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겸재 정선이 그린 ‘탕춘대’. 한가운데가 탕춘대, 위 왼쪽이 북한산 보현봉, 위 오른쪽이 형제봉, 아래가 홍제천이다. 아래 왼쪽 끝이 현재의 세검정 자리다. 영남대 박물관 소장
“왕이 경복궁에 가서 대비에게 잔치를 열어드렸다. 잔치가 끝나자 행차말(내구마) 1천 필을 끌고 오게 해서 흥청(기생)을 싣고 탕춘대에 갔다. 왕이 길가에서 궁녀(나인)와 간음했다.”(‘연산군일기’ 1506년 7월7일)
연산군이 호화로운 이궁(별궁)을 지어 방탕하게 놀았다는 조선시대 탕춘대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처음으로 발굴됐다. 한겨레21은 그동안 ‘만춘도’(晩春圖)라는 이름으로 잘못 알려진 영남대 박물관 소장의 겸재 정선 그림의 제목이 ‘탕춘대’(蕩春臺)임을 확인했다. 또 이 그림이 늦은 봄(만춘)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현재 서울 종로구 신영동 월드캐슬 빌라가 들어선 탕춘대 언덕과 그 앞의 홍제천, 그 뒤의 북한산 보현봉 등의 모습을 담은 사실을 확인했다.
이 그림이 ‘만춘도’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오른쪽 위에 적힌 화제(그림 제목)가 초서와 행서 등 흘림체로 쓰였기 때문이다. 서화 전문가인 전종주 호남대 명예교수는 “그림 제목에 서 탕(蕩)자와 춘(春)자가 초서로 쓰여 알아보기 어렵고, 대(臺)자는 행서여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애초 이 그림을 분류할 때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이 제목을 붙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정선은 조선 후기 명필인 이광사와 교류했고, 글씨도 동국진체(조선식 글씨)였다. 잘 쓴 글씨”라고 평가했다.
그림은 한가운데 둥글넓적한 탕춘대 언덕이 보이고, 그 아래로는 홍제천이 흐르며, 위 왼쪽에 보현봉, 위 오른쪽에 형제봉이 보인다. 아래 왼쪽엔 샛길이 보이는데, 현재는 넓혀져 세검정~세검정초등학교 사이 세검정로가 됐다. 샛길 너머엔 건물이 보이는데, 장의사와 총융청이 있던 자리로 현재는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그림의 맨 왼쪽 아래 홍제천 가에 낮은 벼랑이 보이는데, 현재 세검정이 들어선 자리로 추정된다.

정선 그림 ‘탕춘대’의 현재 모습. 가운데 빌라가 들어선 곳이 탕춘대, 왼쪽 위에 북한산 보현봉, 오른쪽 위 형제봉, 아래가 홍제천. 김규원 선임기자
책 ‘옛 그림으로 본 서울’의 저자인 최열 미술사학자는 “중앙에 탕춘대가 보이고, 왼쪽 홍제천 가에 나중에 세검정이 지어진 너럭바위가 보인다. 지금은 이 일대에서 세검정만 볼 수 있는데, 평평한 바위 언덕인 탕춘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윤진영 동덕여대 겸임교수(한국 회화사)도 “너럭바위나 홍제천이 흘러나오는 모습이 현재의 세검정 부근과 비슷하다. 도시화 이전 세검정 일대의 원형 지형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그림은 현재 이 일대의 랜드마크인 세검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도 이 그림이 세검정이 지어지기 전에 그려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상채의 문집 ‘창암집’에 따르면, 세검정은 총융청(서울 외곽 북부 사령부)이 도성 안 삼청동에서 도성 밖 장의사 터(현재 세검정초)로 옮겨진 1747년에 함께 지어졌다. 따라서 이 그림은 1747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선의 그림 2점 등 세검정 그림은 모두 1747년 이후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은 대체로 정선 그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열 미술사학자는 “나무와 숲 스타일, 점묘법,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구름띠 등 여러 요소가 겸재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생략이 없고 사실에 충실한 것은 실경산수에서 진경산수로 넘어가기 전 정선의 전기 작품임을 드러낸다”고 평가했다. 실경은 사실 그대로 그리는 것을 말하고, 진경은 사실을 바탕으로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화가가 재구성한 그림을 말한다.
비슷한 공간을 그린 정선의 ‘세검정’과는 조금 다르다는 평가도 있었다. 윤진영 교수는 “세검정 그림은 촉촉한 느낌이 드는데, 이 그림은 건조한 느낌이 난다. 나무나 숲의 디테일이 빼닮았지만, 두 그림의 분위기는 꽤 다르다. 이 그림엔 정선 그림의 특징인 강약 대조가 없다”고 평가했다.

정선의 ‘세검정’. 세검정 뒤쪽 언덕이 탕춘대, 오른쪽이 홍제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나아가 이 그림이 위작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미술사학자인 이태호 명지대 석좌교수는 “겸재도 갈필(마른 붓질)을 썼지만, 이 그림의 붓질과는 조금 다르다. 이 그림의 붓질엔 겸재 그림에서 보이는 자신감이 없다. 아마도 겸재가 아니라, 제자 등 겸재 일파가 그린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위작의 증거로 글씨를 가리켰다. 이 교수는 “오른쪽 위의 서명과 제목 부분이 한 번 지우고 다시 쓴 것처럼 바탕이 조금 어둡다. 탕춘대 글씨 가운데 ‘춘’자도 자연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위작으로 쉽게 단정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최열 미술사학자는 “이 그림의 화풍이 정선의 후기 그림과 비교해 낯설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정선의 그림은 전·후기가 많이 다르다. 전기엔 잘고 섬세하고, 후기엔 좀더 유연하고 대담해진다. 위작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후기 그림의 특징을 근거로 위작을 단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림을 소장한 영남대 박물관의 강중휘 학예연구사는 “이 그림은 소장품 카드에 적힌 기록에 따라 그림 제목을 ‘만춘도’로 관리해왔다. 그러나 한겨레21의 요청에 따라 다시 확인해보니 ‘탕춘대’가 정확한 이름이다. 앞으로 소장품 명칭과 관련 설명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이 그림은 1973년 영남대의 전신인 청구대의 설립자 최해청 선생이 영남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최 선생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뒤까지 농촌 계몽, 에스페란토어 보급, 청구대 설립 등 사회·교육 운동을 했다. 최 선생의 기증 뒤 이 그림은 정선의 ‘만춘도’로 소장돼왔다.
탕춘대는 조선 초기 유명한 절인 장의사(세검정초) 부근 홍제천이 휘감아 흐르는 긴 언덕을 말한다. 원래는 이름이 없었는데, 연산군 때 ‘산수가 기묘하게 좋다’며 탕춘대(蕩春臺)라는 이름을 붙였다. 탕(蕩)은 방탕하다, 방자하다는 뜻이고, 춘(春)은 원래 봄이란 뜻이지만, 섹스나 술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됐다. 따라서 ‘탕춘’은 봄을 실컷 즐긴다는 뜻이지만, 섹스나 술을 즐긴다는 뜻도 담고 있다.

권신응이 그린 ‘세검정’. 세검정 뒤 언덕 위에 ‘탕춘대’라는 한자가 적혀 있다. 개인 소장
애초 연산군은 1505년 장의사(세검정초)에 이궁을 지으려다 1506년 1월 바로 옆 탕춘대에 먼저 ‘탕춘정’(蕩春亭)을 지었다. 탕춘정은 긴 회랑을 둘렀으며, 지붕에 고급 청기와를 얹었다. 또 언덕 아래 홍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집(횡각)을 짓고, 물을 막아서 놀이터로 만들었다.
연산군은 이 글의 맨 앞 내용처럼 수많은 말을 이끌고 탕춘대로 가서 온갖 지저분한 일을 벌이다가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 그 뒤 장의사와 탕춘대는 버려졌다가 숙종~영조 때 군사 시설로 다시 태어났다. 숙종은 병자호란을 거울삼아 1704~1711년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을 수리하고 1715~1719년 그 둘을 연결하는 성을 쌓았다. 전쟁 때 방어시설이자 피란길이었다. 탕춘대 부근의 이 성에 ‘탕춘대성’(또는 서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탕춘대성과 홍제천이 만나는 곳에 오간수문(다섯 칸 수문)과 홍지문을 세웠다.
아버지 숙종의 정책을 이은 영조는 1747년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지킬 총융청을 장의사와 탕춘대 쪽으로 옮겼다. 같은 해 세검정을 탕춘대 아래에 지었다. 세검정(洗劍亭)이란 이름의 유래와 관련해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창의문(자하문)으로 들어가기 전 여기서 칼을 씻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이는 1747년 지어진 세검정에 1623년 일어난 인조반정을 갖다 붙인 이야기다. ‘세검정’은 경남 통영 ‘세병관’(洗兵館)처럼 전쟁을 끝내고 무기를 씻어 평화로운 시대를 여는 곳이란 뜻이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조선의 염원을 담은 이름이다.
영조는 세검정을 지은 7년 뒤인 1754년 “(연산군이 붙인) 탕춘대의 이름이 바르지 않다”며 탕춘대를 ‘연융대’(鍊戎臺)로 고쳤다. 연융대는 연무대(鍊武臺)와 같은 말이다. ‘봄(섹스, 술)을 즐기는 곳’이 ‘군사 훈련장’으로 바뀌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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