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알려준 뇌의 비밀, ‘과학, 화를 말하다’
연단에는 오늘 처음 만난 두 남녀가 마주 서 있다. 남성에게는 3분 이내에 앞에 선 여성이 화를 내도록 해보라는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의 ‘미션’이 주어졌다. 남성이 연방 곤란해하다가 3분이 거의 다 돼서야 여성에게 첫 질문을 던진다. “저, 어디 사십니까?” 청중의 폭소가 강연장 안을 가득 채운다. 정 교수의 ‘화’ 강의는 이 모의실험처럼 친근했지만 과학적이었고, 구체적이었지만 유쾌했다.
약한 강아지가 자꾸 짖는다정재승: ‘화’는 의사소통의 방해물이면서 강력한 메시지의 전달 도구다. 이 불쾌함과 적개심의 감정은 일상적이다. 앞의 모의실험처럼 처음 만난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일은 어렵다. 상대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나 기대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로 아내·남편·부모·형제처럼 뭔가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그러나 언제 사람들이 자제력을 잃을지 예측하기란 어렵다. 이처럼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의 ‘화’를 측정해 연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통상 행동의 제약, 좌절, 영역 침범, 불공정 등의 상황을 겪었을 때 화를 낸다. 흥미로운 것은 뇌에서 화를 내는 영역과 타인의 화를 감지해내는 영역이 같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화에 ‘공감’하고 화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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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에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화는 강력한 에너지, 즉 모티베이션(motivation)을 발생시킨다. 이는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 생존의 방어기제, 때로는 관계의 윤활유가 되기도 한다.
‘화’의 감정은 얼굴 표정으로 쉽게 읽힌다. 이모티콘을 통해 이를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주로 ‘눈 모양’을 변화시켜 이모티콘의 감정을 표현한다. 실제로 ‘눈’으로 상대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고 증명한 실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화난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강력한 상대의 표정은 재빨리 읽어내지만, 우리에게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메뚜기의 감정은 읽어낼 수 없다.
또한 강한 사람은 굳이 화를 낼 필요가 없다. 강아지가 으르렁거리고 컹컹 짖지 사자가 그러진 않는다. 우리는 주로 두려움이나 걱정 등을 감추려고 화를 낸다. 상대를 위협하고 자신의 공포를 감추기 위해서다.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은 결국 ‘약한’ 사람이다.
가정에서 부모가 아들과 딸의 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르다. 우리 사회는 여성의 화를 받아주는 시스템이 부족하다. 의외의 상황에서 여성의 화가 폭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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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폭발할 때의 핵심은 적절할 때, 적절한 사람들과 함께, 적절한 대상과 이유를 두고, 적절하게 터뜨리는 데 있다. 화를 내면서 상황을 ‘명확하고 단호하게’ 해결하되, 아주 가끔씩만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누군가 내게 화를 내면, 나는 그 3배 정도 더 화가 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따라서 화가 났을 때 상대방에게 화를 내지 말고 화가 났다는 걸 알려주는 정도로 배려하면, 상대방은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세상을 향해, 상대를 향해 ‘나 지금 화나 있다’고 쿨하게 알려주면서 살아가시기 바란다.
마음은 뇌 속에 있는 걸까오지혜: 강연을 듣고 나니 정 교수의 화 관리법이 궁금하다.
정재승: 누군가 내 차 앞에 끼어들면, 따라가서 다시 그 차 앞에 끼어들기를 하는 식이다. 상대방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소심한 복수지만 그렇게라도 알리는 것이다. “나 지금 화나 있거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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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혜: 화에 대한 내용이라서 그런지 심리학·정신분석학과도 밀접하게 관련되는 내용이 많았던 것 같다.
정재승: 실제로 미국에서 뇌를 공부할 때는 정신과 전공자들과 함께 연구를 했다. 심리학자들과 함께 연구할 부분도 있다. 지금까지 워낙 뇌에 대한 연구가 전무했기 때문에 블루오션 분야다. 많은 분들의 동참을 권한다.
청중1: 교사다. 10대 청소년을 가르치다 보면 화를 잘 참지 못하고 분출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개인적인 성향인지 아니면 이 시기의 특성이라고 봐야 하는지, 또 교사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궁금하다.
정재승: 공격적 성향을 가진 학생들은 약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이를 감추려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쉽게 화를 내지만 또 금방 후회를 한다. 이 경우 내가 화를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는 유형의 사람인지 알려주는 설문지를 함께 작성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자신이 어떤 타입인지 알면 자기 조절이 수월해진다. 10대의 뇌에 대해서는 1990년대까지 연구가 거의 전무했다. 10대는 합리적 사고의 영역인 전전두엽이 발달하는 과정에 있다. 몸은 컸지만 마음은 어린아이들이다. 관심을 갖고 배려하자.
오지혜: 10대가 될 아이를 둔 학부모로서, 그럼 전전두엽을 발달시키는 데 좋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정재승: 전전두엽을 발달시키는 데 가장 좋은 것이 네 가지 있다. 운동, 독서, 놀이, 여행이다. 놀이공원같이 뇌를 거의 쓰지 않는 장소보다는 아무것도 없어서 ‘뭐하고 놀지?’라고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뇌를 훨씬 많이 쓰게 된다. 골판지 하나를 주었을 때, 아이들은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가지고 논다. 사교육보다는 독서가 아이들의 전전두엽 발달에 훨씬 이롭다.
오지혜: 오늘 가서 당장 아이 장난감부터 치워야겠다. (청중 웃음)
청중2: 대학 새내기다. 자신의 화와 타인의 화를 인지해내는 뇌의 영역이 같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화에는 민감하지만 타인의 화에는 둔감한 것 같다. 용산 참사와 같은 경우가 그렇게 느껴진다.
정재승: 상대의 화를 인지해낸다고 해서 누구나 상대만큼 화를 내지는 않는다. 인지해내는 영역은 같지만 공감해내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거울뉴런’이라고 한다. 인지 영역이 발달했다고 해서 공감 영역도 발달한 건 아니다. 대체로 여성이 남성보다 공감 영역이 4배 정도 발달돼 있다.
청중3: 우리는 보통 ‘화가 나서 마음이 아프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면 마음은 뇌 안에 있는 것인가?
정재승: 철학적인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93% 정도의 사람들이 영혼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7% 정도가 아마 나처럼 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감정·의식·사고·행동의 대부분이 뇌에서 작동한다. 뇌가 마음이 살고 있는 방인 건 맞지만, 뇌만으로 마음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통로인 몸을 비롯해 다른 부분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뇌가 잘리면 마음이 없어지는 건 맞다. 따라서 뇌가 마음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 아닌가 생각한다.
용서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흐트러지는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라는 법정 스님의 말처럼, 이 ‘화’나게 하는 세상, “나 지금 화나 있거든” 하고 ‘쿨’하게 알리면서 차근차근 풀어보자. 아, 그렇다고 그냥 묻혀두거나 삭이면 ‘화병’ 난다는 정 교수의 말도 잊지 말아야겠다.
글 최고라 17기 독자편집위원·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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