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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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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신조어 조금 피로해…K는 묵음이면 좋겠어요

손바닥문학상 심사위원 서윤빈 소설가
들리지 않는 K, 침묵당한 K, K를 지운 K… K를 갱신하는 모든 상상력을 환영한다
등록 2025-11-13 22:00 수정 2025-11-15 12:08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에 설치된 케이팝데몬헌터스 테마존. 업계 불문 온갖 대상에 ‘K-’가 달라붙는 가운데, K 바깥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EPA 연합뉴스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에 설치된 케이팝데몬헌터스 테마존. 업계 불문 온갖 대상에 ‘K-’가 달라붙는 가운데, K 바깥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EPA 연합뉴스


 

제17회 손바닥문학상 주제는 케이(K)다. 심사위원 서윤빈 소설가가 ‘K로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글을 보내왔다. _편집자

 

프란츠 카프카의 ‘성’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주인공의 이름이 K라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소설의 문장 속에서 주인공은 내내 K라고 지칭되지만, 등장인물들은 아무도 K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독자는 K가 정말로 주인공의 이름인지 아니면 일종의 약어나 기호에 불과한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항간에 떠도는 말에 따르면 K는 카프카의 첫 글자를 딴 것이라고도 하고, 작가의 다른 소설 ‘소송’에 나오는 요제프 K와 동일 인물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양쪽 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성에 도착했지만 들어가지는 못하는 K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독자는 어쨌든 주인공을 K라고 부르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대상에 달라붙는 ‘K-’

 

K 브랜딩을 처음 접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이 민망함보다도 당혹스러움이었던 것은 어쩌면 ‘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코리안뮤직(Korean Music)이라는 표기 대신 K를 붙이고 성공한 케이팝(K-pop)의 사례에서 영감을 받은 건지 언젠가부터 업계를 불문하고 온갖 대상에 ‘K-’가 달라붙기 시작했다. K-드라마, K-뷰티, K-푸드…, 심지어 사실상 ‘역전앞’처럼 동어반복이나 다름없는 K-웹툰 같은 말까지 만들어졌다. ‘성’의 K가 소실점처럼 한없이 왜소해지는 것과 정반대로, 코리아(Korea)의 K는 한강의 기적처럼 한없이 팽창했다. 어느새 우리는 K를 긍정적 의미보다는 K-장녀나 K-자살률처럼 자조적 의미로 더 많이 쓰고 있다. 정부와 언론이 툭하면 만들어내는 K-신조어에 우리는 피로해졌고, 동아시아 3국 특유의 서구중심적 사대주의를 감지한다.

토종 청방배추로 담근 김장을 텃밭에 묻은 항아리에 담았다. 한겨레 자료

토종 청방배추로 담근 김장을 텃밭에 묻은 항아리에 담았다. 한겨레 자료


 

그래서일까. 내게 고유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K는 김치의 K뿐이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시골집을 찾던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김장으로 겨울맞이를 했다. 배추를 소금물에 담근 뒤 한나절이 지나면 배추는 숨이 죽었다. 고춧가루와 젓갈, 마늘 등을 버무려 양념을 준비하고, 두 차례 헹군 다음 말려둔 배추에 골고루 펴 발랐다. 배추를 항아리에 넣고 땅에 묻으면 그것으로 사람이 할 일은 끝이었다. 그 뒤의 일은 항아리 안에서 일어났고, 일주일 뒤면 식탁에 싱싱하고 맛있는 새 김치가 올라왔다.

슬그머니 K-소설을 김치로 바꿔 읽어보고 싶다. 김치가 된 배추는 원래의 배추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무언가도 아니다. 우리가 요즘 소비하는 매운 배추김치는 조선시대 중후반에 만들어졌다. 고추의 원산지는 놀랍게도 아메리카 대륙으로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에 전래해 18세기부터 김치의 재료가 되었다. K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한국적인 것과 뗄 수 없는 상징이 된 지금, K를 테마로 하는 소설에 요구되는 상상력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엔 수많은 K가 있다

 

Korea가 아닌 다른 K들에 관해 생각해보자. 문학의 K가 카프카의 전유물이 된 것처럼, 클래식 음악에서 K는 모차르트의 것이다. 독일 음악학자 루트비히 폰 쾨헬은 모차르트의 모든 작품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쾨헬 목록을 만들었다.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은 쾨헬 번호(Köchel-Verzeichnis)를 뜻하는 K 혹은 KV라는 약어 뒤에 고유 번호를 붙여 표시한다. 가령 ‘K. 310’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이고 ‘KV. 626’은 모차르트 레퀴엠이다.

K는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 중 하나인 케이온(Kaon)을 표기할 때 쓰는 문자이기도 하다. 케이온은 우리가 어떻게 우주에 존재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다. 태초에 무(無)가 있었고 우주는 빅뱅과 함께 시작됐다. 그런데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르면 빅뱅으로 물질이 생겨날 때는 그와 똑같은 양의 반물질이 생겨나야 한다. 물질과 반물질이 충돌하면 그 둘은 함께 소멸하고 무(無)가 된다.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물질과 반물질이 우주에 불균형하게 퍼져나가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케이온에는 그 불균형이 어째서 발생했는지에 관한 비밀이 숨어 있다.

지질학에서 K는 백악기의 약자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는 영화 ‘쥬라기 공원’으로 유명해졌지만 사실은 백악기의 공룡이다. 백악기는 6600만 년 전 지구에 소행성이 충돌하면서 끝났다. 소행성 충돌은 육상 생물의 75%가 멸종한 백악기-고진기 대멸종(K-Pg 멸종)을 일으켰고, 조류를 제외한 모든 공룡이 이때 지구에서 사라졌다.

그 밖에도 한국과 상관없는 수많은 K가 있다. 같은 K로 묶인 이들이 한국의 K를 만나면 어떤 놀라운 발효가 일어날까? 한 K는 어떻게 다른 K를 도울 수 있을까?

K를 지우면 그 자리에 무엇이 자라날까

 

도움에 관해 생각하니 또 다른 당혹스러움이 떠오른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받아쓰기 시험을 봐야 했다. 선생은 책상 사이를 거닐면서 똑같은 단어를 세 번씩 읽다가 연필을 놓고 있는 손이 보이면 들리는 대로 쓰면 된다고 윽박질렀다. 거짓말이었다. 당장 받아쓰기부터도 들리는 대로 쓰면 ‘바다쓰기’다.

내가 받아쓰기에서 해방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한국어 받아쓰기가 끝난 다음에는 영어 받아쓰기가 시작된 탓이었다. 영어 받아쓰기에는 묵음이 있어 특히 더 골치가 아팠다. Knight가 도대체 왜 ‘크나이트’가 아니라 ‘나이트’란 말인가? 어차피 소리 내지도 않을 거라면 왜 써야 하는가? 어린 마음에 나는 그렇게 툴툴거리곤 했다.

문두에 오는 K는 영어의 대표적인 묵음이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K가 있기에 Knight(기사)는 Night(밤)와 구별되는 다른 말이 된다. 이처럼 우리는 들리지 않는 K도 생각해볼 수 있다. 분명 우리 사회 어딘가에 있지만 침묵당한 K들. K-팝이 내세우는 아이돌 그룹의 화려함 이면에 자리한 노동착취나 불공정 계약의 그림자. 신원이 명확하지 않은 무연고 사망자 시민 K. 한국 특유의 불투명한 기업 운영으로 인해 국외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을 저평가하는 K-디스카운트. 사람들이 떠나면서 병원도 편의점도 사라져버린 K-동네. 피부색이나 사용하는 언어는 다를지라도 한국에서 살고 또 살아갈 외국에서 온 새로운 K들. 들리지 않는 K가 있는 한국은 그렇지 않은 한국과 분명히 다른 한국이다.

반대로 발음해야 하는 K를 발음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빨리빨리와 눈치보기가 사라진 한국 사회의 모습. 청소년이 대학 입시 외에는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에 20년 가까이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 혹은 K-장녀라든지 K-노조 같은 말이 필요 없어진 나라. 너무 비대해져 문제를 일으키는 K를 지우면 그 자리에 무엇이 자라날 수 있을까?

결국 문제는 지금의 K-한국이다. K를 테마로 하는 소설이란 한국적인 소설이 아니라 한국에 관한 소설이다. K를 갱신하는 모든 상상력을 환영한다.

 

서윤빈 소설가

 

제 17회 손바닥문학상을 기다립니다

대상 논픽션·픽션 불문 ‘K’를 주제로 한 문학글

분량 200자 원고지 50~70장 (원고 분량을 지켜주세요. 감점 요인이 됩니다.)

응모 방법 아래아한글이나 MS워드 파일로 작성해 전자우편(palm@hani.co.kr)으로 접수

*전자우편 제목에 [제17회 손바닥문학상 공모] 쓰고 ‘작품명’ ‘응모자 이름’ 포함, 전자우편 본문에 응모자 연락처 기재

마감 2025년 11월30일(일요일) 밤 12시

발표 12월19일 배포되는 한겨레21 제1594호(12월29일치)

상금 대상 300만원, 우수상 100만원(제세공과금 본인 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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