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콧줄을 단 채 다른 피해자들만 챙기셨더라

2026년 8월26일 경남 창원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서한결(오른쪽)씨와 채민서씨.
‘나는 살고 싶다. 이렇게 죽어가기에는 너무 내가 불쌍할 것 같다. 가진 자들의 욕심으로 나 같은 운명의 인간들이 양산되는 것은 없어져야 한다.’ ―고 서영철 전국가습기살균제참사피해자연대 대표의 휴대전화 메모 중
2026년 8월26일 경남 창원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고 서영철 대표의 아들 서한결(40)씨가 보여준 서 대표의 휴대전화 속에는 짧은 메모가 가득했다. 한결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가 휴대전화에 일기처럼 기록을 남겨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배경화면에 한결씨와 아내 채민서(40)씨가 웃고 있는 사진이 설정됐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한결씨는 눈물을 훔치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강인한 분이었어요. 저는 그런 아버지를 많이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프면서부터 많이 달라졌어요. 어느 날에는 운전하다가 호흡곤란이 와서 신호를 기다리던 차를 들이받은 적도 있어요. 우리 차와 앞차 모두 폐차해야 할 정도였죠. 그 일을 겪고 나서부터 자신이 언제 갑자기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심한 우울증이 왔어요. 원래 외면도 내면도 가릴 것 없이 강한 분이었는데….”
2006년 서 대표가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뒤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서 대표는 생전에 호흡기 중증 장애를 비롯해 이형 협심증, 천식, 공황장애, 만성폐쇄성폐질환 등을 앓았다. 늘 콧줄을 단 채 산소발생기를 들고 다녀야 했고,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했다. 한결씨는 그런 몸으로 피해자들을 위해 싸우는 아버지에게 “오지랖”이라며 모진 말을 하기도 했다. “솔직히 가습기살균제를 만든 사람도, 허가해준 나라도, 피해자 모임도 저한테는 다 아빠를 뺏어간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컴퓨터 폴더를 한번 열어봤어요. 아버지와 관련된 내용은 하나도 없더라고요. (아버지가) 서류 작성을 도와준 사람들 이름뿐이었죠. 몸이 멀쩡한 사람도 하기 힘든 일인데….”
한결씨는 아내 민서씨와 함께 8월18일 서울 광화문광장 기자회견에 참석하면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투쟁을 처음으로 직접 지켜봤다. 몸이 성치 않은 피해자들이 광장에 나와 목소리를 내고, 천막 설치를 저지하는 서울시 관계자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어떤 시간을 견뎌왔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때 마이크를 잡은 한결씨에게 든 생각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였다.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으니 전화하면 아버지가 받을 것 같아요. 지금도 실감이 하나도 안 나요. 지난 7월에 아내를 처음 소개해드렸을 때 아버지가 엄청 좋아했어요. 예전에 저한테 며느리가 생기면 매일 아침 등산을 가서 약수터 물을 떠다 주겠다고 할 정도였어요. 돌아가신 당일에도 ‘민서(며느리) 때문에 더 살고 싶다’고 했어요.”
서 대표는 세브란스병원에서 폐 이식 대기자로 등록돼 있었지만, 차례가 오자 수술을 포기했다. 그러다 “너희와 함께할 시간을 더 만들고 싶다”며 마음을 돌려 폐 이식 수술을 받아보기로 했다. 민서씨는 “폐 이식 수술이 말로 들으면 쉬워 보이지만, 알아본 바로는 수술 성공 확률이 50% 정도”라며 “내색하지 않고 홀로 두려움을 감당했을 아버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진다”고 말했다. 서 대표가 심장 조직검사를 받기 전 8월9일 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나는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 하는지 그동안 너무 몰랐다. 자주 호흡곤란이 오니 지레 삶을 포기하려 한 건 아닌지? 며칠 후 기다리던 입퇴원 부서에서 톡이 왔다. 13일 입원 수속 밟으라는 메시지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 다음 주 13일 목요일 서울 가야지. 환자 티 안 나게 정장 입고.’
이 부부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쿠팡과 마켓컬리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8월31일에는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대규모 추모대회에 참석하러 다시 서울로 간다. 민서씨는 “아버님이 병원 진료를 받으면서 힘들었던 부분이나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한 보상이 아무것도 없었다”며 “그저 ‘목숨만 유지할 수 있게 치료비만 대줄게’라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진정한 피해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한결씨가 아버지에게 늘 들었던 말은 “진상규명 없는 온전한 배상은 없다”였다. 돈을 지급하고 사건을 끝내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벌어졌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밝혀야 피해자가 납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서 대표는 청와대 앞에서 ‘2기 특별조사위원회 설치’를 요구했고, 한결씨도 이를 아버지가 남긴 가장 중요한 뜻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결씨가 꼽은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시간’이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병이 더 악화되고, 또 한 분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온전한 배상과 함께 2기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해 국가범죄와 피해자를 밝히는 일을 같이 시작해야 합니다. 피해자들에게 흘러가는 시간은 행정기관의 시간과 같지 않습니다.”
창원(경남)=글·사진 공주경 기자 wnrud123@hani.co.kr
△관련 기사: 가습기살균제 참사 진상규명, 6년 전 박은 대못을 뽑아라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8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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