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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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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수갑’과 ‘스텔스 노동’, 역습 맞은 반도체 유토피아

과노동 따른 질병·이직 확대로 경쟁력 약화… 한국은 참고서 아닌 반면교사 삼아야
등록 2026-10-08 20:57수정 2026-10-12 17:15
2026년 9월13일 오후 대만 신주시 동구 관신촌 전경. 티에스엠시(TSMC) 본사와 주요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밀집한 신주과학단지와 매우 가깝다. 신주시의 아파트값 상승률은 전국 1위다. 신주(대만)=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2026년 9월13일 오후 대만 신주시 동구 관신촌 전경. 티에스엠시(TSMC) 본사와 주요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밀집한 신주과학단지와 매우 가깝다. 신주시의 아파트값 상승률은 전국 1위다. 신주(대만)=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곳 사람들은 대만에서 최상위 수준으로 살고 있지요.”

2026년 9월13일 대만 신주시 동구 푸딩리에서 만난 한 중개보조원은 주변의 주상복합아파트 단지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손끝을 따라 올려다본 30층 높이의 아파트 상단에는 ‘풍읍’(豐邑)과 ‘부우’(富宇)라고 적힌 한자 간판이 걸려 있었다. 각각 ‘풍요로운 고장’과 ‘부유한 집’이라는 뜻이다. 대만의 ‘하이엔드(최고급) 아파트’에는 이렇게 풍요, 부귀, 황실 등 노골적인 표현을 쓰는 게 유행이다. 이 아파트 단지는 한국의 고가 아파트촌처럼 외부인 출입을 통제한 그들만의 공간에 병원, 은행, 식당, 학원 등 상업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전국 평균 2.8배인 가구소득, 그러나…

 

대만 신주(신주시와 신주시를 둘러싼 신주현)의 대표 부촌은 10년 전 신주시 동구 관신리를 중심으로 구성됐는데, 최근 몇 년 새 일어난 반도체 슈퍼사이클(초호황)에 따라 푸딩리까지 넓어졌다. 최근에는 터우첸시강 너머 주베이시까지 확장됐다. 신주의 부촌 아파트는 한 평(3.3㎡)당 3300만~3600만원인데, 이는 대만의 신축주택 평균가격(평당 2440만원)의 약 1.4배다.¹ 부촌이 확장된 이유는 명확하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티에스엠시(TSMC)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주과학단지로부터 차로 10분 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반도체 유토피아’는 신주시에 연평균 가구소득(2025년 기준 약 8700만원)과 최근 5년(2022년~2026년 9월) 아파트값 상승률(52%) 전국 1위라는 지표를 안겨줬다. 2025년 TSMC 직원 한 명당 평균연봉은 약 1억8천만원에 달한다. 대만 연평균 가구소득(약 6500만원)의 2.8배 정도다. 신주에는 대만 최초의 소아·아동 전문병원, 영어유치원, 사립학교 같은 인프라도 들어섰다. 푸딩리에 있는 미국의 회원제 창고형 할인마트 코스트코 일대 도로는 주말이면 밀려드는 차들로 인해 주차장이 된다.

고액 연봉과 부유한 주거 환경, 높은 교육열 등이 떠받치는 ‘반도체 유토피아’ 신주는 대만 정부의 주도로 치밀하게 짜인 산(기업)·학(학교)·연(연구소)의 토대에서 성장한 결과물이다. 대만 정부는 1973년 초 직접 국책연구기관인 공업기술연구원을 설립해 미국 반도체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사들였고, 1980년 최고급 이공계 인재들이 모인 국립양밍교통대학과 국립칭화대학이 있는 신주시에 과학단지를 조성했다. TSMC는 1987년 출범 당시 공업기술연구원으로부터 기술과 공장 인프라, 연구인력을 물려받아 독립한 ‘국가 기획형 스타트업’이었다.

국가적 ‘3대 메가프로젝트’의 거점으로 선정돼 ‘반도체 유토피아’를 꿈꾸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는 신주와 닮은 도시가 될 수 있을까. 혹시 신주의 화려한 모습 뒤에 가려진 그늘은 없을까. 있다면 한국은 어떤 대비를 해야 할까. 한겨레21은 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2026년 9월12일부터 9월16일까지 닷새 동안 신주에서 한국 언론 최초로 TSMC 현직 노동자 2명을 포함해 전현직 신주과학단지 노동자 5명을 심층 인터뷰했다.² 신주에서 15년 동안 진료를 맡아온 정신의학과 교수, 심리상담가와 노동계 인사, 건강헬스케어 전문 매체 기자 등도 직접 만났고, 각종 자료를 입수해 이들의 말을 교차 검증했다.

 

24시간 대기, 새벽 두세 시 콜 받고 출근

 

2026년 9월13일 오후 대만 신주시 동구 신주과학단지 티에스엠시(TSMC) 혁신박물관. 신주(대만)=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2026년 9월13일 오후 대만 신주시 동구 신주과학단지 티에스엠시(TSMC) 혁신박물관. 신주(대만)=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무엇보다 TSMC에선 과노동이 일상이었다. 패키징 엔지니어로 TSMC에서 5년째 근무하는 장웨이치(가명)는 한겨레21과 만나 윗사람의 ‘누적 노동시간 관리’ 방식을 버티다 못해 부서 이동을 신청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직원이 휴가를 사용해 총노동시간이 줄어들면, 다른 근무일에 추가로 연장노동을 해서 부족분을 채우도록 요구받았다”며 “회사 제도상 휴가가 허용됐음에도 상사는 주당 총노동시간을 달성해야 할 목표로 설정했다”고 말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인사평가 반영 여부와 무관한 목표치였음에도 이를 “핵심 관리 지표”로 받아들이며 연장노동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육아나 가족 돌봄에 관심을 쏟아야 하는 노동자에겐 한층 더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장웨이치는 “가정사 때문에 휴가를 썼는데 총노동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 탓에 업무 유연성을 기대하기 어려웠다”며 “퇴근 뒤에도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느꼈고 가사와 육아 분담에도 차질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스트레스 때문에 심리상담을 받아야 했고, 이후 “비교적 워라밸이 정상적”인 부서로 이동했다.

TSMC에서 2023년까지 13년 동안 일한 웨이퍼(원판) 생산라인 엔지니어 천이샹(가명·42)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24시간 대기’를 해야 했다고 말했다. “매주 최소 한두 번은 퇴근 이후에도 회사에 나가야 했다. 24시간 대기는 물론 새벽 두세 시에도 전화가 오면 회사로 가야 했다.”

이런 상황은 2018년 8월 발생한 대형 악성코드 감염 사고 이후 심해졌다. 담당 직원이 바이러스 검사를 누락한 장비를 내부망에 연결하면서 TSMC의 주요 생산라인이 멈췄고, 복구에만 사흘이 걸렸다. 이로 인해 약 3천억원의 매출 손실이 발생했다. 천이샹은 “당시 부서원 전원이 48시간 연속 근무를 했다”며 “그 사태 이후 집에서 전화 대기를 하는 일이 더 늘었다”고 전했다.

 

“반도체 노동자는 ‘황금 수갑’을 차고 있다”

 

신주과학단지 내 유명 반도체 회사에서 20년 동안 일한 엔지니어 린쯔하오(가명)도 “전례 없는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옆집 이웃이자 회사 동료였던 이가 한 달 연속 초과노동 끝에 문제를 해결한 뒤 축하 자리를 열었는데, 끝내 그 동료는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며 “주차장에서 멀지 않은 길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을 땐 이미 동료의 심장이 멎어 있었다”고 말했다.

린쯔하오는 반도체 엔지니어가 마주하는 극한의 압박을 이렇게 설명했다. “연구개발 단계에선 없던 문제들이 양산 단계에서 터지기도 해요. 약속한 납기일은 코앞인데 생산라인 위 값비싼 제품들이 모두 멈춘 채 당신이 해결책을 내놓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막대한 시간과 재정적 손실 압박을 홀로 짊어진 채 밤을 새우며 시행착오를 거쳐 답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린쯔하오 역시 체중 감소와 우울증 끝에 직무를 바꿨다가 2020년 퇴사했다. 이후 아내 리야원이 생계를 위해 재테크에 나섰고, 인터넷에서 화제의 인물로 주목받았다. 그가 쓴 ‘돈 문제부터 해결하라’라는 책이 국내에 출판되기도 했다.

신주과학단지의 반도체 엔지니어들은 자녀를 영어유치원과 사립학교에 보내고, 자주 국외 여행을 다니며 화려한 아파트에서 산다. 풍족해 보이지만 자신을 향해 “황금 수갑을 차고 있다”고 말한다. 린쯔하오는 “고임금이 만들어낸 안락한 울타리가 오히려 일을 멈추거나 다른 삶을 선택할 자유를 가로막으며 가장 벗어나기 힘든 족쇄가 돼버렸다”고 털어놨다.

물론 일부의 사례만으로 TSMC의 노동 여건을 과노동이라 판단하기엔 지나치다는 목소리도 있다. TSMC가 대만 노동기준법상 연장노동 한도(하루 최대 4시간·월 최대 54시간)를 준수하고 있다는 취지다. 8년차 TSMC 품질 엔지니어인 차이청루이(가명)는 “평소 아침 8시30분에 출근해 저녁 7시에 퇴근한다”며 “프로젝트가 있는 날엔 밤 9시까지 일하기도 하지만,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12시간을 초과해 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과거 교대근무를 경험한 차이청루이는 “과로로 저연차 직원들의 이직률이 치솟자 회사가 업무량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체질을 개선하고 있다”고 말했다.

3년 전 TSMC를 퇴사한 엔지니어 리졘위도 과로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문화가 더는 신입 직원들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퇴사 당시 회사 이직률이 8~9%까지 치솟았다. TSMC 미국 애리조나 팹(Fab·반도체 생산 공장)에서 일하다 돌아온 직원이 ‘미국에선 이렇게까지 일하지 않는다’고 전하면서 사내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졌다. (TSMC의 상징인) 24시간 3교대 연구개발(R&D)은 이제 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항우울제 사용 증가율, 전국 평균 3배

 

2026년 9월14일 오전 대만 신주시 동구 신주과학단지로 들어가는 입구인 원구1로에 스쿠터와 차량이 몰려 정체를 빚고 있다. 900여 개 기업이 입주한 신주과학단지에는 17만여 명이 일하고 있다. 신주(대만)=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2026년 9월14일 오전 대만 신주시 동구 신주과학단지로 들어가는 입구인 원구1로에 스쿠터와 차량이 몰려 정체를 빚고 있다. 900여 개 기업이 입주한 신주과학단지에는 17만여 명이 일하고 있다. 신주(대만)=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그런데도 TSMC가 장시간 노동 문제에서 여전히 벗어나 있지 않다는 건 여러 경로로 확인할 수 있었다. 대만 행정원 주계총처(통계청)가 2026년 8월에 공개한 ‘2026년 6월 노동자 한 명당 월평균 노동시간’을 보면, 전자부품 제조업의 월평균 연장노동 시간은 28.7시간으로 전체 평균(9.1시간)의 3배를 넘어섰다. 이는 47년 전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다. 천이샹은 “(신주 내) 대부분의 회사가 법정 노동시간을 지키지 않는다”며 “과학기술업 분야는 더 유별나고 과로 문화가 여전하다”고 말했다.

TSMC는 2023년부터 2026년 9월까지 연장노동 한도를 위반해 총 14차례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TSMC 해고자 모임에서 시작된 대만 전기전자정보산업노동조합은 “(이 과태료 처분 역시) 실체의 일부분일 뿐”이라며 “관리자는 초과노동을 신청하면 인사고과에 영향을 줄 것처럼 은근히 암시한다. 근로감독을 회피하는 다양한 방법이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TSMC가 발간한 ‘2025 지속가능보고서’에도 과노동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등장한다. 대만 공장에서 1만7446명이 고급 영상의학 건강검진(심전도, 경동맥/심장초음파 등)을 받았는데, 이 가운데 24.5%에 해당하는 4273명이 ‘중·고위험군’으로 분류됐다. 특히 이 ‘중·고위험군’ 가운데 157명은 의사의 의학적 소견에 따라 ‘노동시간 제한 또는 업무 조정’ 권고를 받았다. TSMC는 이 건강검진과 별도로 매달 업무 부담을 모니터링해 5899명을 자체 기준에 따른 ‘중·고위험군 직원’으로 분류한 다음, 이 가운데 1361명을 의학적 권고에 따라 ‘노동시간 제한 또는 업무 조정’을 조처하기도 했다.

대만 노동계는 TSMC의 세부 건강 정보 공개를 두고 ‘과로 문화’ 논란을 의식한 조처라고 해석한다. 미디어텍이나 유나이티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UMC) 같은 대만의 주요 반도체 기업 대부분은 이런 정보조차 공개하지 않는다. 산업재해 피해자를 지원해온 대만직업안전건강연대 황이링 집행장은 “대만 내에서 반도체 연구개발 인력의 과로 및 과로사에 초점을 맞춘 구체적인 연구나 보고서는 드문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과노동은 신주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만 위생복리부 중앙건강보험서(국민건강보험공단)가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24년 신주현과 신주시의 항우울제 사용 인원은 각각 3만8691명, 4만1006명으로 집계됐다. 대만 본토(도서 지역 제외) 기준으로 2018년과 견준 증가율 순위를 보면, 신주현이 92%로 1위, 신주시가 43.7%로 2위다. 전국 평균 증가율은 31.8%였다. 같은 기간 신주에서 ‘불안 및 스트레스 관련 장애’ 등으로 외래 치료를 받은 환자는 7만4810명으로 약 43% 증가했는데, 이 역시 전국 평균(약 13%)의 3배를 넘어섰다.

2018년과 비교해 2024년 신주현과 신주시의 ‘인구 1천 명당 정신행동 및 신경발달 장애 외래 진료 환자 방문 횟수’ 증가율 역시 신주현이 47.5%로 1위, 신주시는 40%로 4위에 올랐다. 역시 전국 평균(29.8%)을 웃돈 수치다. ‘정신행동 및 신경발달 장애’는 우울·불안 같은 과로 관련 질환을 포함한다.

 

“TSMC 노동자 ‘스텔스 노동’ 많았다”

 

신주의 부촌에선 지역 고소득층을 겨냥한 대형 심리상담센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반도체 노동자들의 정신건강 실태를 취재했던 대만 건강헬스케어 전문 매체 ‘커먼헬스’의 예이더 기자는 “다른 도시와 다르게 최근 신주에는 정신과의원이나 사설 심리상담센터가 늘고 있다”며 “신주과학단지 노동자들은 심리적 고통이라는 그늘을 안고 산다”고 지적했다.

신주에서 15년간 정신과 진료를 해온 마카이의과대학 우이청 교수(정신의학과)는 “체감상 점점 더 많은 과학단지 노동자들이 본인의 업무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약에 의존하고 있다”며 “대부분 수면장애, 정서 불안,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TSMC 노동자를 꼭 집어 “만났던 직원 대부분은 법정 노동시간을 넘겨서 일했다”며 “기록만 퇴근으로 찍힌 ‘스텔스 노동’을 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위생복리부는 2024년부터 이른바 ‘15-45’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건강보험이 아닌 별도 예산을 투입해 ‘15~45살’ 청장년에게 개인당 한 해 최대 3회 무료 심리상담 비용을 보전해주기로 했는데, 애초 적용 대상(15~30살)에서 연령대를 대폭 올린 것이다. 신주과학단지를 중심으로 엔지니어들이 극심한 번아웃(소진)을 겪는 상황이 사회문제화되자, 별도의 보조금 정책을 내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이청 교수는 “과로로 파생되는 사회적 비용을 기업이 아니라 국가 의료 시스템이 떠받치는 구조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티에스엠시(TSMC)에서 퇴사한 천이샹(가명)씨가 2026년 9월15일 오전 대만 신주시 한 가정집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신주=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티에스엠시(TSMC)에서 퇴사한 천이샹(가명)씨가 2026년 9월15일 오전 대만 신주시 한 가정집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신주=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TSMC의 과노동과 이로 인한 사회문제는 대만이 반도체 강국으로 성장해온 방식과 맞닿아 있다. ‘국가 기획형 스타트업’으로 “택시조차 다니지 않던 황무지”에서 출발한 TSMC의 성공 전략은 ‘24시간 3교대 연구개발’이었다. 전략의 마지막 퍼즐이 ‘세계 최고의 가성비’로 무장한 고학력 노동력이었다. 미국·일본에 견줘 기술과 자본이 빈약했던 대만이 ‘반도체 굴기’를 이뤄내는 데 ‘장시간 노동’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삼성전자, 에스케이(SK)하이닉스 등 대기업 중심으로 반도체가 성장한 한국 역시 “근면 성실하게 일하며 노력하려는 문화”가 정착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메모리든 파운더리든 24시간 돌아가는 팹은 반도체 산업의 핵심인데, 이를 위해 노동자는 헌신해야 했다.

하지만 과거의 성공 방식은 녹슬고 있다. TSMC 전현직 노동자들은 모두 “24시간 연구개발은 사라진 문화”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연구개발 과정에 인공지능(AI)이 도입되면서 불필요한 업무가 줄었다고 한다. 2023년 TSMC를 떠나 외국계 반도체 기업으로 옮긴 천이샹은 “인공지능을 활용하면서 노동강도가 줄었다”며 “TSMC에선 개인 역량에 의존하던 문제들이 시스템을 통해 빠르게 해결되면서, 엔지니어 한 명이 처리할 수 있는 업무량이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과노동을 바라보는 인식도 TSMC 내부에서부터 바뀌고 있다. 엔지니어 차이청루이는 “야근을 길게 하는 직원은 능률이 높지 않은 직원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며 “회사는 노동시간을 늘리는 대신 일할 인재를 찾는 데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양광레이 대만국립과학기술대학 산학혁신단장은 “TSMC가 미국·일본에 새로운 공장을 가동하는 상황이라, 지금까지 통했던 ‘부지런함이 부족한 재능을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과 야근 문화를 바꿀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미국과 일본에 공장 설립을 검토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TSMC가 과거의 성공 방식을 바꾸려는 사이, 한국은 되레 과거의 TSMC를 소환하는 중이다. 한국 반도체 업계는 대만을 롤모델로 삼고 있다. 신주의 화려한 삶을 ‘동탄의 미래’로 설정하거나 최근 삼성전자 파업 사태를 놓고 TSMC의 ‘무노조 경영’을 재조명하는 식이다.

특히 대만 반도체 기업의 ‘장시간 노동’은 일부 언론과 경영계가 줄기차게 요구하는 ‘주 52시간제’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쓰인다. 삼성전자가 2024년 11월 더불어민주당에 “경쟁사인 대만은 불법이지만 주 70~80시간 일하고 있고 우리는 법을 지키며 일하느라 근로시간 확보가 안 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한 게 대표적이다.

 

양광레이 대만국립과학기술대학 산학혁신단장이 2026년 9월12일 오후 대만 타이베이시 한 카페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타이베이(대만)=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양광레이 대만국립과학기술대학 산학혁신단장이 2026년 9월12일 오후 대만 타이베이시 한 카페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하고 있다. 타이베이(대만)=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TSMC는 변화하는데… “퇴보”하려는 한국

 

이재명 정부는 노동계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연구개발직의 ‘주 52시간 노동시간 적용 예외’ 방침을 검토하고 있다. 한겨레21이 만난 대만의 반도체 엔지니어, 의사, 심리상담가, 노동계는 자국의 장시간 노동이 배움의 대상이 된 이런 상황이 낯설고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엔지니어 차이청루이 는 “한국 기업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찾고자 TSMC 사례를 가져다 붙인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며 “한국 정부의 (규제 완화) 시도는 한국 노동운동의 퇴보”라고 말했다. 또 다른 TSMC 엔지니어 장웨이치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장시간 노동이 불가피한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대만의 경쟁력 을 노동시간 하나로 설명하려는 시도에는 선을 그었다. 그는 “대만 반도체 산업의 성공 기반에는 인재와 자본, 공급망, 산업 클러스터, 기술 축적 등 다양한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며 “‘대만 엔지니어가 한국 엔지니어보다 더 오래 일한다’는 식으로 대만의 경쟁력 을 단순화하면, 정작 산업 경쟁력 을 떠받치는 본질적인 요소를 간과할 수 있다”고 짚었다.

양광레이 단장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연구개발과 제조 분야를 명확히 분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제조는 정해진 공정을 차질 없이 수행하는 것이 핵심이지만, 연구개발은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는 영역”이라며 “연구개발에서는 지식과 경험, 효율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인공지능 시대에 노동시간 규제 완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국 정부의 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대만의 과로 문화를 무턱대고 따라 했을 때 한국의 노동조합이나 밀레니얼세대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1. 국립정치대학 대만부동산연구센터가 신규분양·신축주택을 조사해 분기마다 발표하는 ‘국태부동산지수’.

2. TSMC는 원칙적으로 전 직원의 언론 접촉을 금지한다. 이에 TSMC의 ‘과로 문화’는 온라인 커뮤니티 익명 게시판 또는 퇴사자들의 경험담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신주·타이베이(대만)=글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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