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가 2026년 3월18일 발표한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종합보고서’에 대한 한국방송(KBS) 뉴스 화면.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만년필 세 자루. 일본 방문 때 친척이 준 선물이었다. ㄱ씨는 귀국 뒤 두 동생과 한 자루씩 나눠 가졌다. 이게 빌미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공안기관에 영장 없이 끌려가 물·전기 고문 등 폭력을 당했고, 결국 ‘자백’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67년의 일이다.
2026년 3월18일 제주도는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종합보고서’를 발표했다. 1961년부터 1987년까지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자행된 간첩조작 사건을 조사해 최소 90명의 피해자를 공식 확인했다. 제주대안연구공동체에 의뢰해 2022년부터 4년간 진행한 조사 결과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경찰·검찰 등 공안기관은 제주도민을 손쉽게 ‘의심 집단’으로 간주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제주와 일본 오사카 사이 인적 이동이 활발했고 해방 이후에도 가족·친지 교류가 이어졌다. 일부 재일 제주인이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가입했다는 사실은 ‘일본에 다녀온 제주도민은 빨갱이’라는 억지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였다. △영장 없는 체포 △물·전기 고문 △수면 박탈 및 음식 제한 △알몸 상태로 거꾸로 매달기 등 온갖 불법과 폭력이 난무했다.
간첩 혐의는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 전체의 삶을 무너뜨리는 낙인이었다. 출소 후에도 ‘간첩’이라는 꼬리표는 지워지지 않았다. 취업이 막히고 인간관계가 끊겼다. 일부는 고향을 떠나 이름을 바꿨다. 제주대안연구공동체는 고문 후유증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우울·알코올 의존으로 이어졌고, 그 피해가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지금도 영향을 미친다고 기록했다.
보고서는 피해자 지원이 조례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국가폭력 피해 전반을 포괄하는 국가 단위 법 제정과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와 연계한 심리·의료 지원의 법적 기반 확충을 요구했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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