿고 따르는 충실한 본더들의 상징이 저 스마트 안경이다. 눈으로 보는 세상을 본드와 공유하며 삶의 전반을 본드에게 내맡기는 것이다. 양손에는 묵직한 쇼핑백이 들려 있으니, 당장 캔을 줍지 않는 것도 설명된다. ‘이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하지…’ 고민하고 있을 수 있다.

셋 중에 남은 한 사람은 전자팔찌다. 무슨 죄를 저질러서 팔찌까지 차고 있을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궁금하지도 않다. 이런 범죄자가 쓰레기를 주울까? 할 수도 있겠지만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선행 점수를 차곡차곡 쌓아 전자팔찌 착용 기간을 줄여볼 수 있다.

제발, 아무나. 나는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기다린다. 변명이라고 하면 변명이겠지만, 나는 지금 ‘심각’ 상태다. ‘심각’ 상태도 말 그대로 심각한 것 아닌가.

“자,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다들 선행 등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말을 꺼낸 사람은 트렌치코트다.

“그건, 왜 물으시나요?”

묻는 사람은 전자팔찌다.

“제가 묻는 것은 양보하기 위함입니다. 보십시오. 보통 쓰레기가 아닙니다. 이렇게 더러운 쓰레기를 처리하면 선행 점수가 1.5점은 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플로리스(Flawless) 등급입니다. 최고 등급을 달성했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등급 제일 낮은 사람한테 기회를 줄 테니 얼른 주워서 점수를 올려라, 이런 뜻이지요?”

트렌치코트의 말을 자르고 묻는 사람은 금테 안경이다.

“저 그래도 등급은 보여주세요. 진짜 플로리스 등급이 맞는지.”

전자팔찌의 요구에 트렌치코트는 양손의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안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아날로그 지갑을 꺼내 든다.

“여기, 보십시오.”

지갑에서 꺼내 든 것은 하얀 명함이다. 명함 가운데 ‘Flawless’ 글자는 양각돼 있고, 그 아래 이름은 금박으로 프린트돼 있다.

“혹시, 인증까지 필요하실까요?”

트렌치코트는 명함을 뒤집어 뒷면의 정보무늬(QR코드)까지 보여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진짜 플로리스 등급이라니 대단하시군요.”

전자팔찌의 말은 국어책을 읽는 듯하여, 감탄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다.

저 명함이라는 것은 일종의 명예시민증 같은 것이다. 나도 속으로는 놀랐다. 예상은 했지만, 본더 중에서도 최고의 본더를 만나다니, 저런 것을 지갑에 넣고 다니며 자랑스럽게 보여주다니….

“그럼 제가 제시한 방법대로 해볼까요?”

묻는 트렌치코트의 시선은 나를 향한다. 따라서 나머지 두 사람의 시선도 나를 향한다. 삼각형 밖에 서서 그들의 대화를 관람하던 나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인다. 전자팔찌는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나는 조금 빠져 있을 테니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결해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죠? 아까 걸어올 때도 누가 좀 주워줬으면 좋겠다고 느릿느릿 걸으셨죠?’라고 묻는 것 같다.

맞다.

“나 바빠요. 얼른 서로 등급이나 확인합시다.”

금테 안경은 스마트워치를 두드린다. 금테 안경의 등급은 3등급의 VS1이다. 나보다 높은 등급이지만 걱정할 것은 아니다. 설마, 내가 전자팔찌보다는 높겠지…. 스트랩에 주황색 점이 표시된 전자팔찌는 아무나 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도소 밖에서 남은 형기를 채우고 있는 가석방자라는 뜻이다. 교도소 생활을 얼마나 잘해서 가석방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범죄자는 범죄자다.

‘설마 아니겠지, 범죄자보다 낮은 등급은 아니겠지.’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싸늘하다.

전자팔찌는 눈을 반쯤 감고 전자팔찌 화면을 두드린다. 전자팔찌의 등급은 2등급의 VVS2다. 하 하 하.

“오, 등급이 꽤 높으시군요.”

트렌치코트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낼 때보다 더 활짝 웃는 얼굴로 전자팔찌를 바라본다.

“뭐, 제가 착한 사람이라서 등급이 높은 건 아니고요. 이 팔찌 빨리 풀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한 거예요. 그리고 운이 좀 좋았거든요. 도로에 뛰어든 아이를 구해줄 기회가 있어서…. 저는 좀 다쳤지만, 뭐 어쨌든 목표 등급만큼 등급은 다 올렸어요. 그래서 다음주에는 이 팔찌도 끊어요.”

“오, 어린아이를 구하시다니.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스스로를 교화하셨다고 해도 되겠어요. 그러면 혹시 어린아이를 구해준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어떤 상황이었나요? 공을 떨어트린 어린아이였나요? 선생님 몸은 괜찮으신가요? 많이 다치셨나요? 혹시 후유증 같은 게 남으셨다면 제가 아는 병원에서 치료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전자팔찌를 바라보는 트렌치코트의 눈빛은 반짝이다 못해 달려들어 키스라도 퍼부을 기세다.

“아니, 제발. 그런 이야기는 둘이 따로 하고 빨리빨리 좀 진행합시다.”

금테 안경은 끓고 있다. 문제는 본인이다. 내 등급은 3등급의 VS2다. 내가 막살아서 등급이 낮은 것은 아니다. 4등급의 SI3 등급에서 시작해 나름으로 열심히 몇 단계나 올린 것이다. 등급이 떨어지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범죄자보다 더 낮은 등급의 인간이다.

“그러면, 이제 저분 등급만 확인해보면 되겠네요.” 전자팔찌가 묻는다.

“빨리빨리 좀 합시다. 지금 길바닥 쓰레기 하나 때문에 뭔 짓입니까.” 도망칠까? 머리가 아프다. 결국 이 쓰레기는 내가 치워야 하는 건가. 102동 702호 김지훈님을 찾아갔어야 하나. 119에 신고라도 했어야 하나. 문을 부수고 들어갔으면 더 높은 점수를 받았을까. 집에 도끼 같은 게 있나. 아니다, 지금은 이 캔만 생각하자. 이 냄새나는 소시지 캔을 들고… 쓰레기통을 찾아가고… 아, 음식물은 쓰레기통에 버릴 수 없다. 안에 든 소시지를 몰래 버렸다가는 쓰레기통 위에 설치된 CCTV 분석에 걸려 벌금을 맞을 것이고, 그러면 내 등급까지 떨어질 것이고…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회사까지 저 캔을 들고 가야 하는가. 회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본드에 미친 사장이다. 연이은 사업 실패로 자살을 생각하던 중 초지능 본드가 출시되었단다. 사장 말로는 운명처럼 느껴졌다고, 계시를 받았다나 뭐라나. 사장은 진성 본더가 되어 강소 기업을 일구는 데 성공했다. 본드가 시키는 대로 다 했단다.

그런데 나는 오늘 본드의 계획을 망쳤다. 본드가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대차게 말아먹었다.

“아, 좀 빨리. 뭔 생각을 해요.”

“네, 네…, 제 등급은 VS2예요.”

나는 꼭꼭 숨겨둔 비밀을 실토하듯 말한다.

“아! 빨리 좀 말하지! 그러면 얼른 주우세요.”

금테 안경은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러자 트렌치코트는 주먹 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 “잠깐만요. 진정하세요. 명령은 안 돼요.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선행은 진짜 선행이 아니에요.”

“지금 저분은 명령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끼리 정했잖아요. 등급이 제일 낮은 사람이 이 쓰레기를 줍기…”

“아니! 좀! 제발! 이 ×× 쓰레기 하나 때문에 뭔 지랄이야. ×××. 진짜. 빨리 주워. 아오, 진짜.”

금테 안경은 결국 욕을 해버린다. 나는 화도 안 난다. 내 욕을 대신 해주는 것 같다.

“그만. 그만. 어르신 진정하세요.” 트렌치코트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한다.

“누가 어르신이야, 바빠 죽겠는데, 저는 갈 테니까, 이제 여러분께서 알아서 하세요. 저는 이만 갑니다. 이 ×××들아.”

“어르신, 제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이제 진짜 끝났어요. 우리가 할 일은 이분에게 여기 쓰레기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알려주기만 하면 돼요. 어르신, 지금 여기까지 있으셨잖아요. 이 쓰레기가 아름답게 치워지는 모습은 보고 가셔야지요.” 나도 이제 지친다. 지친다기보다는 곧 미칠 것 같다. 그래 내가 빨리 줍고 끝내자. 저 소시지는 내가 먹어 치워서라도 없애버리자.

“아니, 알겠으니까. 어르신이라고 하지 마요.” 트렌치코트는 금테 안경의 등을 쓰다듬고 있다.

 

3

 

이까짓 쓰레기 때문에 뭐 하는 짓인지.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쓰레기가 여기 있어요.”

트렌치코트가 말한다. 그러자,

“쓰레기가 여기 있어요.”

“쓰레기가 여기 있어요.”

전자팔찌와 금테 안경이 따라 말한다.

“네, 알겠어요. 저도 알아요. 여기 쓰레기 있어요. 네, 보이네요. 이제 나는 쓰레기를 주울 거예요.”

“알면 빨리….”

“명령하면 안 돼요. 그럼 다 같이 한 번만 해볼까요.”

“쓰레기가 여기 있어요.”

“쓰레기가 여기 있어요.”

“쓰레기가 여기 있어요.”

나는 이 미친 소리를 더 듣기 전에 우선 허리를 숙인다. 확실히 쓰레기를 줍겠다는 뜻이다.

“오, 아름다워요. 이제 진짜 끝이군요.”

고개를 들어 확인해볼 수 없지만 트렌치코트의 눈빛은 가열되고 있을 것이다. 정수리가 뜨겁다.

“쓰레기가 여기 있어요. 쓰레기가 여기 있어요. 이, 시발 쓰레기가 여기 있다고.”

중년은 잠깐을 못 참는다. 나는 허리를 숙인 자세로 엉금엉금 걸음을 옮긴다. 손을 뻗는다. 날카롭게 찢어진 캔에 손을 뻗는다. 이제 끝이다.

그런데 이때 구원의 소리가 들린다. “삑! 삑! 삑!” 스트레스 지수가 ‘매우 심각’에 도달했다는 경고음이다.

삑 삑 소리가 멈추고 순간 정적이 찾아온다. 트렌치코트는 나에게 다가오며 “선생님, 죄송해요. 저 어르신 때문에 제가 잠시 스마트 안경을 꺼놓아서 선생님의 상태를 분석하지 못했어요. 스트레스 상태가 심각한 분인 줄 알았으면 배려해드렸을 텐데.”

나는 천천히 허리를 편다. 방긋 웃음이 새어 나온다. 찾았다. 나는 완전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스트레스 ‘매우 심각’ 상태에서는 업무상 모든 연락이 차단된다. 법적으로 그렇다. 출근도 못한다. 오늘 일을 망친 것도 나에게는 아무 일 아닌 것이 된다.

본드가 만들어준 완벽한 자료와 완벽한 대본을 가지고 어떻게 발표를 망칠 수 있냐고, 사장의 개 같은 소리를 안 들어도 된다. 분석 결과-발표자의 역량 부족으로 내용 전달이 미흡하였음, 이딴 보고서를 써내고 쩔쩔매지 않아도 된다. 분석 결과-발표자의 스트레스 이슈로 제대로 된 발표를 수행하지 못하였음. 근로 환경 개선 조사 및 신속한 조치 요구. 보고서는 공문이 된다.

“삑! 삑! 삑!”

또 한 번 경고음이 울리고, 알림이 뜬다.

[현재 서윤님은 스트레스 매우 심각 상태입니다. 문제 상황에서 벗어나 가장 편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십시오. 서윤님에게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본드는 절대로 틀리지 않아, 사장 말이 맞다. 나는 충실한 본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다. 본드의 초지능, 아 이것이 선한 손길의 사회 세계인가.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플로리스님의 손길이 따뜻하다.

“이 쓰레기 내가 주울 거예요. 지금부터 입 밖으로 한마디도 꺼내지 마세요. 내가 주울 거예요. 토 달지 마세요.”

금테 안경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전자팔찌는 눈을 감는다.

네가 줍든 내가 줍든, 내 알 바 아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이제 모르는 일이다. 스트레스는 해방감에 취약하지만, 나는 걱정 없이 이 자유로운 감각을 누릴 수 있다. 본드의 경고음은 절대적이다. 36시간 휴식은 무조건 보장받는다. 거기다 재난지원금 같은 현금까지.

 

나는 해방이다. 하 하 하!

<끝>

 

수상소감- 지금 AI가 ‘걱정’하는 것
제16회 손바닥문학상 우수상 수상자 송새옷씨. 류우종 기자

제16회 손바닥문학상 우수상 수상자 송새옷씨. 류우종 기자


제가 쓴 것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블랙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화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다 읽고 나서는 떠오르는 질문이 있어 챗지피티에 물어봤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서적 지원입니다. 감정적으로 지지받을 때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할 힘과 회복력을 얻으며, 이는 다른 모든 필요가 잘 이루어지도록 돕는 기본적인 바탕이 됩니다. 이러한 정서적 지원을 에이아이(AI)가 일부 제공할 수 있지만, 진정한 공감이나 인간 간의 결속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위의 내용은 대화를 요약한 것입니다.

AI는 지금 ‘우리' 사회를 걱정하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 뜻깊은 공모를 이어가는 한겨레 21 과 제 글을 읽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