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10월14일 미국 뉴욕의 앤트로픽 사무실 앞에서 ‘앤트로픽 기업공개(IPO)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인공지능(AI) 기업 앤트로픽은 사상 최대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공개를 추진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초거대언어모델(LLM)에 기반을 둔 인공지능(AI)의 개발이 불붙던 2024년 초부터 미국 생성형 AI 기업 앤트로픽이 ‘파나마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지성 파괴적인 도서 스캔 작업을 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앤트로픽이 전세계 모든 책을 대량으로 구매해 스캔한 뒤 AI 모델 학습에 사용한 후 폐기한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8월 미국 작가들이 앤트로픽에 저작권 소송을 벌이면서 그 프로젝트의 여러 기괴한 전모가 하나둘 백일하에 드러났다. 무엇보다 앤트로픽이 한국에서 벌인 몇 가지 실체가 속속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한쪽에서는, 라이브러리 제네시스(Lib Gen) 등 불법 디지털 복제(해적판) 사이트에서 약 700만 건의 도서 파일을 무단으로 내려받아 AI를 학습시켰다. 그중 5만여 권이 국내 디지털 판본으로, 한강 등 국내 유명 작가들의 소설과 수많은 전집류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한쪽에서는, 앤트로픽이 국내 최대 도서 물류업체인 웅진북센 등에서 실물 책 수십만 권을 공급받은 정황이 포착됐다. 한 해 국내에서 발간되는 책의 최소 네다섯 배 규모의 종이책이 그동안 앤트로픽으로 빠져나갔고, AI 학습용으로 스캔된 뒤 전량 파기된 것으로 보인다. 밝혀진 사례 말고도 최근까지 국외 AI 기업들이 국내 대형 중고서점이나 교보문고 등 대형 출판·유통 업체를 통해 종이책의 대량 매입을 문의했다는 사실 또한 공개됐다.
앤트로픽은 해적판 불법 다운로드 도서의 경우, 해당 작가나 출판사에 약 15억달러(약 2조원)의 합의금을 지급하기로 확정하고 집단소송 건을 종결했다. 하지만 실물 종이책을 대량으로 구매해 추출 뒤 파기하는 문제에서는, 법원이 상식을 벗어나 앤트로픽의 ‘공정 이용’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알려진 것처럼 저작권의 ‘공정 이용’ 조항은 개인 이용, 교육 목적, 비상업적 용도에 한정해 저작물을 법적 위협 없이 사용하도록 허락한다. 그런데 초거대 AI 기업이 이 예외 조항을 내세워, 정제된 지식의 AI 추출 행위까지 합법적으로 보장받았다. 앞으로는 다른 AI 경쟁 기업들이 누울 자리를 가리지 않고 헌책이건 신간이건 종이책을 쓸어 담아 모델을 학습시킨 뒤 폐기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공정 이용 권리를 과잉 해석할 공산이 커졌다.
아이작 뉴턴이 적절히 비유한 인류의 지적 처소, ‘거인의 어깨’가 무너지고 있다. 이제까지 인류는 앞선 세대의 누적된 지식과 학문을 바탕으로 지적 계승과 초월의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모델 훈련을 위해 인류의 지식 공유지(커먼즈)가 점차 파괴되면서, AI가 물신의 권좌에 오르고 있다. 부커상을 받은 인도의 아룬다티 로이가 이번 앤트로픽의 행위를 비유해 “장기 적출”이나 “생명 채굴”이라고 비유한 것처럼, 인류의 지식 공유지는 그렇게 데이터센터에 봉인된 채 ‘AI 바벨탑’으로 재축조되고 있다.
문제는 AI 저작권 소송에서 기업의 무분별한 지식 추출 행위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취득 경로의 적법성”만으로 시야를 좁혀 해석하는 데 있다. 비슷한 소송에 직면한 메타 또한 쟁점이 책으로 학습한 내용이 아니라, 대규모 이북(e-book, 전자책)을 피투피(P2P) 방식의 파일 공유 프로토콜 토렌트를 경유해 수백 테라바이트 용량을 내려받으면서도 추적을 피했다는 취득 방식에 맞춰져 있다. 즉 주류 시각은 데이터 취득 경로의 위법성만 물을 뿐, 인류의 지식을 모델 학습으로 추출해 지대 수익을 취하는 기업의 행위에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매번 미국의 새로운 첨단기술 관련 재판 결과에 민감한 우리로서는 이들 판결이 선례가 될까 우려스럽다.
테크기업들이 ‘거인의 어깨’를 짓누르며 AI 바벨탑을 세우는 행위는, 마치 기존의 지식 저작권 체제를 위협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그것도 아니다. 최근 들어 개인 저자나 창작자의 지식재산권을 대리하는 대형 출판사, 언론사, 음원 퍼블리셔, 협회 등이 AI 기업과 직접 라이선싱계약을 하는 일이 크게 늘고 있다. ‘라이선싱 인클로저’라고 할 만큼, 개인 저자의 저작권을 대리하는 대형 권리자가 AI 업체와의 소송이나 단독 협상 과정을 통해 보상안을 직접 협의해 챙기고 있다.
힘을 쥔 이들의 협상이나 보상의 틀에서는, 소규모 지식 생산자나 창작자의 의견은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AI 기업과 저작권 대리업체 사이에 모종의 ‘신사협정’이 체결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쪽은 모델 학습용 데이터 개방을 내세운 ‘지식 추출주의’를, 다른 한쪽은 예전처럼 저작권 확장을 통한 ‘지식 인클로저(종획) 운동’을 도모하고 있다.
더군다나 AI 기업의 데이터 전횡에 국가가 조력자로 나서면서, 실제 개별 지식 생산자나 창작 주체의 권리가 더 주변화하거나 소외돼간다. 결국 인류의 지적 산물이 대규모 AI 모델 학습으로 이전될수록, 그것이 가진 인류의 역사 맥락적, 지역적, 문헌학적, 언어 문화적 가치는 데이터 질서 안에서 평면화된다. 무엇보다 인류 역사 속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얻은 각자의 영감에 대한 존경과 헌사, 그 답례로서 인용이나 호혜의 덕목은 갈수록 무가치해질 공산이 크다.

생성형 인공지능(AI) ‘클로드’를 서비스하는 앤트로픽이 진행한 ‘파나마 프로젝트’ 과정을 생성형 AI ‘제미나이’를 활용해 만든 이미지다.
AI 기업이 지식과 문명을 AI 모델 학습용 ‘땔감’으로 삼으며 공통의 지식 장을 뒤흔드는 현실에도, 우리 대부분은 더없이 무기력하고 무방비한 상태다. 연구자의 지적 산물, 작가의 창작물, 노동자의 암묵지에서 무차별적으로 추출하려는 통제 불능의 AI 모델 경쟁에 맞서 풀뿌리 지식 생산자를 위한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이제 본질적 질문을 해야 한다. 현 자본주의 저작권 체제에서 개인 차원의 지식과 창작의 추출과 약탈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국가조차 이를 외면한다면, 우리가 나서 ‘거인의 어깨’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선, 인류의 공유지에 대한 테크기업의 탈취 행위를 ‘공정 이용’이나 ‘저작권 제한’ 정도로 판결하는 주요 기류를 바꿔야 한다. 대규모 책 구매와 모델 학습 뒤 파쇄로 자산 가치를 키우고 그로부터 반영구적인 가입 서비스 지대 수익 창출을 취한다는 점에서, 이번 앤트로픽의 행위는 의당 공정 이용과 무관한 약탈적 기업 행위에 해당한다. 오히려 인류의 지식 데이터를 가져다 썼다면 그 결과물(가중치, 학습 방법론, 데이터 합성물)도 다시 인류 공동의 지식 가치로 환류시키는 상호성 의무 원칙을 세워야 한다.
둘째, 무형의 재화나 지식 생산자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 협동조합, 공제회 등 상호부조 모델을 구성하고 이들이 직접 AI 기업과 단체교섭의 중심에 나서는 일이 중요하다. 실제 몇 년 전 미국작가조합(WGA)과 배우·방송인 노조(SAG-AFTRA)가 장기 파업으로 AI 기업과 협약한 사례도 있다. 저작권을 대리하는 대형 기업들이 대부분 로열티 등 금전 보상에만 초점을 맞춘 것에 맞서, 실제 창작과 지식 생산이 일어나는 현장 노동 주체의 단체 수준에서 다각도로 협상력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풀뿌리 단위 지식 생산 시장을 지키고 그들 자신도 AI 일자리 대체 압력을 견딜 수 있다.
셋째, 프런티어 AI 모델 경쟁으로 인한 인류 공유지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지역과 소수자 언어, 문화, 지식을 기업이 무분별하게 추출하는 경향을 차단하는 모듈형 소규모 AI 모델 개발이 필요하다. 예컨대, 카렌 하오의 책 ‘AI 제국’ 결론 부분에도 소개된 바처럼,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그들 부족민의 음성 데이터 주권을 지키기 위해 테히쿠 미디어(Te Hiku Media)의 AI 모델과 ‘카이티아키탕아(Kaitiakitanga) 라이선스’를 개발했다. 모질라 데이터 콜렉티브(Mozilla Data Collective)가 운영하는 NOODL(Nwulite Obodo Open Data License) 또한 비슷한 사례다. 전자는 마오리 부족어 310시간 분량의 녹취본을, 후자는 아프리카 20여 개 언어의 음성·음악·구전 데이터를 학습시켜 독자적인 커먼즈 모델을 개발했다. 이들 공동체는 각자의 모델을 직접 공동 소유·관리하며, 지식 데이터의 상업적 이용에 대한 수익 일부를 구성원에게 재분배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두 사례는 소수 언어가 단지 AI 학습용 시장 데이터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지역 공동체의 언어, 문화, 지식 주권의 문제임을 직시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지식 공유지에서 추출해 학습시킨 AI 모델의 경우 그것의 가중치와 데이터세트를 일반에 공개하고 일종의 시민 ‘공유지 기금’을 조성하도록 테크기업에 강제하는 방향이 있다. 이미 공유지로부터 대규모로 학습된 모델의 경우 개별 저자에 대한 피해 보상이 어렵다면, 학계나 출판계의 지식 생산을 장려할 목적의 공유지 기금을 헌납받아 시민사회가 지적 산물의 공동 관리와 재생산 활동을 해나가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더 나아가, 시민사회가 빅테크의 인류 지식 침탈의 막장 경쟁 모델을 제어하려면, 시민이 직접 AI 모델 운영에 개입할 수 있는 ‘공공 AI’를 논의해야 한다.
요컨대, 오늘날 위기의 핵심은 저작권 침해 여부를 따지는 법률 문구 해석에 있지 않다. 오히려 저작권 프레이밍은 AI 기업들의 지식 자원에 대한 파괴적 추출과 인류 커먼즈의 소멸 위기 대응을 주변화한다. 맥없이 스러지는 ‘거인의 어깨’를 부여잡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라도 지식인 집단을 포함한 시민사회 자율의 커먼즈 운동을 현실화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미래이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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