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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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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OTL] 함량미달 사건을 또 보게 될 줄이야

조작간첩사건을 파해쳐온 한홍구 교수, 수사기관이 점 찍으면 간첩되던 시절을 돌아보다
등록 2008-09-10 13:40 수정 2020-05-03 04:25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더니 다 죽은 줄 알았던 국가보안법이 때아닌 회춘을 하고 있다. 통일 교육을 하는 전교조 선생님들을 잡아넣더니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 사건을 일으키고, 급기야 ‘미모’의 탈북자 여간첩 원정화를 체포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중에는 폐지됐던 ‘헹님뉴스’의 대사가 들려온다. “간첩이 간첩다워야 간첩이지.”

작은섬 어부들이 줄줄이 잡혀간 이유

나는 2004년 10월부터 꼬박 3년간 국정원과거사위원회에서 일했다. 수십 년 전의 간첩 사건들을 뒤적이면서 다시는 이런 함량 미달의 간첩을 못 볼 줄 알았다. 국정원과거사위에서 일하는 동안에 일심회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래도 그때는 간첩이냐 간첩‘단’이냐를 놓고 논란은 있었어도, 고문이나 가혹행위 등 불법 수사의 잡음은 없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더니, 조차 그 실체를 의심하는 한국판 ‘마타하리 사건’이 터졌다.

9월4일 오후 서울 중앙지방검찰청에서 김경수 수원지검 제2차장검사가 간첩 혐의로 구속기소된 원정화씨의 의붓아버지인 조선노동당 당원 김동순(63·구속기소)씨에 대한 수사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9월4일 오후 서울 중앙지방검찰청에서 김경수 수원지검 제2차장검사가 간첩 혐의로 구속기소된 원정화씨의 의붓아버지인 조선노동당 당원 김동순(63·구속기소)씨에 대한 수사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국정원과거사위 시절, 나는 조작 의혹이 제기되는 간첩 사건의 진실 규명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조사책임을 맡았다. 의심이 가는 사건은 많았지만 일단 16건을 추려서 검찰에서 기록을 복사해왔다. 그러나 시간과 인력의 부족으로 겨우 4건을 조사했을 뿐이다. 1980년대 대표적인 조작 간첩 사건인 ‘송씨 일가 사건’의 중심인물 송기복씨는 내게 자신은 ‘축복받은 간첩’이라며 울먹였다. 민주화운동 진영조차도 간첩이라면 외면하던 시절에 인권변호사들이 함께해주고, 대법원에서 두 번이나 무죄판결도 받아보았으며, 국정원이 사건을 재조사해 조작됐다고 얘기해주었으니, 그 수많은 간첩 중에 자기처럼 복 많이 받은 간첩도 없다는 것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함주명·강희철·차풍길 등 ‘간첩’들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아직 재심 절차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국정원·국방부·경찰의 과거사위원회 조사 결과 사건이 조작됐다고 결론이 난 사례도 여러 건이 있다. 한편에서는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잡는 일을 하고 있는데, 또 한편에서는 미래의 과거사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과거사위에서 간첩 사건을 매우 세밀하게 조사하다 보니 억장이 무너져 서류를 덮고 멍하게 있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됐다. ‘미법도’라는 인구 100여 명의 작은 섬이 있다. 강화도에서 석모도로 배를 타고 들어가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타고 들어가는 외딴섬이다. 이 섬에서만 1970년대 초반에서 80년대 후반에 걸쳐 다섯 차례나 간첩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 내가 납북 어부 정영 사건을 조사하려 하자 몇몇 지인들은 이 사건이 억울한 점이 많은 것 같다면서도 “간첩이 제보한 간첩 사건”이라는 이유로 걱정을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제보한 간첩인 황용윤 사건에 관한 자료를 들춰보니 쓴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정영과 황용윤은 1965년 같이 납북돼 이북에서 같은 여관, 같은 호실에 머문 사이였다. 황용윤을 제보한 안희천, 안희천을 제보한 안장영 역시 모두 같이 납북됐던 ‘납북 동기’였다. 곶감 꼬치에서 곶감을 하나씩 빼먹듯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납북 어부들이 차례차례 간첩으로 만들어졌다. 미법도의 마지막 간첩 정영은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납북 어선의 선장 안장영을 처음 간첩으로 만들러 미법도에 들어왔을 때, 이근안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또 안장영의 재판에 나가 증언까지 한 예비군 소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몇 년 뒤 간첩이 된 것이다.

1950년대만 해도 북에서 남파된 공작원이 수개월 만에 잡혔는데도 간첩죄가 아니라 간첩미수죄로 기소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만큼 간첩죄가 엄격히 적용됐던 것이다. 내가 인터뷰한 어느 남파 공작원은 밀봉교육을 다 받고 몇 달 동안 대기하다가 남파됐다고 한다. 왜 출발이 지연됐냐는 물음에 그는 웃으며 “배가 없어서”라고 답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어찌나 공작원이 많이 남파됐던지 배를 배정받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던 것이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간첩업계’에는 불황이 찾아왔다. 남북 간에 서로 별로 효과도 없는 공작원 침투를 그만두기로 ‘신사협정’을 맺은 것이다. 물론 이 신사협정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남쪽이 적발한 간첩통계를 보면 간첩 수가 확연히 줄어든 것만은 분명하다. 1951년부터 1996년까지 남한 당국은 모두 4495명의 간첩을 생포·사살·자수 등의 형태로 적발했는데, 1950년대와 60년대는 각각 1600명 선이었던 것이 70년대에는 681명으로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는데, 그나마 상당수가 50년대나 60년대에 이미 남파된 사람들이었다. 1980년대에 적발된 간첩은 340명으로 다시 70년대의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1990년부터 96년까지는 모두 114명으로 80년대의 3분의 1로 감소했다.

1980년대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송씨 일가(송기홍씨, 송기복씨, 송기수씨의 부인·왼쪽부터)가 2006년 증언대회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렇게 억울한 간첩은 숱하게 많았으나 긴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진실이 드러나고 위로를 얻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1980년대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송씨 일가(송기홍씨, 송기복씨, 송기수씨의 부인·왼쪽부터)가 2006년 증언대회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렇게 억울한 간첩은 숱하게 많았으나 긴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진실이 드러나고 위로를 얻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남북 “효과 없는 공작원 감축하자”

적발되는 간첩 수가 줄어드는 것과 반비례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조작 의혹 간첩 수는 늘어가기만 했다.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생포된 1천여 명의 간첩 중, 북쪽이 직접 파견한 ‘직파 간첩’의 수는 아마도 30∼40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 나머지를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순도가 떨어지는 함량 미달의 간첩이 차고 넘치게 된 것은 분명하다.

함량 미달의 간첩이 대거 출현한 데에는 1972년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 이후 사법부가 제구실을 못하게 된 책임이 크다. 그 시절 사법부는 사법부대로 “오욕과 회한의 역사”(이영섭 대법원장의 퇴임사에 나오는 말)를 겪어야 했지만, 인권의 최후 보루여야 할 사법부가 제구실을 못할 때 안기부와 보안사의 지하실을 거쳐온 시민들은 자백만으로 북한을 여러 차례 왕래한 간첩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수십 일 동안 고문을 받고 허위 자백했다고 호소하는 피고인에게 바지 한번 걷어보라고 말해주는 판사가 없었다. 법은 그렇게 시민과 멀어져갔다. 인권이 사라진 곳에 ‘남한산 간첩’만 늘어갔다.

납북 어부와 재일동포들은 가장 손쉬운 간첩의 재료였다. 남파 공작원에게도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을 수 있었던 1950년대의 엄격한 기준만 지켜졌어도 70~80년대에 적발된 간첩 수는 공식 통계보다 한참 적어졌을 것이다. 국가기밀·군사기밀이라고 하면 우리는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사항을 떠올리게 된다. 흔히 하는 농담으로 “뭘 알아야 누설이라도 하지”라고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궁벽한 낙도에 사는 배우지 못한 납북 어부도 공안당국이 보기에는 걸어다니는 기밀 덩어리였다. 예비군 초소의 위치며, 교대 시간이며, 뭍으로 나가는 배 시간표며, 어느 것 하나 국가기밀이 아닌 게 없었다. 신문과 잡지에 나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적’에게 알려져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당당한 국가기밀이 되었다.

118일 불법 구금과 고문 앞에 자백

만약에 사법부가 고문을 당했다고 호소하는 사람한테 옷이라도 걷어보라고 했다면, “짜장면은 맛있다”나 “경부고속도로는 4차선이다”가 간첩이 팔아넘긴 국가기밀이라고 쓰인 공소장을 보고 이딴 게 무슨 기밀이냐고 호통이라도 쳤으면 그 기나긴 조작간첩 사건의 연쇄 고리는 진작에 끊어졌을 것이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는 송씨 일가 사건의 경우 최장 118일간의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얻어낸 자백이 유일한 증거였다. 대한민국에서 국가보안법은 초헌법적 지위를 누려왔다. 나는 내 자백만으로 처벌받지 않지만 내 동생의 자백은 나의 자백을 보강해주는 증거고, 또 나의 자백은 내 동생의 자백에 보강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가족 간첩단의 공소는 유지됐다. 1심과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송씨 일가 사건의 피고인들이 대법원에서 이일규 판사를 주심 대법관으로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이일규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이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그러자 안기부는 발칵 뒤집혔다. 여태까지의 간첩 사건에서 자백은 ‘증거의 왕’이었다. 이제 무전기도, 난수표도, 암호문도, 권총도, 독침도, 독약 앰풀도 다 필요 없었다. 교활한 간첩이 무슨 증거를 남기겠냐는 한마디에 증거주의는 갈 곳을 잃었다. 그런데 이일규라는 고집불통 판사가 이 관행을 뒤엎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간첩 사건은 할 수 없게 된다며 안기부는 이일규 대법원 판사를 미행하고, 대법원장에게 갖은 압력을 넣고, 대법원 판사 인사에까지 개입하면서 결국 이 사건을 유죄로 만들었다.

안기부가 미법도 주민들을 중심으로 조작한 납북어부 간첩단 사건 체계도.

안기부가 미법도 주민들을 중심으로 조작한 납북어부 간첩단 사건 체계도.

간첩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 1990년대에는 오히려 한동안 뜸했던 직파 간첩이 자주 나타난 시기였다. 남쪽에 주사파가 출현하고 통일운동이 고조되면서 북의 대남사업 부서에서 남쪽 상황을 잘못 읽고 공작원들을 다시 새로운 차원에서 내려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북의 대남 공작원이 진보 진영에서 활동하는 인사를 찾아와 대담하게 북에서 왔다고 신분을 밝히고, 이를 안기부의 공작이라고 생각한 운동가가 그를 신고해 부부 간첩이 검거되는 웃지 못할 일도 발생했다. 오늘날 뉴라이트의 핵심이 되는 골수 주사파들 중 일부는 이 무렵 북과 직접적으로 선을 잡기도 했다. 이렇게 직파 간첩도 늘고 남쪽 운동 진영 내의 일부가 북과 잘못된 방식으로 손을 잡다가 적발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간첩의 수는 줄어들었다.

이는 민주화 이후 사법부가 80년대와 같은 엉터리 재판을 벗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92년 중부지역당 사건 당시에는 ‘설혹 간첩을 도왔다 하더라도 간첩임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면 방조죄가 성립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고, 94년에는 ‘공지의 사실은 국가기밀 누설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나왔다. 진짜 직파 간첩인 무함마드 깐수 교수의 경우 공소사실 중 상당 부분이 이 판례 덕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1997년 고영복 교수 사건의 경우도 북한 간첩과 만났다는 점에서 회합·통신은 유죄를 받았지만 간첩죄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80년대에는 수사기관이 점찍으면 그게 간첩이었다. 민주화 이후에야 한국은 그 야만의 세월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 벗어났다고 착각했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위성사진 등 온갖 정보가 쏟아져나오는 오늘날 무슨 낡은 간첩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아직 은퇴하지 않은 80년대의 공안요원들은 녹슬지 않은 솜씨를 다시 선보였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은 늘 이뤄지게 마련이다. 또다시 나타난 함량 미달의 북한 간첩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라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 초 법원은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구속된 사진작가 이시우씨에 대해 모든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런 법원의 상식적인 결정이 이명박 시대에 지켜질 수 있을까?

미국·일본·중국 간첩은 걱정 않나

간첩은 잡아내야 한다. 그런데 어디 우리를 노리는 간첩이 북에서만 내려오랴. 정말 우리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잡아야 할 간첩은 미국 간첩, 일본 간첩, 중국 간첩이 아닐까. 촛불을 보면 배후가 누구냐고 떠올리는 장로님, 장로님, 이명박 장로님. 간첩을 잡아야 할 사람들이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멍하니 북쪽만 바라보게 해서야 어디 다각도로 침투해 들어오는 간첩을 제대로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주기도문의 한 구절처럼 그들을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 그들이 이 21세기에 북한 간첩이라는 낡은, 그러나 치명적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국가보안법부터 얼른 폐지하십시다. 그래야 당신이 주문처럼 외우는 “선진화”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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