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천이 바람에 바르르 날리는 소리가 로비를 채웠다. 선린은 떨어지는 것과 눈이 마주쳤다. 하얀 가운은 홀을 휘감은 상승 기류를 역행하며 아주 잠깐 날았다. 머리가 밑으로 향한 신 선생은 선린을 보며 말을 뱉었다. “말할 수 없게 될 거야. 아무….” 신 선생이 말을 마치기 전에 로비 바닥이 쿵, 울렸다.”(‘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
최이아 작가의 중편소설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는 아비규환인 종합병원 로비에서 시작한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제 몸에 대한 통제기능을 상실한 듯 바닥에 연신 머리를 박아댄다. 2·3층에서 아래로 쿵 낙하하고, 회전문에 끼어서 파닥대고, 질주하다 기둥에 부딪혀 쓰러진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포개어지고 피가 작렬한다. 주인공 선린은 낙하하며 남긴 신 선생의 마지막 말 “말할 수 없게 될 거야”를 듣고 전 연인 아진을 떠올린다. ‘말 오염도’를 연구하고 집착하다 미쳐버린 것 같은 아진. 그러나 아진의 장황한 말에서 선린이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다. “진실이란 단어가 우스워진 세상, 말의 재현이 불가능해진 사회, 기획된 비문과 혐오의 일상화, 뭐든 안 듣고 사는 게 속 편한 세상, 쓰레기 같은 말….”
최이아 작가가 첫 에스에프(SF) 소설집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허블 펴냄)를 펴냈다. 책에 실린 6편의 작품 속 공간은 돈으로 젊음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비는 피부과, 미래가 깜깜한 대학원생이 있는 대학 실험실(랩), 결혼이주여성이 가부장제에 치여 사는 농촌, 80억 인구로 과밀화된 지구 등이다. 지구인이든 외계 행성인이든 그들의 욕망과 본성은 때로는 치졸하고 때로는 저열하며 그 속성은 영원하여, 오늘의 뒷면 같은 미래가 ‘으슬으슬하게’ 펼쳐진다. 정보라 작가는 최이아 소설집을 읽고 “읽으면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으슬으슬 무서워지는 순간들을 경험했다”며 추천했다.
언어가 사라진 세계를 작가는 어떻게 착안했을까. 2024년 10월2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최 작가는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꺼냈다. “2022년 10월29일 이태원 참사를 겪으며 쓰게 됐다. 그때 많은 분이 그랬지만, 나도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더 참담했던 것은 이후에 쏟아진 혐오적인 말들이었다. ‘놀러가서 그랬다’거나 ‘마약 하다가 그랬다’ 등 피해자를 비난하는 말은 물론,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책임을 미루다 못해 상황에 대해 빙글빙글 웃으며 농담하는 모습에 ‘저들에게서 언어를 빼앗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윽고 언어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비로소 말 대신 ‘정신 알갱이’를 통해 진심으로 소통하게 된 아진과 선린이 평온을 찾는다. 작가는 “다른 관점과 다른 상상력으로 사회적 참사 희생자 유가족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고, 미약하게나마 보듬는 글을 쓰고 싶었다. 위안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꼭 언어가 그 매개일 필요는 없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 작가는 2023년 2월 소설집에도 실린 단편 ‘제니의 역’으로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우수상을 받으며 작가로 등단했다. 경제지 기자로 8년간 일했다. 그러다 기자를 관두고 비영리법인에서 활동가로 일했다. “처음 ‘기자가 돼야겠다’ 마음먹었을 때는 ‘막연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더해, ‘약자를 위한 글을 쓰고 싶다’ ‘정의로운 글을 쓰고 싶다’는 이상만 똘똘 뭉친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기자 생활을 할 때는 기자에게 제공되는 알량한 편의에 안주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자신에 대한 회의감도 들고, 경제지 타깃 독자와 나의 처음 이상 간 괴리도 컸다. 일했던 곳은 중소형 매체였다. 노조가 없어서 노조를 만들려는 시도도 했지만, 작은 사업장일수록 구조의 한계 때문에 쉽지 않았다. 무기력감이 들던 차에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 직접 활동해볼 기회가 생겨 활동가로 일했다.”
소설집에도 실린 등단작 ‘제니의 역’에는 부조리, 무기력을 활동으로 풀어낸 그의 삶의 태도가 녹아 있다. ‘제니’는 “인간의 언어를 연결하고 기록하는 마인드베이스 기능을 갖춘 지능형 로봇”이다. 세계 각국의 이주여성들이 참깨를 털고 고추 건조기를 돌리고 저녁을 짓는 농촌에서 한 이주여성이 시어머니 살인 용의자가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록불과 빨간불을 깜빡이며 언어를 연결하는 ‘제니’의 활약이 믿음직하다.
“엄마와 마을 여자들은 그녀에게 죄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 이즈음 마을 여자들은 우리 집에 자주 모였다. (…) 제니는 엄마가 태어난 나라의 언어를 그 옆의 여자가 자란 나라의 언어로, 또 이를 한국어로, 다시 각 나라의 언어로 연결했다. 여자들의 말소리는 모두 달랐지만, 이들의 대화는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았다.”(‘제니의 역’) 이들은 모여서 ‘이주여성 진술권 보장을 위한 제니 상시 동행 청원서’ ‘이장 후보자 등록 신청서’ 등을 만들어 ‘어떤 행동’을 예비한다. 소설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풀어가는 과정이 작가의 삶과 닮았다.
작가가 감각하는 ‘오늘, 여기’는 디스토피아다. ‘갈아드려요’에서 신사동 피부과 상담사로 일하는 수진은 2년치 연봉을 털어서 인공혈액을 맞는다. 팽팽하고 광나는 피부를 얻어야 한다. 로비에서 북적이는 지구인이건 행성인이건 ‘팽팽한’ 상담사를 선호한다. 2년치 연봉을 털어도 돈이 부족해 충분한 인공혈액을 맞지 못한 수진의 피부는 여전히 칙칙하고 늘어졌다. 수진의 상담실만 한산하다. 실적이 낮아 해고될 위기에 처한 수진은 자신을 바닥으로 내몰며 위험한 방법을 택한다. “기자이면서 앵커로 일하는 지인이 있다. 그가 자주 꾸는 꿈이 코에 있는 모공이 점점 커져서 자기 얼굴을 잡아먹는 내용이라고 하더라. 너무 무섭다고. 그래서 매일 피부과를 간다고 했다. 외모에 대한 평가가 없을 수 없는 조직이고, 사회다. 그런 이야기들에서 ‘갈아드려요’는 시작됐다.”
최이아 작가는 2023년 공모가 진행된 손바닥문학상 수상 작가이기도 하다. 2023년 12월 제15회 손바닥문학상에서 ‘비가 그칠 때까지’로 우수상을 받았다. 이례적으로 한국과학문학상을 받은 뒤 손바닥문학상에도 공모했다. “원래 손바닥문학상을 좋아했다. 신춘문예를 비롯한 기존 문예지에는 등단하기 위한 ‘기본 얼개·구조에 대한 공식’이 있다. 손바닥문학상은 그런 공식에서 벗어난 통통 튀는 글을 높이 평가하는 드문 공모전이다. 그래서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부터 손바닥문학상은 넣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손바닥문학상 수상작을 포함한 그의 작품들 속 인물과 세계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튀어오르고 낙하한다. “교수 비위 맞추며 노비처럼 일하”던 대학원생 진형은 실험실 에탄올로 밀주를 만들며 ‘일탈’을 꿈꾸다 실험실 정령 ‘모린’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다.(‘랩에서 생긴 일’) “섬 곳곳에 남아 있는 도륙의 각인”이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으로 표현되는 제주 4·3의 상처를 뒤로하고 ‘노비의 섬’을 떠나려는 ‘제4구역 노비 호노’는 살아서 떠나겠다는 진한 욕망으로 예측 불허의 방식으로 탈주를 감행한다.(‘푸리앙’) 손바닥문학상 수상작인 ‘비가 그칠 때까지’에서도 팔다리가 없는 빈민장애인 마을 ‘사지촌’이 폭우로 물이 차오르는 중에 머리가 우드득 뜯겨나는 김씨의 마지막 장면은 강렬하다.
최이아 작가에게 처음 소설을 쓰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손사래를 쳤다. “모든 사람은 본인만의 고유한 함수를 갖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작동될지 모르는데 ‘이건 하지 마라’ ‘저건 하라’ 같은 조언은 불필요하다. 쓰다보면 길이 생길 것 같다.” 한마디는 덧붙였다. “일단 쓰고, 계속 써야 한다.”
그도 화학 전공, 기자, 활동가 등 여러 고윳값이 조합돼 SF 작가로서의 길이 열렸다. 2019년 활동가로 일하면서 제2금융권 비정규직 노동자 심층면접(FGI)을 통해 들은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가 그에게 글을 쓰게 했다. “처음에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 하고 싶어, 그들의 비극적 현실을 그대로 썼다. 문학에 도전하는 입장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썼더니 진부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실에 너무 얽매이고 있다는 생각에 과학철학적 상상력, 사유를 보태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야기가 잘 풀렸다. 생전 써먹을 일 없을 줄 알았던 학부 전공도 뒤늦게 굉장히 도움이 된다.”
첫 소설집을 펴낸 최이아 작가는 지금 장편소설을 준비 중이다. 그의 고유한 함수가 새 작품에서도 멋진 값을 내어놓길. 그리고 또 다른 손바닥문학상에 도전하는 이들에게도 그들만의 함수가 멋진 그래프를 그려내길.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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