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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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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성’이 예술 그 자체!

시각장애인 예술단체 ‘힘빼고컴퍼니’ 이성수·장근영의 급진적이고 유쾌한 실천
등록 2025-06-05 22:58 수정 2025-06-11 19:46
중도시각장애인 연극배우 장근영씨(왼쪽 둘째)와 이성수씨(셋째)가 2024년 10월 모두예술극장에서 ‘성수와 근영이의 오픈/웃픈마이크: 날아라 서핑보드’를 무대에 올렸다. 모두예술극장 페이스북 갈무리

중도시각장애인 연극배우 장근영씨(왼쪽 둘째)와 이성수씨(셋째)가 2024년 10월 모두예술극장에서 ‘성수와 근영이의 오픈/웃픈마이크: 날아라 서핑보드’를 무대에 올렸다. 모두예술극장 페이스북 갈무리


“저희도 키랑 얼굴 엄청 보는데, 어떡하죠?” 시각장애인 연극배우 이성수씨의 말에 오픈마이크 현장이 웃음으로 터졌다. 앞서 한 남성 코미디언이 “제가 키가 작아서요. 키 안 보는 여성이 이상형이에요. 시각장애인이죠”라고 농담하자, 성수씨가 능청스럽게 받아친 것이다. 서툴고 불완전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서로를 혐오하지 않고 함께 웃을 수 있는 밤. 내가 상상하던 코미디클럽의 모습이었다.

시각장애인 예술창작단체 ‘힘빼고컴퍼니’를 운영하는 이성수(42)씨와 장근영(41)씨는 모두 중도시각장애인이다. 20대까지는 앞을 볼 수 있었다. 운전면허도 따고, 진로를 고민하던 어느 날 시야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성수씨는 녹내장 진단을, 근영씨는 “앞으로 실명하게 될 유전병”이라는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았다. 당시 시력이 1.0이던 근영씨는 믿기 어려웠다. 장애인 등록을 망설였다. 단지 눈이 안 보이게 됐을 뿐인데,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게 힘들었다.

시각장애인에게 허락된 직업은 많지 않았다. 법으로 보장된 유보직종인 ‘안마사’가 그중 하나였다. 두 사람은 30대 초반이라는 비슷한 나이에 맹학교에 입학해 안마를 배웠다. 성수씨는 첫 출근날을 잊지 못한다. “어떤 손님이 울면서 들어오셨어요. 목과 어깨가 너무 아파 며칠을 못 주무셨대요. 저도 첫날이라 덜덜 떨면서 배운 대로 손을 올리고 꾹꾹 눌렀더니… 어느 순간 코를 골며 주무시더라고요. ‘나 지금 사람 살리고 있는 건가?’ 짜릿했어요.”

시각장애인 당사자들조차 “안마는 마지막 수단”이라며 스스로 천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안마의 가치와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안마사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고, 예술현장의 접근성 변화를 담은 책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1도씨와 온도들 펴냄)를 썼다.

성수씨는 대학 시절 한 연극 동아리 선배를 회상했다.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연극영화과도 없는 지방대에서 ‘나는 진짜 배우가 될 거야’ 말하고 다니길래 속으로 비웃었어요. 현실감각 없다고. 그러다 시력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데, 그 선배(오정세 배우)가 점점 유명해지더라고요. ‘아, 내가 남의 꿈을 너무 쉽게 재단했구나.’ 웅크리고 있던 저에게, ‘그래도 한번 해봐’라는 메시지가 됐죠.” 그렇게 그는 시각장애인 연극배우 오디션에 도전했고, 대학로 무대에 섰다.

근영씨는 지금도 기업에서 ‘헬스키퍼’로 일하며 매일 사람들의 어깨를 만지고, 에세이집 ‘어쩌려고 혼자 다녀?’(꼬닥꼬닥협동조합 펴냄)에서 삶을 풀어냈다. “장애인이 돼보니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르고, 모르는 게 편견이 돼서 제가 사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보이지 않게 된 뒤 더 능숙해진 기술이 있냐는 질문에 성수씨는 말했다. “이 장애라는 건… 도무지 적응이 안 돼요. 선택의 범위가 좁아지는 일이거든요.” 그렇다면 선택권이 줄어들수록 필요한 건 무엇일까? “선택의 범위를 다 맞춰주는 거? 내가 안 보이니까 너도 못 봐! 농담이에요, 하하.” 그런 극단적인 상상도, 때로는 필요하다. “물론 우리 사회가 당장 좋아질 순 없겠죠. 그런데 문화예술 활동을 하면서 좋은 건, 그런 판타지를 작품 안에서라도 실현해볼 수 있다는 거예요.”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는 선택지를 만들어가는 일. 접근성이 ‘보조’가 아닌, 예술 그 자체가 되기를. 이상, ‘접근성 아티스트’ 힘빼고컴퍼니였습니다.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궁금한 건 당신’ 저자

 

*남플리,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수진 컬처디렉터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힘빼고컴퍼니’(@himpegocompany)의 플레이리스트

1도씨와 온도들 
https://www.instagram.com/1docci/

시각장애인에게 유튜브는 친화적인 매체가 아니에요. 이곳은 극장과 공연예술 주위의 재미있는 일을 발견하고 만드는 새로운 관점·세계를 여는 극장, 학교, 출판사, 커뮤니티입니다. 공연의 행위와 과정이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는 믿음 아래, ‘인간술로서의 공연예술’을 지향하며 클래스, 출판, 커뮤니티, 상품 등을 제공해요.

 

국가대체자료공유시스템
https://dream.nld.go.kr/dream/index.do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앱입니다. 시각장애인인 저는 종이에 잉크로 인쇄된 책을 읽기 어려운데, 국립장애인도서관에 읽고 싶은 책을 신청하면 이 앱을 통해 소리로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 기관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를 제작하는데, 이 앱은 그 모든 도서를 하나로 통합해 연결해주기 때문에 편리하고 좋아요. 읽고 싶은 책을 신청하면 몇 개월 기다려야 하는 건 좀 불편하지만,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풍자와 해학이 살아 있는 곳. 완벽하진 않지만,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려 애쓰는 곳. 바닥까지 드러내도 괜찮은 곳. 서로의 민낯을 향해 짓궂지만 따뜻한 웃음을 건네는 곳. 그 자체로 괜찮은 곳. 그래서 예술이고 위로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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