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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보이는 웹디자이너…3초의 효율보다 3일의 기다림을 택했다

“돌고 돌아 찾은 명제는 ‘너 자신을 알라’”…육영서씨의 공감각적 플레이리스트
등록 2026-02-26 22:03 수정 2026-03-05 17:57
유화 ‘너 자신을 알라’를 소개하는 육영서. 66DAYS 제공

유화 ‘너 자신을 알라’를 소개하는 육영서. 66DAYS 제공


“하나하나 그리는 데 두 시간 넘게 걸렸어요. 수행한 거죠. 돌을 깎듯이.”

프롬프트 한 줄이면 3초 만에 화려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시대. 육영서는 캔버스 앞에 앉아 붓을 든다. 유화는 본질적으로 기다림의 매체다. 새로운 색의 층을 올리려면 이전의 층이 마를 때까지 꼬박 3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는 3초의 효율 대신 3일의 기다림을 택했다. 그렇게 묵묵히 쌓아 올린 유화의 제목은 ‘너 자신을 알라’다.

사실 그의 이력은 의외다. 나는 그와 일기로 모르는 이들을 잇는 ‘소셜저널링’을 통해 서로의 일기장을 공유하는 사이다. 일기장에서 본 육영서는 순수예술 전공자 같았다. 일기에 주로 그림과 영감 이야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만난 그가 노트북 탭을 열 때마다 지난 10년간 공들여 작업한 유려한 인터랙티브 웹페이지가 튀어나왔다. 10년간 디자이너이자 웹개발자로 살아온 그는 이 ‘인공지능(AI) 격변기'에 누구보다 빠르게 올라타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최전선의 기술자다.

그런 그가 왜 돌연 ‘느림’을 택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그가 느끼는 감각을 이해해야 한다. 육영서는 소리를 들으면 색이 보이는 공감각을 지녔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면 화음이 희미하게 색으로 느껴졌다. 여행 중 음악을 들으면 하늘색 바탕 위로 주황색 도형이 회전하곤 했다. 오랫동안 그래왔지만, 자신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 ‘공감각적 현상’이 남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임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는 신학교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스스로 길을 개척하며 디자인과 웹 개발을 익혔다. 그러다 감각의 ‘다름’을 인지하고서 그 공감각을 시각적 작업으로 옮기기 위해 디자인 커뮤니티 ‘디학’에 들어갔다. 직접 만든 음악의 청각적 이미지를 모션그래픽으로 옮긴 ‘무위자연’, 공감각에 대해 풀어낸 책 ‘상징과 여정’이 그 결과다. 최근에는 물리적 캔버스도 옆에 펼쳐두었다. 인간의 손으로만 완성하는 아날로그 작업에 도전하고 있다.

“인공의 힘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을 표현하고 싶어요. AI가 발달할수록 인간에게 남는 마지막 영토는 ‘영성'일 테니까요.” 그가 말하는 ‘영성’은 종교적 언어만은 아니다. 그가 신학교에서 배운 건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상담 공부를 하면서 나 자신한테 상담을 가장 많이 했어요. 왜 나는 이렇게 느끼는 걸까?”

상담에서 그림으로 돌아와 질문했다. 왜 ‘너 자신을 알라’인지. 지난 10년간 디자인은 직업인으로서 그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창과 방패, 물과 빵이 돼줬다. 하지만 껍데기가 쌓여갔다. “어느 날 보니 겉모습부터 행동까지 나 자신마저 디자인하고 있더라고요.” 이제 그는 껍데기가 아니라 자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다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오래된 명제로 돌아왔다.

육영서는 인터뷰 내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결국 할 말은 다 한다. 언젠가 자기 이름을 딴 책 ‘영서’를 내고 2028년 개인전을 열겠다고. 그는 지난 시간 상담으로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웠고, 디자인으로 그것을 세상에 건네는 법을 익혔다. 이제 그 둘을 엮어 사람들을 위로하는 예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수진 컬처디렉터

 

육영서(@mokguli)의 플레이리스트

 

1. David Bowie- Look Back In Anger, Music Video

중학생 때 데이비드 보위를 알게 되었는데, 그의 노래는 나의 깊이만큼 들려요. 같은 곡이라도 10대, 20대, 30대에 다르게 들리는 이유는 경험의 차이 때문이에요. 감각은 유화처럼 시간을 들여 살아내야 쌓이는 거 같아요. 그의 음악은 뮤직비디오를 통해 더욱 입체적으로 변합니다. 이 곡은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2. 패닉-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학창 시절 들었던 패닉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마음의 고향입니다. 저는 이 곡을 시작으로 공감각 탐구가 시작됐어요. 혹시 저와 같이 세피아색, 노란색, 갈색의 배경이 느껴지시나요?

3. 무위자연(無爲自然)

무위자연이란,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순리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직접 제작한 음악을 통해 나타난 청각적 심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촉각적 경험(스크롤링)으로 마무리해 공감각으로 엮어냈습니다.

 

*남플리,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수진 컬처디렉터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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