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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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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음악 기다리는 사람, 500명은 있지 않을까요”

상실에서 시작된 뮤지션 정원영의 2025년 새 앨범과 김민기 추모곡 ‘먼 북소리’, 그리고 그의 플레이리스트
등록 2025-09-04 22:42 수정 2025-09-17 11:23
2025년 10월 김민기 추모곡 ‘먼 북소리’를 포함해 11곡을 담은 새 앨범을 발매하는 뮤지션 정원영. 정원영 제공

2025년 10월 김민기 추모곡 ‘먼 북소리’를 포함해 11곡을 담은 새 앨범을 발매하는 뮤지션 정원영. 정원영 제공


“도파민 중독의 시대에 이렇게 한가한 음악을 하시네요.”

뮤지션 정원영(65)은 지인의 말을 전하며 웃었다. 2025년 9월 발매될 그의 아홉 번째 정규앨범 ‘소풍’에 실릴 곡들을 두고 나온 반응이다. 하지만 그 ‘한가함’ 속에는 깊은 상실의 흔적과 내면적 성찰이 배어 있다.

“견딜 수 없어 곡을 쓰기 시작했어요”

이번 앨범의 테마는 ‘상실’이다. 시작은 2022년 이태원 참사였다. “그때 뭔가를 덜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곡을 쓰기 시작했어요.” 이어 존경하던 뮤지션들이 세상을 떠났다. 웨인 쇼터, 칼라 블레이, 버트 배커랙, 제프 벡….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리며 곡을 썼지만 너무 많은 이가 떠나 ‘히’(He·그), ‘시’(She·그녀)로 제목을 대신했다. 아끼던 후배를 잃고 만든 곡 ‘인비저블’(Invisible·보이지 않는)에는 “그 친구가 젊었거든요. 그러다보니 여전히 어딘가 존재하는 것 같더라고요. 우리 눈에는 보이지만 않을 뿐”이라는 마음을 담았다.

2024년 세상을 뜬 ‘뒷것’ 김민기를 추모하는 ‘먼 북소리’가 앨범에 담기고, 전체를 관통하는 ‘소풍’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제목은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에서 따왔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건 슬픈 일이지만, 결국엔 우리 생이 소풍 같았으면 해서요.”

어떤 시간이 다가옴을 의미하는 ‘먼 북소리’에는 김민기 선생이 자주 썼던 단어 ‘바람’과 ‘벌판’ 등이 가사에 녹아 있다.

바람에 편질 쓴다. 천천히 꾹 눌러. 아쉬움에 걸음을 멈추고. 귀 기울인다.

먼 북소리, 저 먼 북소리에, 새벽잠을 물리고 길을 나선다.

그대 없는 벌판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김민기 추모곡 ‘먼 북소리’ 중)

“2024년 타계한 팝뮤직의 거장 퀸시 존스가 처음 내한 공연을 한 2013년에, ‘당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뭐였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어요. ‘사랑하는 일, 나누는 일 다 너무 중요했지만, 내겐 살아내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고요. 어릴 적 그는 힘든 환경에서 자랐거든요. 아버지는 시카고 갱단의 목수였고, 빈민가에서 살던 그는 열 살 즈음부터 좀도둑질하고 다녔대요. 그날도 집을 털러 갔다가 처음 악기를 보게 되었고, ‘이게 뭐지?’ 싶어 건드려봤는데 천상의 소리가 흘러나왔대요. 그 얘기가 떠올라 가사에 덧붙였어요. ‘사는 게, 살아내는 게, 사랑이라 기억해낸다’라고.”

500명을 위해서 음악을 계속한다

그는 ‘먼 북소리’를 2025년 1월 어느 새벽에 썼다고 했다. 잊어버리면 안 돼서 휴대전화 녹음 버튼을 누르고, 삐걱거리는 페달 소리까지 고스란히 녹음된 데모 버전을 만들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듣더니 이것도 앨범에 넣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2025년 10월25일에 나올 엘피(LP)에는 ‘먼 북소리’ 데모 버전과 9월에 나오는 신곡 2곡을 포함해 총 11곡이 수록된다. 아니, 그럼 엘피를 안 사는 사람들은 이 버전을 못 듣느냐, 최종 녹음본보다 더 애틋한 느낌이 드는데 아쉬워서 어쩌냐고 묻자, 그는 “요즘 사람들 그런 것도 유튜브에 올리고 그러지 않나요?”라고 묻는다.

“불법 업로드… 말씀이세요? 제가… 할까요”라고 묻자, 잠시 생각하더니 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단다. 본인이 워낙 ‘듣보잡’이라 사람들이 (엘피 음원을 추출해 유튜브에 올리는 수고를) 안 할 수도 있다고. 아니, 무슨 소리세요. 이적, 장기하, 김광진이 존경하는 뮤지션의 뮤지션으로 소문난 분이.

“최근 몇 년간 앨범을 내면서 홍보도 시도하고 인터뷰도 해봤는데 별 소용이 없더라고요. 환갑 지난 음악가에게 젊은 사람들이 관심 없죠.”

“하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30대인 저와 제 친구들은 여전히 정원영의 음악을 듣는걸요.”

“그래서 늘 얘기해요. 500명을 위해서 음악을 계속한다고. 아마 500명은 있지 않을까, 내 음악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래서 앨범도 500장 정도 찍어요. 시디(CD)나 엘피나 안 팔리는 건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제 동년배 음악가들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에 앨범도 잘 안 내지만, 저는 정규앨범을 디지털 음원으로만 낸 적은 없어요. 특히나 이번 앨범은 저에게 의미가 커서 실물로 만들어놓고 싶었어요. 주변에서도 만들어주겠다고 그러고… 그래서 만듭니다. 덧붙이자면… 아니, 덧붙이는 게 아니구나. 사실 제일 중요한 얘기인데, 음악을 만들고 녹음하는 것부터 실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 속지 디자인이나 제작비, 오케스트라 반주, 음악과 어울리는 영상… 이 모든 게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투자해주는 제작사도 없는 뮤지션에겐 더욱. 그래서 지금 이걸 엘피로 제작하느니 마느니 이런 얘기를 하는 거 자체가 언감생심이죠. 절대 저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이고 너무 많은 빚을 졌어요.”

33살에 1집 ‘가버린 날들’(1993)을 발표했을 때, 그는 이미 결혼하고 교편을 잡은 상태였다. 35살에 ‘다시 시작해’를, 38살에 ‘그냥’을, 51살에 5집 ‘정원영’(2010)을 발표하며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팝 음반 부문 후보에 올랐다. 7집 ‘사람’(2015)에는 세월호 관련 이야기를 담았지만 홍보할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일어나선 안 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졌을 때, 피해자에게 힘이 되는 말보다 안티적 반응이 더 세게 들리잖아요. 그것에 대해 예술가라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밥 딜런과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뮤지션 정원영이 휴대전화에 메모한 ‘음악을 향한 나의 마음가짐’. 정원영 제공

뮤지션 정원영이 휴대전화에 메모한 ‘음악을 향한 나의 마음가짐’. 정원영 제공


마지막으로 그에게 오랜 세월 음악을 계속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사소한 것에도 일희일비하며, 주변의 재능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작아지는 날이 당신에게도 있었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헤쳐갔는지. 그러자 그는 메모장에 적은 기도문을 보여줬다. “제가 24살에 미국 유학을 갔어요. 한국에서 그래도 나 좀 하는 줄 알았는데 그곳엔 잘하는 친구가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매일 기도했어요. ‘내 음악이 최고가 아니더라도 내가 내 음악을 사랑하게 해주세요’라고.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니라, 착각은 나의 힘이라고. 내가 최고가 아니더라도, 나는 정말 최고라고 착각을 하자고. 그 힘으로 버틴 것 같네요.”

“이제는 혼자 조용히 멍 좀 때려볼래요”

1995년 정원영 2집 수록곡 ‘다시 시작해’ 유튜브 댓글에는 이런 말들이 있다. “아침 11시 맑은 날 들으면 딱이에요.” “처음 듣고 버스 놓쳤지만 테이프 사러 달려갔죠. 지금 들어도 세련됐네요.” “2025년에도 듣는 사람?” 세월을 이기는 음악을 꿈꿨던 그는, 그 바람을 이뤘는지도 모른다. 듣는 이가 비록 500명뿐이라 해도. 당신도 그중 하나라면, 9월 신곡 ‘먼 북소리’와 9월27~28일 정원영밴드 단독 공연 소식을 놓치지 말길.

앨범 작업을 마친 그는 이제 걷기를 계획한다. 11월에는 본격적으로 한 달을 걸을 예정이란다. “제가 부러워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혼자 해파랑길을 40일 걸어요. 차박을 하면서. 그래서 저도 백패킹 장비를 조금씩 모으고 있어요. 혼자 잘 수 있는 텐트, 밑에 까는 거. 그러자 집사람이 묻더라고요. 당신 이거 왜 사? 집 나가려고고? 제가 올해 정년을 맞았거든요. 평생 해온 일이 말하고 설명하는 일이어서 이제는 혼자 조용히 걸으며 멍 좀 때려볼까 해요. 하하.”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궁금한 건 당신’ 저자

*남플리,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수진 컬처디렉터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정원영(@gunbaner409)의 플레이리스트

(1) 류다빈- 2024 국제음악콩쿠르 재즈피아노 부문 1위 연주

재즈피아니스트 류다빈은 버클리음대, 맨해튼음대, 줄리아드음악학교를 거쳐 미국 뉴욕에서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리 잡아가는 재즈계 유망주입니다. 2024년 UNISA 국제음악콩쿠르에서의 우승 연주를 들어보시길 추천합니다.

 

(2) 일레인- Psycho

이런 소리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를 지닌 매력적인 싱어송라이터, 일레인. 그의 정규앨범 3집이 곧 세상에 나옵니다

 

(3) 웨이브 투 어스- seasons

웨이브 투 어스는 국내보다 국외에서 먼저 주목받은 3인조 인디밴드입니다. 최근 미국 공연에 응원하러 갔지만, 너무 많은 팬으로 인해 발길을 돌려야 했을 정도죠. 세계 무대를 돌며 또 다른 케이뮤직을 알리는 자랑스러운 후배님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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